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공공운수 의료연대본부 새서울병원 분회장이 지난 2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근지법 개악 중단 및 노동시간 특례폐기 촉구 과로사 아웃(OUT) 대책위 기자회견에서 간호사들의 참담한 근무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 분회장은 과도한 근무시간으로 자신의 건강조차 돌볼 수 없는 간호사들이 어떻게 환자들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지 되물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탄력근로제 확대를 추진하면서 경영계와 보수언론은 2015년 노동계가 이미 탄력근로제 확대에 합의했다고 하지만, 아전인수격 해석이란 반론이 나온다. 당시 노사정 합의의 전제는 ‘2020년까지 연간 노동시간을 1800시간으로 단축한다’는 큰 틀을 전제로 한 것인데,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서다.
14일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실장은 “당시 노동시간 합의의 핵심은 실노동 시간 단축이고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는 장기적으로 보고 시행하기로 했다. 탄력근로제 확대는 장시간 노동 관행이 사라졌을 때에나 추진 가능하다”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선행 조건이 이행되지 않은 채 앞뒤를 바꿔 탄력근로제 확대만 압박한단 것이다. 노사정위원회는 2010년 9월 “2020년까지 전산업 노동자의 연평균 노동시간을 1800시간대로 단축”하기로 합의했다. 2015년 9월 이를 재확인하는 노사정 합의에서 탄력근로제 확대가 언급됐지만, 당시 합의문을 보면 탄력근로제 확대는 노동시간 단축이 안정화된 뒤 시행하기로 했다.
독일·프랑스 등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1년까지 허용한다는 경영계 논거도 사실 반쪽짜리다. 연 평균 노동시간이 오이시디(OECD) 평균을 훨씬 밑돌고 하루 노동시간 상한 제도를 두는 등 여러 면에서 한국과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이시디(OECD) 기준으로 독일 노동자 연 평균 노동시간은 1300시간 내외, 프랑스의 경우 1420시간대다.
2020년이 2년 앞으로 다가왔지만 한국의 ‘노동시간 1800시간대 단축’은 여전히 요원하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노동자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4년 2284시간, 2015년 2273시간, 2016년 2241시간, 지난해 2174시간이다. 장기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지만 그 속도는 매우 더디다. 노사정 합의대로 2020년까지 1800시간으로 단축하려면 앞으로 374시간을 더 줄여야한다. 1년에 124시간씩 줄여야 하는 셈이다.
노동시간 단축에 역행하는 여러 조처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과거 고용노동부의 행정지침이 그렇다. 과거 주 44시간제를 시행할 당시 한 주에 가능한 최대 노동시간은 64시간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기본 44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더하고, 여기에 행정지침에 따른 휴일근로 8시간을 별도로 합쳐야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2004년 주 5일제 시행으로 휴일이 이틀로 늘어나면서 발생했다. 법정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으로 줄었지만 주 최대 노동시간은 68시간으로 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기본 40시간, 연장근로 12시간, 이틀분의 휴일근로 16시간을 합친 결과였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해석”이라는 비판이 거셌지만, 이 지침은 지난 2월 국회가 근로기준법을 개정할 때까지 유지됐다.
박근혜 정부 시절 고용부는 연장노동을 부추기는 행정지침을 내기도 했다. 2014년 고용부는 대법원 판결보다 통상임금 범위를 더 축소하는 내용의 지침이었다. 당시 노동계는 이 지침으로 연장노동수당의 책정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이 줄어들어 사용자가 더 싼 값에 연장노동을 시킬 수 있게 됐다고 반발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6월 발표한 ‘유연근로시간제 가이드’ 갈무리.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할 경우 법적으로 가능한 주 최대 노동시간을 안내하는 내용이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도 노동시간 단축 속도를 더디게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개정된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는 300인 미만 사업장에서 2020년부터, 50인 미만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적용 예정이다. 주 52시간제가 전면 시행되기 전에 탄력근로제가 확대된다면 중소규모 사업장에서는 특정 주에 주 80시간까지도 일하게 된다. 개정된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않는 사업장은 기존 고용부 행정해석에 따르면 주 최대 68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데,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면 12시간 연장근무가 추가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고용부는 주 평균 60시간 이상 일하다가 뇌심질환으로 사망한 노동자에게 과로사 산재를 인정하고 있어 탄력근로제 확대가 ‘합법적 과로사’를 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계가 탄력근로제 확대에 반대하는 대표적 이유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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