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13일 한국노총은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시위 열기에 떠밀려 서울 여의도 노총회관 강당에서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미 노총위원장실에서 장기농성중이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도 원풍모방, 반도상사, 청계피복 등 민주노조 조합원 등 1000여명과 함께 대회에 참가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83
1980년 5월 들어 한국노총을 상대로 한 노동자들의 민주화투쟁이 본격화했다. 5월3일 금속노동조합 남서울지역 사무실에 9개 분회 노동자가 몰려가 점거농성을 벌였고, 9일에는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장이 민주노조들에 의해 점거되어 농성장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거듭되는 농성사태에 한국노총은 소극적인 태도만 보일 수가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그리하여 5월13일 한국노총 정한주 위원장 직무대행은 겨우 체면이나 차릴 셈으로 서울 여의도 노총회관에서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궐기대회’를 열었다. 노총위원장실에서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도 잠시 농성장을 떠나 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엔 원풍모방, 반도상사, 청계피복 등 민주노조 조합원과 전국의 지부장급 이상의 노조 간부 등 1000여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대회는 형식적으로나마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새 헌법에 반드시 반영하도록 요구하자는 명분으로 열렸기에 한국노총에서 결의문을 준비했는데, 어이없게도 한자투성이여서 정작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게 대회를 시작한 지 30분 만에 정 위원장이 그만 끝낼 셈으로 결의문을 낭독하려는 순간, 원풍모방노조 방용석 지부장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마이크를 낚아챘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나는 오늘 이 대회가 형식적인 대회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으로 노동기본권 보장을 따내는 계기가 되도록 제안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방용석의 당당한 외침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그는 노동기본권 확보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총이 책임지고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와 금속노조 위원장 김병용을 제명할 것, 보수정당들에 노동3권 완전보장을 받아낼 것 등을 주장했다.
“김영태를 제명하라! 노동삼권 쟁취하자!”
대회장을 가득 메운 노동자들의 함성은 천장도 뚫어버릴 기세였다. 그렇게 열화와 같은 함성과 환호 속에서 대회장은 농성장으로 변했고 한국노총가도 부를 줄 모르는 정한주를 비롯한 노총 간부들은 어정쩡하게 농성에 참여했다. 밤새 농성을 한 노동자들은 파업을 한 상태에서 참여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출근을 위해 아침 일찍 농성장을 떠났고, 3교대 작업을 하는 원풍모방 조합원들이 주로 돌아가면서 농성장을 지켰다. 그런 상황에서 농성장이 비어가는 걸 막기 위해 학생들에게 100명 정도만 와서 농성에 함께하자고 제안을 했더니 무려 3400명이 몰려왔다. 주객이 전도되어 학생 집회가 되면서 오히려 노동자들이 주눅 드는 상황이 발생하자 다시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거의 원풍과 동일 해고자들만의 농성이 진행되었다.
그 무렵 광주를 비롯해 전국에서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시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평소 정치에 별로 관심조차 없던 대학생들까지 합세해 연일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수많은 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규모를 더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5월15일 서울역으로 향하던 학생 시위대들이 노총회관을 지나며 창밖을 내다보는 동일방직 해고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에 호응해 해고자들 역시 반갑게 손을 흔들자 노총 간부들이 셔터를 내려버렸다. 그 때문에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거부했다는 오해가 불거지기도 했다.
서울역 앞 광장에 모인 10만이 넘는 학생들이 투쟁가를 부르며 ‘전두환은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대니 서울역이 들썩거릴 정도였다. 한편에서는 경찰을 상대로 투석전이 벌어지고 경찰버스에 불이 나 전투경찰이 숨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의견이 갈려 이제 학교로 돌아가서 기다려보자는 말이 힘을 얻었고,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선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대학생 시위대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제 곧 군을 동원해 농성장에 쳐들어올 거라는 긴급한 상황이 예상되는 속에서 노총회관 농성도 해산을 결정하고 말았다. 한달 넘게 농성을 계속해오던 이총각을 비롯한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해산에 반대했지만 이제 그들 역시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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