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해외진출한국기업의 인권 및 노동권 책임 촉구 기자회견’에서 모니나 웡 국제노총 노동기본권 담당관이 발언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남방정책’을 통해 아세안 국가와 돈독한 무역투자 관계를 만들겠다”고 밝힌 가운데 한국 기업들의 아세안 현지 노동자 인권 침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29일 양대노총과 국제노총·에버트재단 한국사무소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정권은 신남방정책에서 인권 의제를 함께 고려해야 하며, 아세안 국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인권과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법과 정책을 마련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발표된 내용을 보면,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다수의 아세안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 임금 체불, 부당 해고 등에 시달리지만, 사쪽의 과도한 부당노동행위로 노동조합 조직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모니나 웡 국제노총 노동기본권 담당관은 “한국 기업은 아세안 국가에서 안전보건 규정을 무시하고 불법파견·기간제 등 불안정 일자리를 양산하면서 노동자가 노조 결성을 시도하거나 단체행동에 나서면 해고와 각종 형사 고소로 위협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말을 들어보면 한국 기업은 노조 결성 움직임이 보이면 아예 “싹을 자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프렛 소 우옷 캄보디아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한국 의류 기업 ‘가원어페럴’은 올해 초 두달에 거쳐 임금을 체불하고 노동조합비로 공제한 돈을 노조에 전달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자 588명 전원을 해고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미얀마에 공장을 둔 한국의 한 양말 업체는 노동자가 노동권 보장을 주장하며 교섭을 요구하자 76명을 해고하기도 했다.
한국 기업 중에서도 특히 삼성전자는 ‘무노조 경영’을 아세안 국가에서까지 고수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프리하나니 보에나디 인도네시아노총 국제국장은 “2012년 삼성전자는 인도네시아 티브이공장에서 노조를 조직하려던 노동자 13명을 한번에 해고하고 이들의 집까지 찾아가 협박했다. 이후 삼성 하청업체에 노조 조직을 시도하자 한국의 삼성 본사에서 인도네시아의 모든 삼성 하청업체에 ‘노조를 만들면 계약을 해지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권 침해 사례는 아세안 국가에 대한 한국의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늘어나는 모양새다. 베트남 비영리단체 ‘발전과 통합 센터’의 김티투하 노동권 팀장은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 중 한국 기업은 5년째 파업 발생 건수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기업들이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노동기본권이 마땅히 보장되지 않은 아세안 국가의 현실을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카잉 자르 아웅 미얀마제조노련 사무부총장은 “미얀마 노동청과 중재위원회가 부당해고 판단을 내리고 해당 사업주에게 복직결정을 내려도 소용이 없다. 사업주는 700달러 수준의 벌금만 내면 손을 털 수 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아세안 국가들이 한국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터라, 한국 기업이 불법 행위를 저질러도 법적 제재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세안 노동 활동가들의 분석이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아세안 노동자가 의지할 유일한 기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내연락사무소(NCP)뿐이다. 국내연락사무소는 다국적기업의 인권 침해를 예방하기 위해 1976년 오이시디가 제정한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 따라 각 나라에 설치된 기관으로, 이의신청 중재·조정, 권고 등을 통해 다국적기업과의 분쟁을 해결한다. 그러나 한국 국내연락사무소가 2000년 설치된 이래 정식 회부된 사건은 31건뿐이고 이 가운데 해결된 사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조안나 코로나시온 센트로 조직활동가는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한국 국내연락사무소의 위원 구성에 노조나 시민단체 관계자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기업을 한국 법으로 제재할 수는 없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신영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유엔이 이미 권고한 것처럼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가행동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또 환경파괴나 인권침해에 연루된 기업에는 국민연금, 융자, 보조금 등 각종 지원을 제한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사진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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