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4월 박정희 정권은 민주·노동운동을 지원해온 진보적 종교인에게 용공 혐의를 씌운 이른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을 터뜨리고 이총각을 비롯한 민주노조 활동가들은 중앙정보부의 남산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했다. 사진은 당시 사건으로 구속된 한명숙(앞쪽부터)·장상환·김세균 등이 80년 서울구치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되고 있는 장면. <한명숙 자서전-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중에서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75
1979년 3월23일 새벽, 이총각은 집으로 쳐들어온 기관원 2명에 의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그 전날 이미 와이에이치(YH)무역 지부장 최순영과 반도상사 지부장인 장현자 그리고 콘트롤데이타의 이영순 지부장 등이 연행돼 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터였다. 원풍모방 부지부장인 박순희 역시 기관원 2명이 노조 사무실로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지만 노조에서 단호히 거절했는데, 며칠 뒤 8시간 이내 조사를 조건으로 내걸고 자진출두 형식으로 조사를 받고 나왔다.
중정의 목적은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관련 참고인 조사였다. 총각은 이즈음 최순영, 이영순, 이경심, 박순희 등과 함께 신인령이 지도하는 소모임을 하고 있었다. ‘남산’의 지하실에서 취조를 받을 때 총각은 바로 이 모임에서 사용했던 자료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그런 건 없다고 버티자 수사관은 총각의 뺨을 후려치며 협박을 해댔다.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은 79년 3월9일 오전 10시 아카데미 간사 한명숙이 ‘김 형사’라고 가짜 신분을 밝힌 중정 요원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신인령, 이우재, 장상환, 김세균, 정창렬, 황한식 등 간사 6명이 줄줄이 연행돼 갔다. 이들은 아카데미에서 주로 노동조합 간부 교육을 담당했다. 이 사건으로 교육생은 물론 친인척까지 50여명이 관련자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7명의 간사들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모두 구속되었다. 검찰은 학습모임 형식의 서클을 ‘사회주의혁명 운동’, ‘반국가단체’, ‘이념그룹’, ‘공산계열’ 같은 용어를 써가며 거대한 조직으로 조작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7명의 간사들은 엄청난 고문을 당했고, 훗날 한명숙은 그때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검찰은 크리스찬아카데미를 후원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소련의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아 그 손아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반공법을 악용해 어떻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이렇게 민주세력에게 덧씌워지는 반공법이라는 올가미는 한편으론 군사독재정권이 국민을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중간집단 교육은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진 다수의 노동자, 농민, 여성들이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고, 현실을 능동적으로 타개해나갈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었다. 그런데 이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이 동일방직, 원풍모방, 와이에이치무역 등의 노조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는 당장 없어져야 할 조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총각은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며 다른 노조 간부들과 연대의식을 쌓아갔고, 처음 접해본 교육방식에 매료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더할 수 없이 즐거운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7명의 간사들은 1심에서 최고 7년형 등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80년 1월 항소심에서 정창렬과 황한식은 무죄를 선고받았고, 1심에서 가장 큰 죄로 지목되었던 지하비밀서클 조직에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부평노동사목 실무자 이경심 세실리아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터지자 잠시 몸을 피해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배가 불러 오면서 심한 통증을 느껴 병원에 입원했는데 만성복막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일 없이 열심이었던 그는 그저 좀 쉬어주면 나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의사도 모르는 사이에 합병증이 암으로 번지고 있었다. 치료를 받았지만 갈수록 아무것도 목에 넘기지를 못하고 고통이 심해져 가는 중에도 그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더 했다.
이경심은 79년 6월14일 새벽 4시20분 선종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항상 기쁘게 살고, 어려운 때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해고되기 전부터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총각은 마치 가족이나 다름없이 곁에서 챙겨주던 그의 죽음으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통곡을 멈출 수가 없었다. 총각을 비롯해 그 시대를 함께했던 이들은 올해도 그의 무덤이 있는 백석의 하늘의 문 묘원을 찾아 그의 뜻을 가슴 깊이 새겼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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