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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해태노동자, 8시간 노동제 ‘불굴의 투쟁’ / 이총각

등록 2013-08-25 19:23수정 2013-08-25 21:05

1979년 8월 해태제과 노조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 쪽의 폭력적 탄압에 맞서 싸운 끝에 ‘근로기준법이 정한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해 전 식품업계 노동자가 8시간제 혜택을 보게 했다. 그러나 9명의 노조원은 강제퇴직을 당했다. 사진은 당시 회사 쪽의 폭력을 고발하는 노조의 유인물로 전화항의 운동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79년 8월 해태제과 노조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 쪽의 폭력적 탄압에 맞서 싸운 끝에 ‘근로기준법이 정한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해 전 식품업계 노동자가 8시간제 혜택을 보게 했다. 그러나 9명의 노조원은 강제퇴직을 당했다. 사진은 당시 회사 쪽의 폭력을 고발하는 노조의 유인물로 전화항의 운동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72
1966년 동일방직에 입사했을 때 이총각이 날아갈 듯 좋았던 것은 무직의 남편과 자식 다섯을 먹여 살리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던 어머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릴 수 있어서였다. 그것도 ‘동일방직’이라는 좋은 회사의 종업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레었다. 당시 인천 만석동 주변엔 성냥공장과 대성목재 등이 있었지만 임금뿐만 아니라 열악한 근로조건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동일방직을 선망해서 들어온 노동자들도 제법 많았다. 일단 들어오면 8시간 3교대 근무와 식사 제공, 깨끗한 시설 등에 놀라 좋아하지만 실상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8시간 노동은 앞뒤로 2~3시간을 현장에 머물러 준비와 마무리를 해야 했으므로 12시간 노동과 다르지 않았고, 가부장적 경영행태에서 오는 남녀의 임금 차이는 여느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장기집권을 꾀하며 추진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조국 근대화’는 이렇게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권리를 알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가장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임금 인상과 8시간 노동제의 확보였다.

특히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확보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투쟁을 전개해 나간 소수의 여성 노동자들의 투지가 빛나는 승리였다. 해태제과는 45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설립되어 78년말 현재 종업원 3000여명을 둔 굴지의 제과업체로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남성 노동자인 김경수가 18년 동안이나 지부장으로 군림한 어용노조였다. 당시 해태제과는 하루 12시간 노동에다 주야 2교대 근무를 매주 바꾸는 식이었는데, 일요일에는 17시간 내지 19시간이나 되는 곱빼기 노동을 해 주당 근로시간이 72시간 내지 90시간이나 되었다.

그렇게 일을 하는데도 6년 경력의 노동자 기본급이 1만1000원이었고 수당까지 합쳐 겨우 4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야간 작업이나 곱빼기 작업을 할 때는 피로와 졸음을 쫓느라고 수면방지용 약인 ‘타이밍’을 상습 복용하는 노동자가 태반이었다. 게다가 12시간을 계속 일하다 보니 변비와 신경통이 예사였고,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부서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온몸이 동상에 걸리기도 하고, 12시간 계속 과자를 싸는 노동자들은 손가락에 피가 맺히기도 했다.

해태제과의 8시간 노동제 요구는 79년 7월4일 비스킷부 포장반 A·B조의 노동자 200여명에 의해 본격 제기됐다. 발단은 회사가 그해 3월 약속했던 도급제 폐지를 일방적으로 이행하지 않았고, 비수기 동안은 8시간만 일하기로 합의하고도 이틀 뒤에 다시 12시간 노동을 강요한 데 있었다. 7월이 되어도 도급제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도시산업선교회(산선) 회원이 중심이 된 여성 노동자들은 반드시 해결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도급제로 일하는 인원이 가장 많은 비스킷부에서 태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요구하지 않아도 연례적으로 비수기에는 한달 동안 한시적으로나마 8시간 노동을 했던 것을 이제는 회사가 ‘8시간 노동제는 절대로 안 된다’며 거부하고 나섰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마침내 7월10일 비스킷 포장부 200여명이 이에 항의해 8시간 근무를 마친 뒤 잔업을 거부하고 퇴근해버렸다. 그리고 8월부터는 공개적으로 8시간 노동제를 주장했고 여기에 동조하는 노동자들이 점점 늘어나 캔디부와 카라멜부의 노동자 600여명이 잔업을 거부하고, 회사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정시에 퇴근했다. 이에 회사는 남자 기사·주임·계장 등을 총동원해 현장 문을 잠그고 길을 막아서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씹어 먹겠다”, “밟아 죽이겠다”는 등의 상스러운 욕을 퍼부으며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입사 때 추천인과 가족까지 동원한 퇴사 압력은 여성 노동자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 결국 80여명의 퇴사자가 생기고 많은 노동자들이 12시간 노동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투쟁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 나가던 15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종교계와 사회단체들의 압력과 여론 조성에 힘입어 기필코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해냈다. 이후 8시간 노동제는 전 식품업계까지 확대 실시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8시간제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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