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관심·법 제정 촉구 ‘한국 과로사·과로자살 유가족 모임’
유가족은 애도할 틈도 없이 동분서주
산재 입증하려 애쓰지만
회사는 자료제출·책임 회피하고
근로복지공단 산재 인정 바늘구멍
산재판정 기준 자의적이고
회사도 자료제출 의무 없어
일본은 2014년 ‘과로사 방지법’ 제정
정부에 교육·예방의무 주고 점검
“내 문제 아니라며 무관심하면
과로사·과로자살 나의 일 될 수도”
유가족은 애도할 틈도 없이 동분서주
산재 입증하려 애쓰지만
회사는 자료제출·책임 회피하고
근로복지공단 산재 인정 바늘구멍
산재판정 기준 자의적이고
회사도 자료제출 의무 없어
일본은 2014년 ‘과로사 방지법’ 제정
정부에 교육·예방의무 주고 점검
“내 문제 아니라며 무관심하면
과로사·과로자살 나의 일 될 수도”
과로사·과로자살로 가족을 잃은 이들이 29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서 열린 ‘한국 과로사·과로자살 유가족 모임’에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배진숙(가명·37)씨의 남편 이아무개(당시 40)씨는 신혼 초인 2017년 6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성중공업 연구직 노동자였던 남편 이씨는 과도한 업무와 직장 내 괴롭힘, 희망퇴직 압박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당시 배씨는 딸을 낳은 지 두달밖에 안 됐지만 남편의 죽음이 산재가 틀림없다는 생각에 유가족 모임에 나오기 시작했다. 과로사·과로자살 유가족은 충분히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동분서주해야 한다. 과로사·과로자살의 배경을 설명할 자료를 가진 회사는 대체로 책임을 회피하고, 유가족들은 산재 입증 책임을 떠안으며 ‘심리적 침몰’을 겪는다. 애써도 산재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과로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기준 자체가 없다. ‘고의·자해행위’인 자살은 기본적으로 산재로 보지 않는다. 다만 예외조항으로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를 했다는 게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만 산재가 될 수 있다. 배씨는 남편 휴대전화 기록을 토대로 노동시간부터 추정했다. 남편이 다니던 정신과 병원에서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한 면담 기록도 받아 왔다. 남편이 상사에게 모욕적인 질타를 자주 들었고 그럴 때면 밥도 안 먹고 일만 했다는 회사 동료의 증언도 직접 들었다. 자꾸 피하기만 하는 회사의 태도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결국 배씨는 유가족 모임의 도움으로 산재 신청서를 제출했고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 구체적 과로자살 인정 기준 세워야
과로자살의 산재 승인율은 2016년 18.2%(10건)에서 2017년 36.5%(23건)로 오르는 추세다.? 전문가들은 산재 승인 여부를 판단하는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변한 결과로 본다. 여전히 문제는 불명확한 판단 기준에 있다. 2017년에 과로자살 산재 신청의 불승인 사례를 보면 “업무상 스트레스가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자살할 정도의 스트레스로 볼 수 없다” 등의 자의적인 판단이 많았다. 정신질환을 앓는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하면 ‘정신질환 과거력이 있다’는 이유로 산재 불승인 처분을 하면서, 정작 정신질환으로 노동자가 자살한 뒤 유가족이 산재 신청을 할 때는 ‘정신질환 과거력이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 처분을 내리기도 한다.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 새날)는 “산재 승인율이 올라도 제도적으로 과로자살 인정 기준이 없어 경찰이나 근로복지공단 조사자의 자의가 개입될 여지가 많다. 동료 진술 등은 회사가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 사회적·규범적으로 타당한 과로자살 인정 기준을 세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회사에 자료제출 의무가 부여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권 노무사는 “회사 쪽이 성실하게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거나 거짓 자료를 제출할 때 과로자살 산재 인정은 굉장히 어려워진다”며 “과로사·과로자살 사건에서 회사에 자료 제출 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어길 시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나약해서 죽었다’는 오해와 낙인
유가족 모임 회원인 장향미(40)씨는 지난해 1월 세살 터울 동생 민순씨를 과로자살로 잃었다. 인터넷 강의 업체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민순씨는 하루 12∼14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4명이 하던 일을 몰아 맡는 바람에 퇴근 뒤에도 일을 멈추지 못했다. 언니에게 “일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호소하며 우는 날이 잦아졌다. 장씨는 “일 못하면 잘릴 수 있다는 식으로 평가가 이루어지고 직장을 그만두면 다시 구하기도 어려우니 동생은 ‘죽도록’ 일했다”고 말했다. 민순씨는 평소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과도한 업무, 직장 내 괴롭힘, 야근으로 병증이 급격히 악화했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 이어졌다. “동생이 평소 자기 전에 맥주를 가볍게 마시곤 했는데, 사망 직전에는 만취할 때까지 마시는 일이 잦아졌어요. 그때는 ‘일도 많은데 적당히 마시라’고 타박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업무로 악화된 우울증으로 자기 제어가 안 된 거죠.” 유가족은 ‘고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질타 속에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그때 ‘여보 병원 가봐’라는 말이라도 했으면 달라졌을까 싶다” “분명 신호가 있었는데 내가 그걸 놓쳤다”는 식이다. 유가족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자책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유가족부터 고인의 죽음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라고 믿어야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과로사’라는 표현을 처음 쓰기 시작한 일본은 과로사·과로자살의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편이다. 2014년 제정된 일본의 ‘과로사 방지법’은 정부에 과로사(과로자살 포함)의 위험성을 교육하고 예방할 의무를 규정했다. 정부는 해마다 과로사 방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의회에 보고해 검토받아야 한다. 학계는 1991년 만들어진 일본 과로사 유가족 모임의 꾸준한 공론화 노력으로 일본의 과로사 방지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장향미씨는 한국의 유가족 모임이 일본과 같은 구실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과로사·과로자살이 내 문제 아니라고 귀 막고 눈감으면 언젠가 자기 차례가 와요. 일하다 병들어 죽거나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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