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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대기업 노동자의 고백, 우리는 길을 잃었다

등록 2018-04-13 18:07수정 2018-04-13 18:11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한국지엠 노동자 이범연
“대기업 노조가 스스로 쇄신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새로운 노동운동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주체가 나와야죠.” 이범연은 1989년 대우자동차 도장반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30년간 공장 노동자로 살아왔다. ‘정년을 몇 년 앞둔 늙은 노동자’인 그는 지난해 말 펴낸 책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에서 대기업 노조와 오늘날의 노동운동, 그리고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냉정하게 돌아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대기업 노조가 스스로 쇄신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새로운 노동운동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주체가 나와야죠.” 이범연은 1989년 대우자동차 도장반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30년간 공장 노동자로 살아왔다. ‘정년을 몇 년 앞둔 늙은 노동자’인 그는 지난해 말 펴낸 책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에서 대기업 노조와 오늘날의 노동운동, 그리고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냉정하게 돌아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대 학생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 생산직으로 들어갔다. 신참 노동자로 기름때를 묻히고 사는 그를 볼 때마다 그의 학교 선후배들은 미안한 표정으로 밥도 사고 돈도 쥐여주며 말했다.

“고생 많지?”

몇 년이 지나 위장 취업자들이 썰물처럼 공장을 빠져나갈 때, 그의 지인들은 말했다.

“너, 아직도 그러고 사니?”

그는 계속 ‘그러고’ 살았고, 그 때문에 공장에서 두 번 해고당하고 두 번 구속되고 두 번 복직이 되었다. 자동차공장 40대 노동자로 사는 그에게 다시 그들은 말했다.

“이제 살 만하지?”

어느덧 50대 중반, 대기업 임원을 하거나 자영업을 하다가 일선에서 물러난 지인들은 이제 그를 만나면 이렇게 말한다.

“넌 좋겠다. 연봉도 높고 정년도 있고….”

이범연(56)의 책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이하 <어언 30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범연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81년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학교 캠퍼스에 전투경찰이 상주하고, 걸핏하면 영장도 없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나 안기부, 보안사에 납치되어 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졸업을 1년여 앞두고 학교를 그만뒀다. 학사모 대신 푸른 작업복을 택한 그는 89년 대우자동차 도장반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30년간 공장 노동자로 살아왔다. 그가 명문대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현장에 ‘투신’한 무용담을 늘어놓기 위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어언 30년>은, ‘정년을 몇 년 앞둔 늙은 노동자’ 이범연이 대기업 노조와 오늘날의 노동운동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냉정하게 돌아본, 뼈아픈 성찰의 기록이다.

“1995년 11월11일 노동자들의 희망을 안고 출범했던 민주노총이 22년이 지난 지금 가난한 다수의 노동자들을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길을 잃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이범연, <어언 30년> 31쪽)

지난 30년간 노동자 수는 1000만에서 1900만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지만,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 수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전체의 10%에 불과한 190만 조직 노동자들이 나머지 90%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을까? 지난 세월 노동자 투쟁의 핵심이 되어왔던 대기업 정규직 노조원들은 왜 무기력한 기득권층으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평범한 노동자들이 인간대접 받는 세상을 만들자던 30년 전 다짐은 모두 부질없는 꿈이었을까? ‘늙은 노동자’ 이범연은 솔직하고 냉정한 자기비판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 싶은 걸까?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이범연을 만났다. 그는 한국지엠(GM) 부평공장 노동자다.

“군산공장이 폐쇄되면 지역의 자영업자들, 시민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옵니다. 어떻게든 폐쇄 방침을 철회하고 재가동을 하거나 매각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30년간 공장 노동자로 일해온 이범연은 지엠의 군산공장 폐쇄 방침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군산공장이 폐쇄되면 지역의 자영업자들, 시민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옵니다. 어떻게든 폐쇄 방침을 철회하고 재가동을 하거나 매각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30년간 공장 노동자로 일해온 이범연은 지엠의 군산공장 폐쇄 방침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산동네서 장남으로 출생
1981년 서울대 입학 ‘운동권’
학교 그만두고 대우차 취업
해고·구속·복직 등 거쳐
30년 동안 ‘공장 노동자’ 삶

군산공장 폐쇄 결정한 지엠
외국인 투자기업 지정 등 요구
“노조 빨리 정리하고 정부 협상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것 같아
공장 존폐는 지역민 전체 문제
폐쇄 아닌 재가동 방법 찾아야”

