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서울 마포구의 한 커피숍에 직장 ‘갑질’ 피해자 2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종이봉투로 만든 가면을 쓰고 각자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했다. 직장갑질 119 제공
“오빠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남친 만나면 꼭 콘돔 써라”
얼마 전 회사원 ㄱ씨가 회사 임원에게서 들은 말이다. 해당 임원은 ㄱ씨에게 성희롱을 일삼고 서류를 던지는 등의 폭행을 가했다. ㄱ씨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아무 조처도 하지 않았다. ㄱ씨는 폭행으로 해당 임원을 폭행으로 고소한 뒤에도 그와 함께 일하며 보복성 갑질을 당해야 했다.
급기야 회사의 퇴사 압박까지 받게 된 ㄱ씨는 “개선 의지가 없는 가해자와 회사를 용서할 수가 없다. 울화가 치밀고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다”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지금까지는 직장 내 괴롭힘 피해 노동자를 구제할 수 있는 법이 없어 ‘폭행 신고’ 외에는 ㄱ씨가 할 수 있는 조처가 거의 없었으나 앞으로는 달라질 전망이다.
27일 그동안 법사위에서 잠들어 있었던 일명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인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이번에 개정된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보호 조처 외에 처벌 규정은 두지 않아 한계로 지적된다.
개정된 내용을 보면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할 경우 사실 확인 조사를 반드시 해야 하고, 근무 장소 변경이나 배치 전환 등 방식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해야 한다. 사용자가 피해 노동자에게 유급휴가를 명령하는 등 적절한 조처를 하도록 했다. 또 사용자는 신고자나 피해 노동자에게 해고 등 불리한 처우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받을 수 있다. ㄱ씨 사례처럼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가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함이다.
이날 국회는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에 걸리면 이를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도 함께 통과시켰다. 그동안은 노동자가 직장 내 괴롭힘 탓에 우울증이나 급성 스트레스 장애 등에 시달리더라도 법적 근거가 없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생긴 정신질환 치료비까지 노동자가 감당해야 해서 이중삼중 피해가 생기기도 했다.
이번 법 개정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마련한 최초의 시도로 의미가 크다. 최혜인 직장갑질119 상임노무사는 “그동안은 직장 내에서 폭언·인격모독 등 괴롭힘을 당해 상담을 요청한 피해자에게 ‘관련법이 없어서 경찰에 폭행으로 신고해도 인정받기 쉽지 않다’는 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며 “직장 내 괴롭힘을 처음 법적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갑질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규칙을 마련하게 됐다”이라고 평가했다.
처벌 규정이 없고 보호 범위가 좁아 실효성 면에서 한계가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동현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는 “근로기준법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규정하다 보니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4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나 특수고용노동자는 배제된 상태다. 아울러 사용자가 피해 노동자에게 불이익 조처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을 위반해도 처벌할 수 없다는 점도 한계”라고 설명했다.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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