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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청솔의 집’ 22돌…남은 삶도 약자와 함께 / 이총각

등록 2013-09-29 19:36수정 2013-09-29 20:54

이총각은 1991년 11월 인천시 구월4동 저소득 노동자계층 밀집지역에 주민 자활공간인 ‘청솔의 집’을 열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여공’에서 ‘동일방직 노조위원장’으로, 다시 지역활동가로, 그는 늘 약자들과 함께 살아올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92년 11월 청솔의 집 첫돌 잔치 때 모습.
이총각은 1991년 11월 인천시 구월4동 저소득 노동자계층 밀집지역에 주민 자활공간인 ‘청솔의 집’을 열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여공’에서 ‘동일방직 노조위원장’으로, 다시 지역활동가로, 그는 늘 약자들과 함께 살아올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92년 11월 청솔의 집 첫돌 잔치 때 모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96
1989년 초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노협)를 정리하고 인천으로 돌아온 이총각은 노동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기름때를 먹고 살아가던 노동자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에 참여하며 배운 것도 많고 실망한 것도 많았지만 한계도 많이 느꼈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길이 아닌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그렇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동일방직 노조위원장이라는 ‘명함’을 우려먹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총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노동자로 살아가고자,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공장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천 십정동에 있는 100여명 규모의 봉제공장부터 시작해서 다시 현장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몇번은 미행을 당하고 이름이 발각되는 등 여전히 오래 다닐 수가 없었다. ‘동일방직의 이총각’은 여전히 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결국 남의 이름으로 들어간 남동공단의 낚싯대공장을 끝으로 현장의 삶을 정리하기로 했다. 더는 남몰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떳떳하지도 않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에 공간을 만들어 당당하게 주민운동을 하기로 했다. 주민들이 스스로 의식을 깨지 못하면 아무리 반독재 구호를 외쳐도 소용이 없다는 확신에 따른 새로운 실천전략이기도 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연륜도 있으니 지역 주민을 만나며 작은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이 마흔셋이었다.

91년 11월9일 ‘청솔의 집’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당장 사무실 임차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그동안 같이 전셋집에 살던 후배 노동자가 결혼을 하면서 보증금 가운데 일부를 빼주고 남은 목돈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모자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비롯해 재야 선배님들과 많은 지인들이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주어 한달 만에 모두 채워졌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청솔의 집’을 열 수 있었다.

그렇게 인천 모래내시장 근처인 구월4동에 둥지를 튼 청솔의 집은 지역 내에서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며 동네 아이들의 공부방부터 시작했다. 아이들 30명에 자원교사가 30명일 정도로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두고두고 청솔의 집을 키우는 주요 동력이 되었다. 이어 의료상담, 법률상담 등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당연히 살림은 어려워 가을에 김장거리를 내다 팔거나 헌옷 바자회를 열고 백령도에 가서 액젓을 떼다 팔기도 했다. 거기에 후원금을 보태면 겨우겨우 꾸려갈 수 있었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는 환란의 광풍이 불어닥쳐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라는 전국적 민간단체가 출범했을 때 청솔의 집은 ‘실업극복인천남동지원센터’를 열어 지역 실직자를 위한 사업을 수행했다.

2001년에는 보건복지부로부터 인천남동자활후견기관(지금의 지역자활센터)을 위탁받아 지역 저소득계층의 자활·자립을 지원하는 구실을 해왔으며 총각은 인천지역 자활후견기관들의 결집체인 인천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어느덧 22돌을 맞은 청솔의 집은 저소득계층의 어린이부터 실직자, 기초법 수급자 등 늘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면서 주민활동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고, 총각은 어려운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며 그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큰 보람과 함께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삶의 존재감을 느꼈다.

요즘 그는 한국희망재단의 인천지부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해 10월11일에 있을 방글라데시 빈곤아동 교육 지원을 위한 ‘희망음악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총각 자신도 너무 가난하여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 나가야 했던 아픈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키워줄 수 있는 일에 기꺼이 동참했다.

총각은 지금도 가끔 집채만한 기계들 사이를 헤매는 꿈을 꾼다. 노동운동과 지역운동 활동가로 살아온 지난 40여년의 출발은 그곳 동일방직이었다. 그 긴 여정에 정말 수없이 많은 인연들이 있었다. 동일방직 시절부터 지금까지 희생을 감수하며 도와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몇년 전 이소선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계기로 모인 ‘70민주노동자회’에는 그 시절 그 고통을 함께했던 동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소중한 인연들이며 총각에게는 가장 큰 자산들이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어느 사회에서든 가진 자의 권력에 맞서는 일은 가혹하리만큼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으로 시작한 총각의 사회생활은 모진 아픔과 고통도 있었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늘 우리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과 함께했던 그 길에 한없이 감사하다. 그 길에는 노동자·농민·학생·재야인사 등 많은 분들의 동참과 지지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유약한 ‘여공’을 오늘의 활동가로 키워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 암울하고 냉혹했던 시대를 함께 넘어왔듯이 이제 남은 인생도 그분들과 함께할 것이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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