한국지엠 2500여명 희망퇴직
2명은 잇따라 스스로 삶 마감
일각선 ‘돈 받았는데 왜 죽나?’
“20여년 회사만 알고 산 사람
지옥에 던져진 느낌이었을 것”

힘·규율 관성적인 사고만 있는
대기업 노조 ‘셀프 쇄신’ 어려워
새 노동운동 흐름·주체 나와야
‘지역 기반’ 다양한 노동자 모여
솔직히 소통하고 힘 합쳐야 한다

지엠, ‘먹튀’가 아니라는 걸 입증해라

―멀리까지 오시게 했네요.

“이번주는 주간 근무조예요. 아침 7시에 시작해 오후 3시40분에 작업이 끝납니다.”

―지엠 군산공장 폐쇄 방침 발표 이후 노사가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경영진은 4월20일까지 노사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도 신청을 내겠다고 하고, 노조는 사측이 성실하게 교섭에 응하지 않는다고 노동쟁의 소송서를 낸 상태인데, 지금 노사 간 최대 현안이 뭡니까?

“겉으로 드러난 쟁점이 있고 숨은 쟁점이 있을 텐데, 노동조합은 한국지엠이 잘못된 경영 행태를 개선하고 장기적인 미래발전 전망을 보여줄 것을 전제로, 임금과 성과급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측은 빨리 합의 안 하면 부도내겠다고 협박을 하니까 노조가 격앙된 거죠.”

―상식적으로, 경영진이 먼저 자구 대책을 보여 달라는 건 노조로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요?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 임금 삭감을 감수하겠다고 할 순 없잖아요.

“지금 지엠과 노동자와 정부, 3자가 다 ‘전제조건’을 걸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어요. 지엠은 ‘정부가 지원하고 노동자가 양보하면 자기들(지엠 본사)도 한국지엠에 준 채권을 출자전환하고 신차를 내놓겠다’는 거고, 정부는 ‘지엠이 신차 계획을 내놓고 실사 결과에 따라서 경영 상태를 개선하면 지원하겠다’는 거고요. 노동조합은 ‘지엠이 장기적으로 고용과 미래에 대해서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으면 우리도 양보하겠다’는 거죠. 3자가 각자의 패를 갖고 있는데, 지엠으로서는 이런 게임이 싫은 것 같아요. 노동조합을 빨리 정리하고, 정부랑 협상해서 자기들한테 유리하게 가속도를 붙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지금 지엠이 우리 정부에 요구하는 게 뭔데요?

“두 가지인데, 산업은행 지분이 17% 정도 되는데 그 지분만큼, 그러니까 한 5천억 되죠. 그걸 출자전환하라는 거고, 또 하나는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선정해서 각종 세금 혜택을 받게 해달라는 거죠.”

―그동안 외국인 투자기업이 아니었어요?

“자격 요건이 안 돼요. 외국인 투자기업은 신규 투자일 경우에만 해당돼요.”

―아, 근데 이 경우엔 신규 투자가 아니라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거니까….

“네. 자격 조건이 안 되는데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2002년 대우자동차 인수할 때 이미 법인세 면제받고 여러 가지 혜택을 다 받아갔어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이미 군산공장 폐쇄 방침이 발표되었는데 부도와 줄도산, 정리해고로 이어지는 건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잖아요. 정부가 지엠 요구대로 지원을 해줘야 하나요?

“솔직히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이 유지되는 게 좋죠. 문제는, 정부가 지원을 한다 해도 그 혜택이 진짜로 한국지엠을 유지 발전시키는 데 쓰일 것이냐, 아니면 그들의 철수 비용을 절약시켜 주는 데 쓰일 것이냐 하는 점이죠. 철수 비용으로 돈을 댈 순 없잖아요.”

―‘먹튀’ 하면 어쩌냐, 지원만 받고 철수를 해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거군요.

