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죽음, 산업재해] ② ‘공교로운’ 추락의 이유
프로판 저장탱크 용접 작업 중
크레인에 매단 발판 크게 휘청
김씨 있던 곳 순식간에 푹 꺼져
자식 둘을 산재로 잃은 어머니는
아직도 사고원인을 듣지 못했다 이들은 탱크 안쪽 밀폐된 공간인 내벽과 외벽 사이에 들어가 아래에서 위로 내벽을 용접하고 있었다. 정씨·김씨를 포함해 8명이 이 일을 했는데, 용접은 1m가량인 외벽과 내벽 틈에 임시로 고정시킨 길이 7.6m, 폭 0.8m의 발판 위에서 이뤄졌다. 한 작업이 끝나면 발판을 떼어내 3.8m 높이의 한 칸 위로 올려 고정한 뒤 다시 일하는 방식이었다. 용접이 끝나면 탱크 위 크레인이 발판을 끌어 올렸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발판 모서리마다 줄을 매달아 끌어 올렸는데, 작업자는 발판 위에 실려 함께 올라갔다. 오전 11시37분께였다. 해당 칸 작업이 끝난 뒤 김씨가 발판을 벽에서 떼어내기 위해 그라인더로 발판 끝 고정 부위를 갈랐을 때였다. 크레인에 매달아놓은 발판이 갑자기 크게 휘청였다. 그라인더 작업을 위해 발판 끝에 있던 김씨 쪽이 아래로 푹 꺼졌다. 순식간이었다. 정씨는 바로 옆 고정된 발판 위에서 김씨가 갑자기 생긴 검은 틈새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김씨와 같은 발판의 가운데 서 있던 다른 동료는 화를 면했다. 발판이 평소와 달리 갑자기 휘청인 이유를 정씨는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김씨 사연은 기막혔다. 동료들은 사고 뒤 “전기 쪽 일을 했던 친형도 몇년 전 감전 사고로 숨졌다고 했다”며 아들 둘을 산재로 잃은 김씨의 노모를 걱정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지만, 여느 때처럼 위험했다. 사고 당시 김씨는 안전대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떨어지는 김씨를 받아줄 안전망도 없었다. 사업주는 추락 위험이 있는 장소에 추락방호망(안전망)을 설치하고 설치하기 어려운 경우 노동자에게 안전대를 착용하게 하는 등 추락 방지에 필요한 조처를 해야 한다(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42조). 하지만 둘 다 없었다. 착공 이후 줄곧 그랬다. 만에 하나 떨어지는 노동자를 잡아줄 생명줄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건설 현장에선 흔히 작업자의 안전모나 안전대를 문제 삼는다. 정부도 올해 초 ‘산업재해 사망사고 감소 대책’을 통해 공공기관 발주 공사에서 안전모·안전대 착용 같은 안전수칙을 2회 이상 위반한 노동자를 작업장에서 즉각 퇴거 조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의 동료들은 작업자 개인의 안전수칙 준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책임 전가에 가깝다”고 했다.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 책임이 회사에 있는데도, 비용이 드는 제대로 된 조처는 외면한 채 작업자 탓만으로 돌리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적인 안전 관리자도 두지 않았고, 작업계획서 관리도 부실했다고 주장했다. 김씨와 함께 일한 용접공 양경근(44)씨는 말했다. “1년 넘게 일하는 동안 안전 관리자가 3~4개월 주기로 바뀌었는데 기본적인 용어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었다. 아파트 안전 관리하던 사람이 탱크 건설 현장을 관리하려니 눈에 띄는 안전모·안전대만 문제 삼았다.” 노동조합이 지정한 현장 책임자이기도 한 양씨는 지난해 6월 회사 쪽 작업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안전 관리자가 엉뚱한 지시를 고집해 다투기도 했다. “발판을 해체해서 위로 올려야 하는 작업인데 안전 관리자는 계속 안전고리를 옆 발판에 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걸다간 발판이 뒤집혀서 큰일 나는데도요. 발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모르고 어딘가에 고리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만 한 거죠.” 여느 때처럼 위험한 환경
수십m 위 작업하는데 안전망 없고
회사는 전문적 안전관리자 안 둬
폭 좁아 안전망 설치 못한다더니
김씨가 추락한 뒤 부랴부랴 마련 양씨는 지시에 반발해 조합원과 함께 작업을 거부했다. 다음날 안전 관리자는 “고리 안 걸어도 되니 작업을 다시 시작해 달라”며 물러섰다. 동료들은 이때 회사 쪽이 안전고리를 걸 제대로 된 방편을 만들거나, 안전망 등 안전설비 설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면 안타까운 사고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안전망은 김씨가 숨진 뒤에야 현장 내 추락이 예상되는 모든 곳에 설치됐다. “폭이 좁아 설치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김씨가 추락한 탱크 벽체 사이에도 안전망이 놓였다.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이뤄진 조처였다. 문제는 김씨가 특별한 사례가 아니란 것이다.? 떨어진 장소와 높이가 구체화된 가장 최근 통계인 ‘2014년 산업재해원인조사’를 보면, 이 해에 업무상 사고로 숨진 이는 829명인데 이 가운데 가장 많은 324명(39.1%)이 떨어져 숨졌다. 업종별로 사고로 숨진 829명을 구분하면 건설업에서만 366명(44.1%)이었는데, 특히 공사규모 20억원 미만에 사망자 191명(52.2%)이 몰려 있다. 작은 규모의 건설 현장에서 떨어져 숨지는 이들이 가장 많은 것이다. 한해의 불운이 아니다. 통계는 지난해에도 366명의 김씨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또다른 366명의 김씨들
업종별 추락사 보면 건설업이 44%
공사규모 20억 미만 52% 몰려 있어 2014년에 떨어져 숨진 324명 중에선 비계 등 가설 구조물에서 떨어진 경우가 87명(26.9%)으로 가장 많았다. 사망이 아닌 부상도 다르지 않다. 2014년 떨어져 다친 1164명 가운데 349명(30.0%)이 계단이나 사다리, 255명(21.9%)은 비계 등 가설 구조물에서 떨어졌다. 숨진 이들은 10m 이상 높이에서 떨어진 경우가 다수(31.2%)였고, 다친 이들은 거의 전부(94.4%)가 5m 미만이었다. 높이의 차이가 생사를 갈랐을 뿐, 결국 가설 구조물 위에서 추락이 가장 큰 문제란 얘기가 된다. 잠시 쓰고 마는(가설) 구조물이지만 얼마나 안전한 것을 쓰느냐, 얼마나 안전하게 쓰느냐가 노동자의 생사를 가르는 것이다. 숨진 김씨도 작업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작업발판에서 25m 아래로 떨어졌다. 강성철 플랜트건설노조 충남지부 노동안전국장은 “안전설비를 ‘배보다 큰 배꼽’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소리 없이 사람들을 사지로 떠민다”고 말했다. 이지혜 박기용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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