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서아무개씨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다는 청소 용역업체의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원서를 냈다. 면접을 보러 간 서씨를, 업체 관계자는 노동조합 사무실로 안내했다. “원청인 세브란스병원이 싫어하는 민주노총이 아니라 이 노조에 가입하라”는 말도 들었다.
노조 사무실에서 서씨를 맞은 위원장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씨 앞에는 가입 날짜도 적히지 않은 노조 가입 신청서가 나타났다. 입사하려면, 서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서명과 함께 합격 통보를 들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공공서비스지부(서경지부)는 6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브란스 병원의 청소 용역업체인 ㅌ업체가 청소노동자 신규 채용단계부터 민주노총 세브란스병원분회가 조합원을 확보할 수 없도록 병원에 우호적인 특정 노조 가입을 강요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이들은 “녹취록 등의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고용노동부는 ㅌ업체를 불기소 처분하고 지방노동위원회는 노동자의 구제신청을 기각하는 등 소극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서경지부는 ㅌ업체가 특정 노조 가입을 강요하면서 사실상 이를 채용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보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온 서씨는 “ㅌ업체 쪽 면접보다 노조 설명 과정이 더 길었다”면서 “노조 위원장은 마치 노조 가입이 끝나야 채용을 결정하는 것처럼 언질을 줬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최다혜 서경지부 조직부장은 “기존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합격시키고 노조 가입을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불합격 통보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2016년 9월부터 ㅌ업체의 신규 입사자 가운데 민주노총 가입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가 제공한 조합원과 신규입사자와의 대화 녹취록을 보면 “회사쪽 감독자와 기존 노조 위원장이 ‘민주노총은 취직이 안되고 기존 노조에 가입하라’고 했다”는 증언도 있다.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에 대한 탄압이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증언도 했다. 조종수 서경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장은 “하위 관리자를 통해 ‘민주노총 탈퇴하면 각종 수당을 인상해주겠다’고 회유하고, 민주노총 조합원을 감염박스 처리·물청소 등 힘들고 어려운 업무에 배치하고 있다. 회유와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거나 민주노총을 탈퇴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하위 관리자가 민주노총 조합원하고는 밥도 먹지 말라한다”는 등 일상적 괴롭힘에 시달리는 현장 노동자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러한 ㅌ업체의 행태는 사용자가 복수노조 제도를 악용해 노동자가 스스로 노조를 탐색하고 선택할 ‘단결권’을 침해하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용원 민주노총 공공운수법률원 노무사는 “노동자가 가장 약자의 위치에 서는 신규 채용과정에서 특정 노조에 가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용자에 의한 신종 갑질이며 부당노동행위의 가장 심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이에 서경지부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재심을 진행하고 있고, 지난해 10∼11월 서울서부지청에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ㅌ업체 쪽을 고소한 상태다.
서경지부의 주장에 대해 ㅌ업체 쪽에서는 ‘회사 차원의 개입은 없었다’는 태도다. ㅌ업체 관계자는 "민주노총이 노조비 갈등과 투쟁에 대한 피로도 때문에 기존 노조에 조합원을 빼앗겼을 뿐이다. 녹취록에 보면 기존 노조 위원장의 말실수나 오해할 만한 소지가 일부 발견되지만 회사가 개입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ㅌ업체만이 아니라 원청인 세브란스병원 역시 정당한 노조 활동을 막는 부당노동행위와 관련해 그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2016년 6월부터 시작된 서경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 출범 과정에서 세브란스병원은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총을 탈퇴할 것을 협박·회유하거나 병원 보안요원이 민주노총 활동가와 조합원을 미행·감시하는 등 부당노동행위 논란이 있었다. 세브란스병원과 ㅌ업체는 병원에서 팻말시위를 하거나 병원장 면담을 요청하는 조합원과 노조 활동가 10여명에게 9건의 무차별 고소·고발과 가처분 소송을 내기도 했다. 세브란스병원 홍보팀 관계자는 “이 문제는 ㅌ업체 내부의 노-노 문제로 보고있다. 병원이 직접 개입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세브란스병원에는 활동이 미미하던 기존 노조와 새로 생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경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 두 개의 노조가 있다. 서경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는 청소노동자 130여명이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에 힘 쓰지 않는 기존 노조에 회의를 느끼고 나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 가입하면서 2016년 7월 출범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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