“제가 볼 때, 지엠도 당장 철수를 할 순 없을 거예요. 그간 지엠(본사)이 한국지엠에 의존해온 게 많거든요. 연구소나 디자인센터나…. 지금 철수하면 지엠으로서도 엄청난 타격이죠. 근데 차근차근 챙겨서 단계적으로 철수를 할 가능성은 있어요. 지금 생산하는 차를 다 팔아먹고 4~5년 동안 단계적으로 정리해서…. 장기적인 유지냐 단계적 철수냐 중에서 어느 쪽인지 우린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일부 언론에선 노조가 ‘제 밥그릇 챙기기’를 위해서 위기를 자초한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어요. 그 탓인지, 한국지엠 노조에 대한 여론이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군산공장 문제는 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600명 노동자는 전환 배치로 다른 데 갈 수도 있어요. 근데 군산공장이 폐쇄되면 지역의 자영업자들, 시민들에게 엄청난 타격이 옵니다. 어떻게든 폐쇄 방침을 철회하고 재가동을 하거나 매각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이건 지역민 전체의 문제입니다.”

두 희망퇴직자의 죽음

―그사이 군산공장을 비롯해서 한국지엠 4군데 공장에서 2500명 이상이 희망퇴직으로 감원되었습니다. 원치 않는 희망퇴직도 있습니까?

“희망퇴직을 하면 55세 이상은 3년치, 그 아래로는 2년치 임금을 주는데 사실 저처럼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은 경우에는 고려해볼 수도 있지요. 근데 젊은 사람들은 그거 2년치 받고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요? 특히 군산공장엔 젊은층이 많거든요. 3월2일이 희망퇴직 신청 마감일이었는데 3월1일 이전까지 신청자가 1천명을 밑돌았대요. 원래 목표가 2천명인데. 근데 3월1일부터 대대적으로 언론에 ‘희망퇴직 안 하면 정리해고한다’고 기사가 뜬 거예요. 회사에서 (언론플레이) ‘작업’을 한 거라고 전 확신하는데, 아무튼 정리해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하루 사이에 희망퇴직 신청자가 대폭 늘어난 거죠. 원래 목표치를 넘겨서 2600명 가까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퇴직을 ‘희망’하지 않으면 무참히 잘릴지도 모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수천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생업을 잃었다. 그 와중에 두 명의 희망퇴직자가 세상을 떴다. 지난 7일엔 부평공장 이아무개(55)씨가 인천의 한 공원에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다. 그의 휴대전화엔 이날 오후 ‘희망퇴직 대상자로 승인되었다’는 문자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이어서 24일엔 군산공장 노동자 고아무개(47)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도 3월2일 희망퇴직을 신청한 사람 중 하나였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만, 일각에선 “돈 많이 주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돈 많이 받고 나왔는데 왜 죽냐?”는 소리도 나옵니다.

“그런 댓글들이 달린 거 봤습니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는데 돈까지 받고 나와서 왜 죽냐?’고. 근데 군산공장에서 죽은 친구 나이를 보세요. 마흔일곱입니다. 97년에 군대 제대하고 바로 입사해서 21년을 거기 조립라인에서 일했어요. 원래대로라면 십몇년을 더 다녔을 텐데, 2년치 임금 받아 나와서 뭘 할 수 있을까요? 자영업? 군산이 유령도시 돼서 자영업자들 다 망하는 판에? 20년 넘게 회사만 알고 살아온 사람에겐 지옥에 던져진 느낌이었을 거예요. 단절감과 두려움이 크지 않았을까.”

―회사만 알고 살아온 사람에겐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을 수 있단 말씀이군요.

“제가 책에서 ‘회사인간’이란 말을 썼는데요. 일상적 삶의 의미를 회사에서만 찾는 거죠. 회사에서의 일, 동료들과의 관계, 회사를 떠나서 다른 삶을 영위하는 것에 대한 그림이 아예 없는 거죠. 정년퇴직하고 나간 분들도 2~3년 만에 확 늙어버려요. 머리 하얘지고 갑자기 노인이 되더라고요. 인간관계도 끊어지고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뭘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도 잃어버리고. 댓글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돈으로만 계산하고 얘기하시는데, 회사를 나가는 사람들은 돈보다 훨씬 소중한 걸 잃어버린 거예요.”

