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10월 12일 오전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리는 서울 새문안로 에스타워 앞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과 7대 입법과제 연내처리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유럽연합(EU)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이행하지 않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상 무역분쟁 해결 절차를 개시했다. 유럽연합이 노동권 조항을 문제 삼아 자유무역협정 분쟁해결 절차에 들어간 것은 사상 최초다. 한국 정부는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체결 당시 비준 이행을 약속했으나, 유럽연합의 거듭된 이행 촉구에도 “북한과 전쟁 중”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논의 중”이라며 이행을 미뤄왔다.
17일 고용노동부는 유럽연합이 한국 정부에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의 의무 사항인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이 7년째 이행되지 않는다며 ‘정부 간 협의’를 개시했다고 밝혔다. ‘정부 간 협의’는 자유무역협정상 분쟁해결 절차로 정부 간 실무협의와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는 제도다. 양자가 90일 이내에 접점을 찾지 못하면 ‘전문가 패널’을 소집할 수 있다. 전문가 패널은 한국·유럽연합·제3국 6명씩 모두 18명으로 구성되며 90일 이내에 권고 보고서를 내야 한다. 권고 이행 여부는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추후 점검한다. 국제노동기구 총회가 채택한 8개 핵심협약은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 금지 등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담고 있다. 한국은 이 가운데 ‘결사의 자유’(87호·98호)와 ‘강제노동 철폐’(29호·105호) 협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았다.
유럽연합은 자유무역협정 체결 직후부터 거듭 협약 이행을 요구해왔다.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은 2011년 5월 국회에서 비준안이 통과돼 같은 해 7월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유럽연합은 이듬해부터 협정 이행점검 협의체인 ‘무역과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핵심협약 비준을 압박해왔다. 한국 정부는 지난 10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도 “자유무역협정의 노동기본권에 관한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를 받았다. 앞서 지난해 3월 브뤼셀에서 열린 자유무역협정 지속가능발전위 5차 회의에서 “한국 정부는 (핵심협약 비준 요구에 대해) 엄밀히 따지면 한국은 북한과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유럽연합 보도자료는 전한다.
핵심협약 비준을 국정과제로 삼은 문재인 정부는 “핵심협약 비준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추진한다”는 태도다. 이번 분쟁해결 절차 개시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사회적 대화가 충분한 노력이 아니라며 구체적인 비준 일정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적 대화의 핵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경영계가 핵심협약 비준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논의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다.
고용부는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상 노동권 조항에서는 경제적 제재가 불가능하다”면서도 “비준이 지연되면 유럽연합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간 협의’ 결과는 직접적 제재로 이어지지 않아도 국가 신뢰도에 타격을 주게 된다. 노주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통상위원회 부위원장은 “핵심협약 비준을 안 한 상대에게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개정을 하자는 유럽연합 내부 목소리에 힘이 실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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