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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주교·신부님 도움속에 활기띤 노동사목 / 이총각

등록 2013-09-22 18:46수정 2013-09-22 22:17

1984년 부천노동사목은 도당동에 독립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을 배출했다. 사진은 단독주택이었던 도당동 사무실의 2층 계단 난간에서 이총각(왼쪽 둘째)과 오기백(맨 오른쪽) 신부가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 노동자들과 함께한 모습.
1984년 부천노동사목은 도당동에 독립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을 배출했다. 사진은 단독주택이었던 도당동 사무실의 2층 계단 난간에서 이총각(왼쪽 둘째)과 오기백(맨 오른쪽) 신부가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 노동자들과 함께한 모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91
부천 노동사목은 1984년 말 성골롬반회와 성메리놀회 그리고 인천교구에서 비용을 분담하여 도당동 주택가의 2층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셋방살이로 어려움이 많았다. 노동사목에서는 매주 금요일 노동자들과 함께 저녁 미사를 올렸다. 미사 집전 방식은 본당 미사와 같아서 주일미사를 대신한 셈이었고, 미사 집전은 본당 신부들이 돌아가면서 했다. 한번은 호인수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데 주인이 내려와서 “도대체 뭐하는 거냐”며 난리를 치기도 했다. 결국 그 집에서 쫓겨나 소사에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를 갔지만 형사들의 부추김을 받은 주인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총각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돈 적도 있었다. 형사가 주인집에 부천 노동사목이 빨갱이 집단이고 총각의 얼굴이 누렇게 뜬 것은 빨갱이를 숨겨놓고 끼니때마다 밥을 해 나르느라 그렇게 된 거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총각이 수상한 여자라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그를 피하기도 했다.

총각은 오기백 신부에게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오 신부가 당시 인천 교구장이었던 나길모 주교에게 이 사정을 전했고, 나 주교는 당장 부천 노동사목을 직접 방문해주었다. 주교님이 나타나자 동네가 발칵 뒤집혀 두루마기까지 떨쳐입고 나타난 남자 신도들은 그 겨울에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할 정도였다. 나 주교는 성당에서 강론을 통해 “노동사목이 외국에는 벌써 생겨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늦게 시작되었다. 루시아씨와 오 신부는 교회가 해야 할 하느님 사업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라며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했고 이후 총각이 곤란한 일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아도 될 공간이 생기니 활동가들도, 찾아오는 노동자들도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총각이 동일방직 전 노조 지부장으로 늘 주시의 대상이었던데다 당시는 노동 탄압이 심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 2층집은 늘 주시의 대상이었다. 한번은 한 회원이 총각이 자고 있는 2층 방으로 뛰어올라와 형사가 와서 찾는다고 했다. 총각은 자신도 모르게 라디오와 공책을 숨겼다. 잠시 뒤 형사들이 올라와 뒤지기 시작했고 라디오를 비롯해 <전환시대의 논리>, <페다고지> 등의 책을 찾아내 시비를 걸었다. 형사는 라디오를 왜 숨겼느냐고 다그치며 이북방송 들은 게 아니냐고 협박을 했지만 연행을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크고 작은 방해가 끊임없이 있었던 중에도 노동사목을 통한 노동자들과 유대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금요미사가 끝나면 늘 강론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자가 처한 현실과 가정 상황 등을 얘기하는 나눔 모임을 함께 했다. 이런 시간을 통해 노동자들은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며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연대해서 대처해나갈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자아발견 교육을 마친 노동자들은 2차 교육을 통해 소모임을 조직해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노동법이나 정치사회에 관한 강의도 했는데 방용석·이무술·김문수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노동자들은 훗날 87년 대투쟁 상황에서 노조 결성을 주도하기도 하며 노동운동의 투사가 되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노동사목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신학대생들의 현장체험 활동도 조직했고, 사회참여에 보수적인 신부에게 금요미사 집전을 맡겨 노동 현장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소사성당의 이근창 신부가 대표적이었다. 금요미사를 하러 왔다가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회원인 이순이 세라피나 등 2명이 해고된 사연을 들은 이 신부는 크게 공감하며 며칠 뒤인 노동절에 소사성당에 와서 사례 발표를 해보라고 했다. 뒷날 인천교구 지오세 회장을 했고 지금은 수녀가 된 이순이는 그날 아침미사부터 저녁미사까지 참석해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아주 호소력 있게 감동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이 신부는 보충 강론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편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산업의 역군인 노동자들의 손과 발을 빌려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가 됐다”며 노동 현실에 대한 강론을 했다. 이렇게 투쟁 현장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있던 신부가 변하는 모습은 모두에게 큰 보람이었고 감사할 일이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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