강제잔업과 특근이 줄고 임금이 올라도 대다수 한국 사회 남성 노동자들은 잔업과 특근을 선호한다. 한국지엠에선 주야 맞교대로 12시간씩 일하던 걸 2012~13년 주야연속근무제로 바꿔냈다. 주간반이 되면 아침 7시에 시작된 일이 오후 3시 반께 끝나지만 대개는 여전히 퇴근 뒤 남는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쓸 줄 모른다. “낮에 4시면 집에 가는데 할 일도 없고 시간낭비 아닌가요?” 하는 이도 있고 “주말에 집에 있으면 뭐 해? 마누라도 싫어하고 아이들도 불편해하는데” 하며 꾸역꾸역 주말 휴일 근무를 자청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노동자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원했지만 정작 그것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써야 할지 배우지 못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만 있을 뿐, 자기 자신은 텅 비어버린 ‘회사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장기적으로 삶의 질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가치가 내면화되고, 돈은 많이 받지만 장시간 노동 등 삶의 짊을 개선하는 일은 여전히 안 되고 있다. 우리의 몸과 삶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돈과의 교환에서 그 고통이 ‘자발적인 선택’인 것으로 은폐되고 있을 뿐이다.”(<어언 30년> 91쪽)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이범연 한국지엠 노동자와 이진순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이범연 한국지엠 노동자와 이진순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이범연의 책 제목에 ‘어언 30년’이 들어간 이유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아는 이들은 이 한 구절로 많은 걸 떠올리지만, 이제 ‘어언 30년~’이 들어간 노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민기가 작곡하고 양희은이 노래한 이 노래의 원제는 ‘늙은 군인의 노래’이다. ‘군인’ 대신 ‘투사’나 ‘노동자’를 넣은 개사곡이 널리 불린 시절이 있었다. 그조차도 30년 전 일이지만.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 되어/ 꽃 피고 눈 내리니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30년 전 이 노래를 처음 접할 땐 이범연도 ‘어언 30년’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20대 청년이었다. 서울 흑석동 산동네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총명한 아들이 법관이 되길 아버지는 바라셨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던 아이는 사범대에 진학했지만 서울대 졸업장만 있으면 어디든 원하는 곳에 취업하는 게 어렵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범연은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었다. 그는 입학과 동시에 ‘운동권’이 되었다.

―어쩌다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어요?

“글쎄요.(한참 생각)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별로 기억이 안 나요. 학교에서 시위하면 쫓아다니고, 그 당시 공부에만 전념하고 뭐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웃음) 특별히 무슨 결단을 내리거나 한 기억은 없어요.”

2학년이 끝날 무렵 학내 동아리 선배들이 줄줄이 공안기관에 잡혀가면서 그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몇해 뒤 박종철이 숨졌던 바로 그곳이었다. 열흘간 조사를 받고는 강제징집이 되어 인제 원통의 전방 사단에 배치되었다.

―강제징집으로 가면 군대에서도 고생을 많이 한다던데요.

“저는 뭐… 괜찮았어요. 한 달에 한 번 보안사에서 신상체크 하러 왔어요. ‘녹화사업’이라고 해가지고.”

―녹화사업? 전두환 정부가 강제징집된 대학생을 학생운동 프락치로 이용하려고 회유, 강제한 사업을 말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의문사하거나 자살한 이들도 있었죠.

“네. 보안사가 과천에 아파트 몇 채를 빌려서 정신교육을 시켰어요. 친구들 만나서 정보 캐와라 그러는데, 난 그냥 거짓말하면 되고 (웃음) 군대 안에선 그 덕에 무차별 구타에서 열외가 되기도 했죠. 내가 맞은 걸 보안사에 찌를까봐.(웃음) 오히려 군대 생활 편하게 한 셈이에요.”

―요주의 인물이 돼서 강제징집까지 다녀왔는데 무슨 생각으로 학교 관두고 공장엘 간 거예요?

“뭐, 그때야 다 같은 생각들 아니었나요? 노동자들이 조직되어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운동을 한다면 공장에 가는 게 당연시되던 때니까. 소극적인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았지만.”

이범연은 자신이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위장 취업자로 공장에 가게 된 과정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 극구 꺼리는 듯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시대상황에 따른 결정이었을 뿐, 자기희생적인 ‘결단’이나 남다른 ‘의지’가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처음엔 노동자 야학을 하다가 안양, 독산동 지역의 영세업체에서 공장 일을 하기 시작했고 영등포에서 밀링 기술을 배우다가 대규모 인력채용이 벌어지던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을 거쳐 1989년 도장반 노동자로 입사했다. 처음 그가 입사할 때 대우자동차의 노동자 임금은 독산동 영세업체만도 못했다. 90년대 초반 이후 대기업 남성사업장에 속속 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이범연은 노조 활동을 하다가 92년 위장 취업자라는 이유로 한 번, 2000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투쟁 과정에서 또 한 번 해고되고 구속되었다가 복직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동료들이 있는데 어딜 떠나요?

