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18일 비상계엄령과 함께 수배자 신세가 된 이총각은 난생처음 집을 떠나 서울로, 전북 익산과 임실 등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사진은 5월18일 계엄군의 무차별 유혈진압이 시작되기 직전 광주 조선대생들이 교정에서 ‘비상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85
18년 동안의 긴 겨울을 몰아내기엔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잎들 위로 순식간에 찬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0시를 기해 비상계엄 확대실시를 선포한 1980년 5월18일 아침, 전국의 모든 대학과 주요 지점에 실탄을 장전하고 총검을 꽂은 군인들이 배치되어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특히 서울, 광주, 전주, 대전에는 일반 보병부대가 아닌, 유사시 특수임무를 수행하도록 돼 있는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숨을 죽이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 공포스러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광주의 대학생들이었다. 전남대를 점령하고 학생들을 진압봉과 군홧발로 무차별 구타한 7공수여단 33대대 군인들에게 맞서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를 외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공수부대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혹하고 폭력적인 진압이었다. 비슷한 상황이 조선대, 광주교대, 전남대 의대 등에서도 일어났고, 하루 종일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자 광주시민들도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수부대들의 살육작전이 시작되었다. 그건 시위진압이 아니라 학살극이었다.
광주로의 모든 연결이 끊어지고 흉흉한 소문만 난무하는 상황에서, 서울에서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구속되자, 역시 수배령이 떨어진 이총각은 여기저기 떠돌며 불안한 도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김말룡, 안광수 목사, 공덕귀 등 재야인사들 그리고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서울역 등지에서 유인물을 뿌리는 활동을 했다. 그때 김말룡 팀이 광화문 쪽으로 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구속되자, 총각은 경찰서로 면회를 가기도 했다. 인천과 달리 서울에서는 상대적으로 그의 얼굴이 안 알려진 덕분이었다.
수배 중에 그가 맨 처음 머무른 곳은 서울 합정동에 있는 메리놀수녀원이었다. 그곳 지하방에 두달 정도 머물렀는데, 그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때 처음 먹어본 빵은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아주 꿀맛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 동일방직 노조 투쟁에 큰 도움을 줬던 이철순이 있는 전북 익산(당시 이리)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1978년 8월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확장위원으로 익산에 내려가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던 이철순은 당시 창인동성당 수위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의 방은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세례명을 따 ‘마리아 별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가 익산으로 내려간 이유는 전북지역의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주와 군산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익산에 자리를 잡고 지역 실태조사를 한 뒤 전주·군산·익산에 각각 노동야학을 열어 현장 노동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당시 노동야학은 1기를 수료한 노동자가 2기에는 대학생들과 함께 강학으로 활동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야학에 온 노동자들은 그저 배우러만 오는 게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배우면서 가르칠 것을 생각하고 대학생들은 가르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워 나갔다. 당시 크리스마스 행사에 노동자들이 300~400명 참석했을 정도로 노동야학의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이철순이 처음 시작한 현장 조직 활동은 대봉산업 노조 결성과 태창메리야스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작업, 그리고 아세아스와니의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태창메리야스에서는 81년 2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유명무실한 노동조합을 민주노조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600여명의 여성 조합원들은 회사 쪽의 지지를 받고 나온 남자 분회장을 밀어내고 여성 대표 박복실을 분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전북지역의 노동운동에 지대한 기여를 한 이철순은 이후 전주교구 노동사목위원회를 발족시켜 맡아 하다가 83년 9월 다시 서울로 활동지역을 옮기게 된다.
총각이 석달 정도 머물러 있던 창인동성당은 드나드는 사람도 많고 경찰의 주시를 받는 곳이기도 해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도피생활이 길어질 것이라는 판단이 서자, 총각은 다시 장소를 전주로 옮겨, 효자동성당의 수녀원에서 한달간 일을 도와주며 지냈다. 이후 옮겨갔던 임실에서는 벨기에에서 온 지정환 신부 밑에서 지낸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 치즈를 먹어보기도 했다. 그가 창시한 바로 그 ‘임실 치즈’였다. 이렇게 10개월 동안 계속됐던 그의 수배생활은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한편 몸도 마음도 휴식의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되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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