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안녕들 하신지요? 안녕하지 못한 시대에 안녕하시냐 묻는 게 정녕 안녕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설픈 말장난에 안녕~ 하고 독자들이 떠날지 모르니 어서 인사 올리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친절한 기자들’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는 탐사기획팀의 오승훈입니다. 전 올봄부터 가을까지 안녕하지 못한 한국의 반도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지난봄, 대학 후배의 급부름에 마지못한 척(?) 신이 나서(!) 술자리로 향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노동사건 변론을 맡던 변호사 후배가 “형, 하이닉스 노동자들을 만났는데 거긴 삼성전자보다 더 심각하대”라고 말하는 겁니다. 문득 의문이 일었습니다. ‘백혈병 등 반도체 산업 직업병 문제에서 사람들은 삼성만 주목해왔는데 국내 반도체 2위 업체인 하이닉스에도 똑같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일이 되려고 그랬던 걸까요? 사내 인사이동을 통해 전 올 초에 신설된 탐사기획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먼저 반도체 공정에 대한 학습을 하고 학계 전문가들로부터 사전 조언을 구한 뒤 하이닉스의 백혈병 피해 현황에 대한 본격적인 취재에 나섰습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을 통해 소송을 진행 중인 유족 한명과 하이닉스 출신으로 산재 승인을 받은 유족 한명을 접촉하고, 또 다른 피해자들을 다각도로 수소문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백혈병, 림프종 등으로 숨졌거나 투병 중인 하이닉스 출신 노동자들을 몇 사람 추가로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엔 인터뷰를 극구 거부하며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달여에 걸친 끈질긴 설득을 통해 상세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끝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기사화할 수는 없었지만, 이들의 증언은 하이닉스 역시 삼성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취재의 또 다른 트랙은 각종 역학조사 자료와 건강보험 자료를 입수해, 하이닉스와 삼성 노동자들의 발병 및 사망률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자료를 바탕으로 삼성과 하이닉스의 기간별 10만명당 사망·발병률을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95년부터 2013년까지 하이닉스에서 백혈병 등 림프조절기계 암으로 숨진 인원은 최소 17명에 이르렀습니다. ‘하이닉스가 삼성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는 수치였습니다. 하이닉스 노동자들의 반도체 직업병을 최초로 밝힌 심층리포트 ‘또 하나의 비극, 하이닉스’(<한겨레> 7월28일치 1·4·5면, 8월4일치 1·4면, 8월11일치 1·8면 참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기사를 마감하고 못 간 휴가를 가려고 맘먹고 있는데 박용현 전 탐사기획에디터가 말했습니다. “어떡하냐? 너 휴가 못 가겠다. 1세대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뤘으니 이번에는 반도체 노동자 2세들의 문제를 파보자.” “휴가라도 갔다 와서 파보면 안 될까요?” “무덤 파고 싶냐?”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반도체 노동자 아이들 가운데 2세 기형이 많다는 얘기를 취재 중에 듣고 보고를 했는데 그게 씨앗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8월 초부터 취재에 들어갔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반도체 노동자 7가족을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선천성 기형 및 질환을 앓았거나 앓고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와 1부 기사 때와 같이 그들의 피해를 입증해 줄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료를 찾다 우연히 2003년 미국에서 아이비엠(IBM) 반도체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자녀들의 2세 기형에 대해 집단소송을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당 변호사의 전자우편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이틀 만에 상세한 답장과 함께 당시 소송에서 자신이 인과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썼던 미국·프랑스·대만의 연구논문들을 보내주었습니다. 논문들에서 언급한 기형의 유형과 그 원인 물질은 <한겨레>가 만난 피해자들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반도체 노동자 2세 기형의 인과성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에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반도체 2세들의 진료 데이터를 보태 반도체 노동자 2세의 선천기형 및 질환 문제를 처음 제기한 탐사기획 ‘반도체 아이들의 눈물’(<한겨레> 11월13일치 1·4·5면, 11월14일치 1·4·5면 참조)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8개월 삽질의 교훈. 꺼진 말도 다시 듣자.
오승훈 탐사기획팀 기자 vino@hani.co.kr
오승훈 탐사기획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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