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11일 서울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이던 와이에이치무역 노조 조합원 187명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해산당했다. 사진은 경찰 감시 속에 퇴직금을 지급(왼쪽)받은 조합원들이 버스에 태워져 강제귀향(오른쪽)하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77
1979년 8월11일 와이에이치(YH)무역 조합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해산시키기 위한 경찰의 ‘101호 작전’은 불과 23분 만에 상황종료되었다. 새벽 2시, 자동차 경적 소리를 신호로 현관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명용 소방차 두 대가 주변을 대낮같이 밝히면서 작전은 개시되었다. 동시에 1천여명의 정·사복 경찰들이 신민당사 안으로 들이닥쳤고, 일부는 고가 사다리차를 타고 창문을 타넘어 들어왔다. 그들은 농성장인 4층 강당과 2층 총재실 그리고 기자실 등에 연막가스탄을 터뜨린 뒤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때리고 부수며 노동자 한 사람에 4명의 경찰이 달려들어 사지를 번쩍 들고 끌어냈다.
겨우 눈을 붙이고 깜빡 잠이 들었던 농성 노동자들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깨어나, 불시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맞고 차이면서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일부 노동자들은 주먹으로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려고 했고 사이다병을 깨들고 저항해봤지만 경찰의 폭력적 제압에 모두 당사 밖으로 끌려나왔다. 김영삼 총재 이외 국회의원들과 당원들 역시 무차별적 폭력에 실신 상태가 되었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끌려나갔다. 기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코뼈에 금이 가도록 두들겨 맞고 사진기와 필름까지 뺏겨야 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끌려나간 조합원들은 조사를 받은 뒤 경찰의 감시 아래 회사로 가서 퇴직금을 수령하고, 기숙사에 남아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조합원들과 함께 강제귀향을 해야 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저항을 오로지 폭력으로밖에 대응할 방도가 없었던 박정희 유신정권의 ‘8·11 폭거’는 신민당 국회의원과 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부상을 입힌 채 막을 내렸다. 농성의 책임을 물어 와이에이치 노조의 최순영 지부장과 이순주 부지부장, 박태연 사무장이 구속되었고, 인명진·문동환·서경석·이문영·고은 등이 국가보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폭력사태의 끝에 김경숙 상집위원의 죽음이 있었다. 김경숙은 왼쪽 팔목의 동맥이 끊어진 채 심한 타박상을 입고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농성 현장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발견돼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손쓸 새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경숙 열사’는 당시 스물두 살로, 의지가 강하고 곧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도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직적인 가장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었고, 무슨 일을 해서라도 남동생만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올라와 온갖 고생 끝에 76년 8월 와이에이치무역에 입사하였다. 그는 일을 하면서 그리도 소망하던 야학에 나가 공부도 하고 노동조합을 통해서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고 투쟁에 앞장섰다. 기숙사 농성 때에는 혈서를 써서 회사의 정상화를 요구할 정도로 열성이었고 상집위원으로 결의문을 읽어나가던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동료 노동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곤 했다. 살아생전 그가 쓴 글에는 동료들을 위하는 그의 간절하고 강한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살도록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련다. 현실은 어려워도 주님의 자녀로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며 태양 같은 밝은 등불이 되리라.”
김경숙 열사는 그의 말대로 엄혹한 유신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다. 해마다 8월11일이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김경숙 열사의 묘역에서 그의 투쟁정신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결의를 다지는 시간을 갖는다.
한 나라의 정당이 경찰의 폭력에 유린당하고, 농성을 하던 여성 노동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사태 앞에서 정국은 가마솥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8월23일 구성된 와이에이치문제대책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와이에이치 사건은 단순히 한 기업의 노사분규가 아니라, 20년 동안 추구되어 온 대외의존적 수출주도형 특권경제와 이를 위해 국민의 생존권을 철저히 탄압해온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표출시킨 상징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총각은 와이에이치 노조만은 동일방직 민주노조처럼 현장을 잃고 밖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결국 정권의 야만적인 폭력은 또 하나의 민주노조를 쓰러뜨리고, 아직 청춘을 활짝 펴보지도 못한 여성 노동자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총각은 이 인면수심의 정권이 오래가지 못 할 것이라는 확신에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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