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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유신정권 몰락 이끈 ‘YH무역 투쟁’ / 이총각

등록 2013-08-22 19:20

1979년 3월 경영진의 잘못을 폐업으로 무마하려다 노동자들의 반발을 산 와이에이치(YH)무역은 79년 8월6일 끝내 일방적으로 폐업을 강행했다. 이에 최순영 지부장을 비롯한 와이에이치무역 노조 여성 노동자들은 야당인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3월 경영진의 잘못을 폐업으로 무마하려다 노동자들의 반발을 산 와이에이치(YH)무역은 79년 8월6일 끝내 일방적으로 폐업을 강행했다. 이에 최순영 지부장을 비롯한 와이에이치무역 노조 여성 노동자들은 야당인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71
1979년 초입부터 세계경제를 뒤흔들었던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민중들의 생활고는 더욱 극심해졌으며 피부로 느끼는 빈부 격차는 사회적 저항을 일으키며 악화돼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릴수록 더 강하고 날카롭게 총칼을 휘두르는 유신정권에 대항해 민주화운동 진영은 민중의 생존권 요구와 결합하며 반독재 투쟁을 한층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직 노동운동은 유신정권 말기로 갈수록 무기력해져 노총과 산별노조 등이 국가권력에 투항하면서 어용화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위노조들이 무력화되는 가운데에도 경인지역의 몇몇 민주노조들은 사활을 건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와이에이치(YH)무역 노동조합의 투쟁은 유신정권 몰락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 무렵 와이에이치무역은 가발산업의 사양화와 경영진의 외화도피 및 무리한 경영으로 재정상태가 악화일로에 있었다. 결국 70년 4000명이었던 종업원은 78년 500여명으로 줄었고 은행 부채는 31억원이 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수출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고 수출 순위도 86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78년 5월9일 와이에이치노조는 ‘제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열고, 그동안 일감이 없다며 회사가 본공장을 휴업시키면서 정작 작업량을 하청업체로 빼돌렸다는 판단 아래 농성에 돌입했다. 결국 밤늦게 공장장이 나타나 앞으로 인원 감소는 없을 것, 자연 감원이 생길 때에만 공개채용을 할 것, 만약 휴업이 필요할 때는 노사합의에 의할 것, 하청공장에 주는 물량을 점차 줄이고 본공장 위주로 작업을 확대 실시할 것 등을 약속했다.

이어 그해 단체협약 갱신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노사협상에 나온 회사 경영진은 여성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말을 끊임없이 해댔다. “경영 부실에 따른 손실을 노동자의 임금으로 메꾸려고 합니까?” 노조의 항의에 회사 쪽에서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가 돈이 없는데 자식의 용돈을 올려줄 수 있습니까?”라고 강변했다. 노조 쪽에서는 즉각 항의했다. “당장 먹고살 생계비를 어찌 용돈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또 경조사 휴가와 관련해서도 노조에서 부모 사망 때 5일간의 휴가를 요구하자, 회사 쪽에서는 “여자들이 장례에 그렇게 오래 있어 봤자 뭘 합니까?”라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여 반발을 샀다. “여자도 똑같은 자식인데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결국 ‘상여금 연 220%, 승급 연 40원, 휴일 1일 추가’하는 것으로 단체협약을 갱신했다.

그러나 와이에이치무역은 79년 3월29일, 4월말로 폐업한다는 공고를 다시 내걸었다. 회사 대표 장용호가 미국에 외상으로 수입해 간 대금을 결제기간이 지나도록 갚지 않아 사실상 15억원을 외화도피시킨 것이 주원인이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노동청 북부지방사무소를 찾아갔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진 자가 하기 싫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무책임한 말만 들어야 했다. 더이상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자, 노조는 4월13일 조합원 총회를 열고 농성을 시작했다. 요구 조건은 ‘생존권과 근로권의 보장, 폐업공고의 철회, 조흥은행은 와이에이치무역을 은행관리기업으로 인수해 부채상환 기한을 5년 거치 5년 상환으로 완화할 것, 조흥은행은 경매처분을 할 땐 고용승계 및 임금청산을 보장할 것’ 등이었다.

하지만 와이에이치 노동자들의 처절한 호소는 경찰 기동대 100여명의 투입과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2시간에 걸쳐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여성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마구 내려쳤으며, 앞가슴을 만져 떨어지게 한 다음 어두운 계단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이날 조합원 이숙희가 머리를 다쳐 실신 상태에서 입원했고, 다른 2명은 전치 10일의 부상을 입었으며 100여명이 다쳤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노동자들은 이튿날 다시 모여 농성에 들어갔고 결국 노동청의 박아무개 차장으로부터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낸 뒤 해산했다. 하지만 약속한 사항들이 실행되지 않자 7월30일 노조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12시까지 농성을 계속했다. 그러는 가운데 회사는 8월6일 다시 일방적으로 폐업공고를 내고 폐업을 강행했다. 기숙사에서 밤샘농성을 계속하던 와이에이치 조합원들은 마포에 있는 신민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계속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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