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위원장 활동을 마친 이총각은 1989년 2월25일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여성노동자회’ 창립에 참여했다. 사진은 그해 3월5일 열린 3·8 세계여성의날 기념과 인천 여노 창립 보고대회를 겸한 ‘여성노동자 대동제’ 포스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95
이총각은 2년 동안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노협) 위원장으로 일한 뒤 1989년 다시 인천으로 내려왔다. 그 무렵 ‘87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이 수없이 결성되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조직 결성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노협은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지도자로 나서는 와중에 노동운동의 한 부분으로 겸허하게 활동을 해갈 것을 결의하며 89년 1월15일 한국민주노동자연합(한노련)으로 명칭을 바꾸고 원풍모방노조 전 지부장 정선순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노동운동 진영은 모든 역량을 한국노총의 반민주적이고 독점적인 지배체제를 뒤엎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전국조직을 건설하는 데 모았다. 드디어 90년 1월22일 민주노조들의 전국적 결집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결성하고, 의장으로 서노협 단병호(동아건설 창동노조 위원장) 대표를 선출했다. 전노협은 13개 지역, 2개 업종, 600개 노조가 참여하여 모두 26만여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되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3당 야합’(민정당·민주당·공화당)으로 보수세력을 결집한 민자당과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에 대한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후 단 의장을 비롯한 수많은 활동가들이 계속 수배 또는 구속이 됐지만 전노협을 사수하기 위한 총파업을 벌이는 등 투쟁은 가열됐다. 95년 11월11일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출범하여 위원장에 권영길, 수석부위원장에 양규헌, 사무총장에 권용목을 선출하면서 명실공히 1000만 노동자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성장해 나갔다. 한노련은 민주노총이 건설된 뒤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판단해 97년 3월 발전적 해체를 하고 녹색환경운동단체로 거듭났다.
인천으로 돌아온 총각은 89년 2월25일 ‘인천여성노동자회’ 창립에 참여했다. ‘일하는 여성 나눔의집’으로 시작했던 인천여노회는 조화순 목사가 산업선교회를 은퇴할 때, 그동안 동일방직 투쟁 등 활동을 지원했던 미국의 감리교 여성단체가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후원해준 10만달러를 주춧돌 삼아 탄생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도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준비모임을 하며 결성 단계에 있었다. 86년 9월 열린 와이에이치(YH)무역의 김경숙 열사 추모집회가 여성노동자회 창립의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때 추모집회는 최초의 여성 노동자 대중집회이자 노동운동에서 여성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시발점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봉쇄로 집회는 열리지 못했고 참석하기 위해 모인 400여명의 노동자들은 거리투쟁을 벌였다. 이후 한국여성노동자회의 본격적인 창립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모임에는 70년대 민주노조의 주축이었던 콘트롤데이타, 와이에이치무역, 세진전자, 반도상사, 서통, 청계피복, 고미반도체 노조 출신의 현장 활동가들과 한국여성평우회(83년 창립) 출신의 지식인 여성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드디어 87년 3월21일 준비모임은 서울 영등포시장 근처에 마련한 사무실에서 ‘한국여성노동자회’(한국여노) 창립대회를 열고 이영순 콘트롤데이타노조 전 지부장을 대표로 뽑았다.
한국여노는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받는 억압과 가난의 본질을 인식함으로써 올바른 의식을 갖고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는 조직의 목적을 선언했다. 그리고 민주노조의 외곽지원체이자 공개적인 교육선전 활동을 하는 여성노동자운동단체로서 임무를 분명히 밝혔다. 이후 한국여노는 인천 외에 부천, 광주, 마산·창원, 부산, 전북, 안산, 대구, 수원, 경주 등에 지부를 결성했다. 99년에는 전국여성노동조합, 2004년엔 전국가정관리사협회를 결성하고 여성 노동자운동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다.
인천여성노동자회에서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안순애가 총무로 2년간 활동했다. 인천지역 여성노동자운동은 반드시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나서서 해야 한다며 조화순 목사가 간곡히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해고자들은 지역에서 10년 넘게 활동을 해온 덕분에 이제 어딜 가도 지도자 노릇을 요구받고 있었다. 총각 역시 지도위원을 맡아 함께하고 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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