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82년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법정 투쟁을 통한 복직의 길이 막혀버리자 이총각은 허탈감을 이겨내고자 인천 주안공단의 봉제공장 원풍물산에 들어가 일에 몰두했으나 ‘위장취업’이 드러나 9개월 만에 또다시 해고당했다. 사진은 40여만평의 주안염전을 매립해 수출산업단지로 개발된 인천 주안공단의 70년대 말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88
1981년 4월28일 오전 10시 서울고법 226호 법정에서 열린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에 관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행정소송은 기각돼 버렸다.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했고, 82년 말께 결론이 난 상고심 역시 기각됐다. 민주노조들을 무자비하게 깨부수고 있던 정부는 여전히 회사 편이었고 해고자들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신군부의 철권 아래 사법부가 결코 노동자 편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떠한 탄압에도 절대 좌절하지 않는 것만이 그들을 이기는 길임을 모르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수록 똘똘 뭉치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저력이 결국은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거라고 확신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이총각은 엄청난 허탈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한 상태에 빨려들기도 했다. 그래서 결혼이나 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총각은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82년 봄 주안 5공단에 있는 원풍물산이라는 봉제공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본명으로는 취업할 수 없는 상태라 결혼해서 주부로 살고 있는 동일방직 노조의 전 조직부장 김순분의 이름으로 입사를 했다. 당시에는 다른 해고 동료들 역시 취업을 하거나 결혼을 하는 등 동일방직 복직추진위원회의 활동이 다소 소강상태에 있었다.
총각은 오랜만에 현장에 들어가 일을 하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의 이름으로 생활하는 게 아니라 긴장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불안한 마음을 씻어내렸다. 열심히 일 잘하는 ‘김순분 아줌마’로 통했던 총각은 동료들하고도 잘 어울려 백화점에 가서 바바리코트랑 신사복 구경을 했던 적이 있었다. 총각은 “이게 다 우리가 만든 옷들인데 가격이 우리가 받는 월급의 몇 배나 된다. 왜 그럴까?”라는 식으로 슬쩍 운을 떼기도 했다.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터놓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했다. 그리고 꼭 참석을 해야 하는 집회가 있을 때는 시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거나 서울에 올라왔다는 핑계를 대서 조퇴를 하고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들한테 뒤를 밟힌 것 같았다. 당시엔 남동생이 용현동에 집을 사서 거기서 주안까지 버스로 출퇴근을 하던 때였다. 아침에 기분 좋게 출근을 했는데 공장장이 불렀다. 그때는 입사한 지 9개월이 다 돼 가던 때라 좀 방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공장장은 대뜸 “이총각씨!”라고 부르며 김순분은 누구냐고 묻더니 눈을 똑바로 뜨고 총각을 노려봤다. 총각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블랙리스트 때문에 내 이름으로는 취업이 안 되고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친구의 이름을 빌렸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계속 다닐 거냐고 공장장이 되물었다. 총각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공장이 발칵 뒤집혔다. 불순분자가 들어와 노동자들을 포섭하려고 한다며 총각에 대한 악선전을 해댔고, 총각과 같이 백화점 등을 놀러 다녔던 동료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총각은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검찰에서 출두명령서가 왔는데 사문서 위조 건으로 고발된 상태였다. 검찰에 가기 전에 김병상 신부에게 상의를 하니 “담당인 김종세 검사는 가톨릭 신자로 인천가톨릭센터에서 법률상담 봉사도 하는 사람이라 괜찮다”며 가보라고 했다.
자기 부인도 세례명이 루시아라고 반기던 김 검사는 취조하듯 기분 나쁘게 굴더니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서울 갈 때 직행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총각씨는 완행버스를 타고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천당으로 바로 가지만 총각씨는 여기저기 돌다가 어찌될지 모른다는 얘기야.” 총각은 이 어이없는 유치한 소리에 참아야 하나 싶다가 끝내 한 대꾸 하고 말았다. “말 다 했어요? 나를 천당으로 부를지 말지는 하느님이 정하는 거고, 당신이 감히 내 신앙관에 대해 말할 자격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그 검사는 선심을 쓰듯 사무실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제안을 했으나 총각은 무식해서 그런 일은 못한다며 박차고 나와 버렸다. 훗날 변호사가 된 그는 총각이 노동사목 활동을 할 때 생긴 노동자의 사고 처리를 잘 해결해주어서 고마운 인연으로 남았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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