―92년에 해고되고 5년 만인 97년 복직이 되었는데, 원래 있던 공장으로 간 게 아니라 사무직으로 발령을 받으셨죠? 사무직으로 2년 있다가 99년 공장으로 돌아왔고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해고자들을 복직시킬 땐 다 그렇게 2년을 사무직으로 돌렸습니다. 일도 안 시키면서…. 최대한 격리하고 현장 합류를 늦추겠다는 거죠.”

―아, 서울대 출신이라서 회유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요?

“그런 제안도 있었죠. 사무직으로 복직해라. 그래서 그걸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요. 지금 국회의원 하는 한 선배는 그렇게 해서 영국으로 해외발령을 받았고, 20대 총선에 출마한 또 한 선배도 독일에서 근무했어요.”

―근데 왜 거절하셨어요?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겼잖아요.

“대단하게 강인한 의지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녜요. 같이 일하고 활동하는 동료들이 생겼잖아요. 그걸 끊고 다른 길을 가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그렇게 사는 게 이미 내 삶이 되고 활동방식이 된 거니까.”

―주변이 어떻든 자기 원칙에 충실하셨군요.

“뭘요, 끊임없이 흔들렸어요.(웃음) 주변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갈 땐 회의가 들고 흔들리다가, 동료들을 만나서 다시 마음을 다지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었던 것 같아요.”

떠나간 것은 대학생 출신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이웃에 있던 공장들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이 사라졌다. 대우자동차 서문 건너 있던 동양철관도, 남문 건너에 있던 전남방직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임금 인상철이 되면 서로 응원하며 함성을 질러주던 노동자들이 해외이전과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지고, 지불능력이 있는 소수 대기업만 ‘섬처럼’ 살아남았다. 주변 공장들이 사라진 건 노동자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대기업 노동자들은 기업의 담장을 넘어 더 큰 사회적 요구로 전체 노동자를 대변해 싸우지 못했다.

“교육, 의료, 주거. 이 세 가지가 이 땅의 노동자들의 중요한 요구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공임대주택 건설 확대 등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요구들이다.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중 많은 것을 기업복지로, 단체협약으로 해결한다. … 나는 그동안 대공장 노동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활동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꿈과 요구가 기업 안에 갇히면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할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시야와 전망도 닫혔다.”(<어언 30년> 57~58쪽)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가 되지 못한 죄

―대기업 정규직, 남성사업자 중심의 노조 활동은 오늘날 ‘귀족노조’ ‘기득권층’ 노동자라는 비난을 받고 있어요. 한국지엠 노조지부에서도 채용비리로 전직 지부장이나 상집 간부들, 대의원들까지 줄줄이 구속되지 않았나요?

“사실이에요. 사회적으로 창피한 일이지만 노조가 소비자몰을 운영하다가 말썽이 생겨서 회사에 넘긴 경우도 있고요. 노조가 추진해서 신용협동조합을 하다가 대형사고가 터진 적도 있어요. 노조가 권력화되고 위계화되면서 생긴 문제예요. 힘과 규율에 대한 관성적인 사고만 있고 대중적인 자발성에 근거한 다양한 토론이나 논쟁의 공간이 없어요.”

―이걸 어떻게 쇄신할 수 있을까요?

“대기업 노조가 스스로 쇄신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새로운 노동운동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주체가 나와야죠.”

―새로운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데요? 이미 노동자들은 정규직, 하청 노동자, 하청의 하청 노동자로 위계화되어 있어요.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을 보면서 “어떻게든 내 자리를 지켜야지” 하면서 보수화되고, 비정규직들은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자”고 각자도생하기 바쁜데요.

“지금까진 ‘성 안의 노동자, 성 밖의 노동자’가 있었던 거죠. 박근혜 정권의 해법은 성을 부숴서 똑같이 성 밖의 노동자, 부랑자의 상태로 만드는 걸 목표로 했고요. 반대로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를 성 안으로 집어넣자는 거잖아요. 제가 딱히 정책적 대안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성 밖에 있는 노동자 당사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적 무기를 가지는 게 절실하다고 봐요. 최저임금 인상이나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사회구조가 보편적 흐름이 되기 위해선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가 만들어지는 게 필요하죠.”

