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연행으로 촉발된 구로동맹파업의 열기는 86년 ‘5·3인천항쟁’에서 정점에 이르며 한국 노동운동사의 전기를 이뤘다. 사진은 86년 5월3일 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를 저지하고자 전국에서 모인 노동단체들이 인천시민회관 앞에서 거리시위를 하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93
1985년 6월22일 오전 11시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사무실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앞서 4월 임금인상 투쟁 때 벌인 농성을 빌미로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을 집시법과 노동쟁의조정법 위반으로 연행해 갔다. 이는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전두환의 5공화국은 83년 말부터 이른바 유화정책을 펴고 있었고,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수많은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근로조건 개선 투쟁 등이 활발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구로공단의 노동운동은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남성 노동자들이 방관자적인 위치에 있거나 구사대로 동원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단적으로 여성 노동자 운동이었다고 규정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6월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동맹파업인 구로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이 연대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대우어패럴을 비롯해 84년 구로공단에서 비슷한 시기에 노조를 결성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그리고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꿔낸 부흥사 노조 등이 그동안 일상활동과 교육 등을 공유하면서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위기의식에서 함께 투쟁으로 맞섰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70년대 막강했던 민주노조들이 각개격파당했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업별 노조운동의 시각을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연대성과 투쟁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더불어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삼성제약 등의 노조에서 준법농성으로 함께했던 구로연대투쟁은 29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폭력배 200여명과 경찰들이 진입해 무차별 폭력을 휘두르며 강제해산을 진행하면서 막을 내렸다. 엿새간의 동맹파업은 구속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 그리고 1000여명의 노동자가 해고를 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정치적 노조운동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편으로는 동맹파업을 전후해 노조운동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갈려 있던 노동계의 논쟁도 한층 뜨거워졌다.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과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이 결성되었고 격렬한 사상투쟁은 ‘인천 5·3항쟁’으로 정점에 다다랐다.
86년 5월3일 이총각은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 회원들과 함께 인천 남구 주안동으로 향했다.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를 빌미로 노동자, 학생, 시민, 재야세력 등이 모여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다. 시민회관 앞에는 이미 1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집결해 있었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나부끼며 수많은 유인물이 뿌려지는 가운데 민주헌법 쟁취, 독재 타도,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날 뿌려진 유인물은 모두 50여종으로 신한민주당의 정권야합에 대한 비판과 반미, 반파쇼 내용이 주를 이루며 실로 다양한 정치적 주장이 난무하고 있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73개 중대에서 1만여명의 경찰이 투입되고 ‘지랄탄’이라 불리던 최루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스차에서 뿜어내는 최루탄 때문에 주안동 일대는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온통 뿌연 가루로 뒤덮였다. 총각은 거리투쟁에 나서면서 그때만큼 최루탄을 많이 마셔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3만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가까이에 있는 주안1동성당 지하실에 숨겨두었던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지며 맞서 싸웠다. 그날 시위대는 시민회관 주변을 중심으로 제물포, 석바위 방향까지 장악하며 하루 종일 경찰과 대치하였고,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무리지어 다니던 그들에게 그곳은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총각은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실감하며 하루 종일 가슴 벅차게 뛰어다녔다. 전두환 정권은 5·3항쟁을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탄압의 계기로 활용하며 400여명을 연행해 그 가운데 133명을 소요죄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50여명을 수배하며 정국을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다.
인천 5·3항쟁은 이후 구속된 권인숙에게 가해졌던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의 성고문 사건과 87년 1월 터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마침내 6월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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