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2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노동법 전면개정 등을 요구하며 지난 14일부터 진행한 지도부 시국농성을 마무리하고 21일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겠다고 밝힌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8.11.20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 50만개를 창출하겠습니다.”
지난해 1월 더불어민주당 유력 대선주자 문재인 후보는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며 이렇게 밝혔다. “노동시간의 법정 상한인 주 52시간을 준수하면 특례업종까지 포함해 20만4천개의 일자리를, 또 노동자가 휴가만 다 써도 새로운 일자리 30만개를 만들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일자리를 나누는 동시에 “최하위권인 삶의 질을 바꾸고” “온 가족이 함께할 저녁과 휴일”을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문 후보가 대통령이 된 지금 ‘장밋빛 공약’은 장미가 됐을까?
지난 5일 문 대통령은 여야 5당 대표와 만난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에서 현행 최대 3개월인 탄력적 근로시간제(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 확대에 합의했다. 노동계는 반발했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는 곧 노동시간 단축의 반대말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정부·여당과 노동·시민사회 세력 사이 갈등의 골은 계속 깊어지고 있다.
탄력근로제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간주근로시간제, 재량근로시간제 등과 함께 이른바 ‘유연근로시간제' 가운데 하나다. 일이 몰리는 특정 기간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대신 일거리가 없는 때 노동시간을 줄여 평균 노동시간을 법정한도 내로 맞추는 제도다. 지금은 최대 3개월인 단위기간을 6개월 이상으로 늘려 제도의 활용폭을 키워 달라는 게 경영계의 요구사항이다.
경영계는 업종 특성에 따라 일이 몰리는 산업 분야가 있다며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요구해왔다. 신제품 출시를 앞둔 아이티(IT) 업계나 에어컨 등 계절 가전제품 생산업체 등이 주로 요구하는 사안이다. 즉, 에어컨을 많이 만드는 6개월엔 노동자에게 일을 많이 시키고 그렇지 않은 6개월 동안엔 그만큼 일을 덜 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건설업계는 바깥에서 일하기 어려운 장마철이나 겨울에 일을 덜 시키고 날씨 좋은 때 더 시키고 싶어한다.
노동계는 이처럼 단위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 이상으로 연장할 경우 그렇잖아도 긴 것으로 악명 높은 한국의 노동시간이 되레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데 주목한다. 지금도 3개월 단위의 탄력근로제를 도입하면 한 주 최대 64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는데, 이론상으론 일주일에 하루는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도 가능해진다. 단위 기간이 6개월로 늘 경우, 64시간 일하는 주가 3개월(13주)로 늘어난다. 이는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12주 동안 노동시간이 주당 평균 60시간을 초과한 경우 과로사로 인정하는 정부의 판단 기준을 훌쩍 넘기는 셈이다. 유럽처럼 최소 연속 휴게시간 규정도 없는 상황에서, 단위기간 확대는 합법적 과로사를 조장하는 꼴이라는 게 노동계의 주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멕시코에 이어 두번째로 긴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향에 역행하는 조처라는 지적이다.
노동시간 단축 역행에 이은 두번째 쟁점은 해당 사업장 노동자의 임금이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 탄력근로제를 적용받는 노동자는 주 52시간 노동을 해도 40시간을 초과한 나머지 12시간분의 연장근로수당을 받지 못한다. 단위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손실도 커진다. 한국노총은 시급 1만원을 받는 노동자가 6개월이나 1년 단위의 탄력근로를 하는 것만으로도 임금이 7%나 깎이게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민주노총은 최대 임금손실이 18%에 이를 것이란 계산을 내놓기도 했다.
정부와 여당은 이처럼 유증기 가득한 탱크 같은 탄력근로제 확대 문제를 ‘속도전’ 하듯 밀어붙이면서 노동계와의 갈등에 불을 붙였다. 정치권은 올해 초 관련 법 개정 때 “2022년까지 탄력근로제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한 국회 합의를 별다른 이유 없이 스스로 뒤집어 최근 탄력근로제 확대를 추진했다. ‘주 최대 52시간제’가 처벌 유예로 제대로 시행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탄력근로제 확대를 통해 52시간제의 근본 취지를 흔드는 양상이다. 여야가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구성되기도 전에 연말까지 탄력근로제 확대를 법제화하겠다고 합의하고, 출범도 하지 않은 경사노위에 촉박한 시한을 통보하고 합의를 압박해 ‘사회적 대화’의 문을 좁히고 있다는 지적이 인다.
이조은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간사는 “정치권은 탄력근로제의 효과나 부작용을 따져보지 않고 근거 없이 경영계의 이익만 대변하며 제도 개편을 진행하고 있다. ‘시기를 못박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회가 처리하겠다’는 태도는 경사노위를 명분 쌓기용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도 “정부여당은 경영계의 불만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탄력근로제 확대를 꺼내들었지만 이런 태도는 노동개혁의 신뢰를 깎아먹고 노사 갈등만 촉발시킨다. 사회적 대화가 본격화하는 상황에 이렇게 노동계를 배제한다면,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민주노총은 20일 청와대 앞에서 ‘11·21 총파업 결의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와 국회는 존중과 토론이 아닌 대결과 일방통행으로 노동계를 몰아가며 탄력근로제 확대 등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정부에 여야정 협의 테이블을 제안하면서 노동개악에 나서려는 본심을 드러냈다. 정부·여당이 노동자에게 등을 돌리면 보수진영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애초 파업의 핵심 이유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요구였지만, 정국의 흐름에 따라 탄력근로제 확대 반대가 점점 중심이 되었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논란은 ‘주 최대 52시간 상한제’를 도입한 취지를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20일 발간한 ‘이슈페이퍼’에서 “노동자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연속휴식시간제를 도입하고 노사 간 단체교섭을 통한 탄력근로제 합의가 보장되도록 하는 제도 개선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휴일에 노동을 금지하는 법, 유럽 국가들 사이에 보편적인 연간 2~4주 이상의 장기 휴가제도 등 노동자 휴식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단기적 경기 부진을 이유로 경영계 요구만 수용할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해보자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이를 위해 △노사정 공개토론 제안 △대국민 여론조사 실시 △산업별 장시간 노동실태와 탄력근로제 확대 부작용을 밝히는 증언대회 등을 제안했다.
한국노총은 경사노위 산하 노동시간 제도개선 위원회에서 탄력근로제 확대 저지에 집중할 계획이다. 강훈중 한국노총 대변인은 “탄력근로제는 노사 이견이 큰 만큼 연내에 합의를 이루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운데도 정치권이 사회적 대화 기구를 무력화하고 졸속 처리하려 한다”며 “사회적 대화 틀 안에서 탄력근로제 확대의 문제점을 최대한 공론화하겠다”고 했다.
박기용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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