―책에서 ‘배제된 노동자’란 용어를 쓰셨죠.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여성, 청년, 중소기업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 그간 노동정책에서 배제되어온 노동자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그걸 실행할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까?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에 한국지엠의 비정규직, 사무직, 생산직 몇몇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함께 살자 공동행동’이라고, 무슨 특별한 조직이나 직책도 없고 위계도 없이 아무나 들어와서 얘기할 수 있는 온라인 토론방 하나 만들고 정기적으로 토론회를 하는 작은 모임인데. 토론의 원칙은 딱 두 가지예요. ‘솔직해지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런 말은 하지 말자.’ 토론 결과를 속기해서 다 뿌려요. 대자보로도 붙이고.”

―굉장히 새로운 시도인데요.

“지역을 기반으로 다양한 노동자들이 모여서 열린 모임을 하고 항시적인 토론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과거 우린 대의와 조직을 앞세우면서 개인이 죽어나가는 방식이었지만 이젠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서 뜻이 있는 사람끼리 소통하고 힘을 합치는 게 중요한 시대라고 봅니다.”

이범연은 과거의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과거의 열정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데 그의 남은 시간을 쓸 생각이 없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 관성을 박차고 “시대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은 힘”이다. 30년 전의 초심이 아니라 2018년발 초심.

“‘처음처럼’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87년 투쟁 정신의 쇠퇴가 지금의 위기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87년 투쟁 정신은 충분히 발현되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87년 투쟁 이후 30년 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관성이다.”(<어언 30년> 254쪽)

녹취 이수현

이범연을 만든 시간들

6살 무렵 가족 사진. 가난했지만 부모님 보살핌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자랐다. 앞줄 가운데 남자아이가 나.
6살 무렵 가족 사진. 가난했지만 부모님 보살핌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자랐다. 앞줄 가운데 남자아이가 나.

1990년 아내와 연애 시절. 대우자동차 입사 뒤 인천 지역 해고노동자였던 아내를 만났다. 퍽퍽한 공장생활 중 아내와 연애하던 순간은 손꼽아 기다리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1990년 아내와 연애 시절. 대우자동차 입사 뒤 인천 지역 해고노동자였던 아내를 만났다. 퍽퍽한 공장생활 중 아내와 연애하던 순간은 손꼽아 기다리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1991년 노태우 정권의 노동조합 탄압 항의 집회. 당시 나(앞줄 오른쪽 넷째)는 20대 후반이었고, 노조도 젊고 역동적이었다. 그 젊은이들이 지금 늙은 노동자가 돼 서로 정년 이후의 삶을 묻는다.
1991년 노태우 정권의 노동조합 탄압 항의 집회. 당시 나(앞줄 오른쪽 넷째)는 20대 후반이었고, 노조도 젊고 역동적이었다. 그 젊은이들이 지금 늙은 노동자가 돼 서로 정년 이후의 삶을 묻는다.

1993년 딸 분유 먹이던 날. 1992년 첫딸이 태어날 당시 나는 막 구속돼 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구치소 면회실에서만 바라보던 딸을 직접 안고 분유를 먹였다. 그 순간이 너무 경이롭고 행복했다.
1993년 딸 분유 먹이던 날. 1992년 첫딸이 태어날 당시 나는 막 구속돼 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구치소 면회실에서만 바라보던 딸을 직접 안고 분유를 먹였다. 그 순간이 너무 경이롭고 행복했다.

2001년 2월19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그해 2월16일 대우차가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보하면서 노동조합과 정리해고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사흘 뒤 대규모 공권력이 농성을 진압하기 위해 공장으로 들이닥쳤다. 정리해고는 노사관계와 사람들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2001년 2월19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그해 2월16일 대우차가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보하면서 노동조합과 정리해고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사흘 뒤 대규모 공권력이 농성을 진압하기 위해 공장으로 들이닥쳤다. 정리해고는 노사관계와 사람들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2018년 3월 한국지엠 노동자 토론회. 위기상황이 계속되고 있지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딱히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일단 정규직·비정규직 등 여러 구성원이 함께 모여 열린 마음으로 토론해야 한다.
2018년 3월 한국지엠 노동자 토론회. 위기상황이 계속되고 있지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딱히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일단 정규직·비정규직 등 여러 구성원이 함께 모여 열린 마음으로 토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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