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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감금·폭행·납치…피로 물든 한가위 / 이총각

등록 2013-09-17 17:26수정 2013-09-22 15:45

1980년 ‘5·17 비상계엄’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신군부는 노동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해 불과 2~3년 사이에 한국콘트롤데이타, 원풍모방 등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들을 파괴시켰다. 사진은 원풍모방노조 조합원들이 82년 ‘9·27 지부장 테러 사건’에 항의해 공장 현장에서 농성중인 모습으로, 이들은 10월1일 추석날 새벽 사복경찰 수백명에 의해 끌려나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17 비상계엄’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신군부는 노동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해 불과 2~3년 사이에 한국콘트롤데이타, 원풍모방 등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들을 파괴시켰다. 사진은 원풍모방노조 조합원들이 82년 ‘9·27 지부장 테러 사건’에 항의해 공장 현장에서 농성중인 모습으로, 이들은 10월1일 추석날 새벽 사복경찰 수백명에 의해 끌려나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89
1982년 늦가을쯤이었다. 인천 주안5공단 원풍물산을 그만두고 나니 잠시나마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과의 헤어짐도 아쉽고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많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들어간 회사마다 다시 해고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짠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날 총각은 명동에 있는 가톨릭 노동상담소에 갔다가 부천에서 노동사목을 하고 있는 오기백(도널 오키프) 신부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온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로 불그스름한 머리칼에 선한 인상이었다. 이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 끝에 총각은 오 신부가 있는 부천 삼정동 성당에 놀러 가기로 약속을 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섰던 노동조합들에는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73년 12월 결성된 콘트롤데이타노조는 노동조건 개선 외에 남녀 노동자 간의 차별대우에 항의해 남녀평등한 조건을 만들어간 대표적인 노조였다. 그 예로 남녀 동일한 비율의 상여금 지급과 미혼 여성 노동자에 대한 가족수당 지급 그리고 자녀 출산 때 딸·아들 구별 없는 축하금 지급 요구 등 남녀평등한 대우를 실현해 나갔다. 또한 결혼퇴직제 철폐와 함께 여성들의 평생노동권이 정착되도록 혼인 후 직장 계속 다니기 운동도 꾸준히 벌여나가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는 관행을 깨나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80년 5월17일 이후 신군부세력의 ‘사회정화’ 조처는 콘트롤데이타노조에도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82년 3월13일 회사는 단체교섭 중에 이영순 전 지부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 6명을 해고해버렸다. 이에 항의하여 노조는 철야 파업농성에 돌입하는 등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82년 7월 미국 본사는 한국콘트롤데이타의 폐업을 단행했다. 이후 노조는 회사 철수반대 투쟁을 계속하였으나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콘트롤데이타 사건이 발생하자 정권의 하수인이 된 언론들은 노조의 지나친 투쟁 때문에 외국자본이 철수하는 것이라고 악선전을 해대며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이 도산(망함)을 낳는다”고 원풍모방노조를 공격하고 나섰다. 82년 3월15일 원풍노조 지부장에 당선된 정선순은 민주노조 10년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된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싸움을 계속 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원풍모방 노조의 운명을 가르는 ‘9·27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9월27일 오후 1시쯤 남자 조합원들과 담임이 노조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집기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던지면서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정선순 지부장은 사무실에 17시간 동안이나 감금당한 채 폭행을 당하다가 자루에 담겨 화곡동의 어느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600여명의 조합원들은 추석 휴무도 포기한 채 막강 원풍노조의 단결력으로 농성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농성 나흘째인 30일 오후 6시 손에 각목을 든 200여명의 폭력배들이 농성장에 난입하여 단식으로 지칠 대로 지친 조합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며 끌고 나갔다. 농성장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곧 700명으로 불어난 폭력배들은 조합원들을 두들겨 패고 끌고 나가 쓰레기 하치장에 버리기도 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내팽개쳐 버렸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하지 않은 조합원들은 회사로 다시 돌아와 대림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구호를 외쳐댔다. 밤새 노동자들의 비명 소리와 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 군홧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10월1일 새벽 5시 마지막까지 남은 조합원 50명이 찬 이슬에 몸을 웅크리며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운동장에 누워 있었다. 그날은 마침 추석이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추위에 떨고 있는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폭력배들 위에도 환하게 떠 있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끌어내!” 날카로운 명령이 떨어지자 수백명의 폭력배가 농성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합원들은 서로서로 낀 팔짱에 힘을 주고 비명을 지르며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벌써 닷새째 굶고 있던 조합원들은 목이 잠겨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머리가 깨지고 입술이 터지고 옷이 찢긴 채 회사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로써 강철 같은 단결력과 조직력으로 성장한 원풍모방 노조는 청계피복·반도상사·콘트롤데이타 노조의 뒤를 이어 70년대 민주노조의 깃발을 거두게 되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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