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인터뷰
노동재난연대기금 제안한 권영숙 대표
“국가가 모두에게 지원금 줬더라도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나눠 갖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코로나 재난은 평등하지 않고
중산층·정규직 노동자는 비켜가
소비 촉진하는 마음 이해하나
고통받는 재난 난민과 연대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성공을
이젠 사회적 연대로 이어가야”
노동재난연대기금 제안한 권영숙 대표
“국가가 모두에게 지원금 줬더라도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나눠 갖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코로나 재난은 평등하지 않고
중산층·정규직 노동자는 비켜가
소비 촉진하는 마음 이해하나
고통받는 재난 난민과 연대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성공을
이젠 사회적 연대로 이어가야”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19 위기를 더 안전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은 의료 노동자와 물류 노동자의 헌신적인 노동 덕이죠. 그렇다면 코로나로 노동재난을 겪고 있는 약자들과 사회적 연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19 위기를 더 안전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은 의료 노동자와 물류 노동자의 헌신적인 노동 덕이죠. 그렇다면 코로나로 노동재난을 겪고 있는 약자들과 사회적 연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70/647/imgdb/original/2020/0626/20200626502903.jpg)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19 위기를 더 안전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은 의료 노동자와 물류 노동자의 헌신적인 노동 덕이죠. 그렇다면 코로나로 노동재난을 겪고 있는 약자들과 사회적 연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사파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노동자들의 파업기금을 사회적으로 마련하자는 ‘연대’ 운동(사회적파업연대기금)을 9년째 해오고 있는 대학 선생이 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는 “코로나 재난은 불평등하다”며 해고와 무급휴직, 실업 대란을 겪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등을 지원하기 위한 ‘노동재난연대기금’ 조성을 제안했다.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를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원효로의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만났다.
재난지원금 기부, 예상치의 1%에 그쳐 사파기금은 지난 4월 말 “코로나19의 재난 앞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재난연대기금을 조성”하자며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을 제안했다. 이들은 제안서에서 “코로나19의 경제적 타격이 서서히 몰아치기 시작하는 지금, 코로나19는 ‘노동재난'이 되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해고, 무급휴직, 실업 대란이 노동의 가장 약한 고리인 비정규,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거세게 덮치고 있습니다”라며 “국가로부터 전국민이 받게 되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일회적인 가처분소득으로 사용하지 말고, 사회적 노동 약자와 민중을 위한 노동재난연대기금으로 조성하”자고 호소했다. 5월1일부터 시작된 모금은 7월 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조성된 기금은 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이주노동자 지원, 노동활동가 지원, 코로나19 국제연대에 사용할 예정이다.(신청: vo.la/0TZ0, 직접 이체: 국민은행 012501-04-230247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보통 기금을 모금할 때는 낮은 자세로 읍소전략을 많이 취하는데 노동재난연대기금은 ‘연대는 원조나 시혜가 아니라 의무’라는 식으로 좀 강해요. “윤리적으로 부담을 안겨주는 얘기죠. 사람들이 보통 코로나19는 나에게도 재난이라고 쉽게 생각하죠. 왜냐하면 나도 언제든 걸릴 수 있는 전염병이거든요. 우리 사회의 사회안전망은 부실하기에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 돈을 더 확보하자는 분위기가 강하죠. 그런 모습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긴 해요. 그러나 이 재난은 기본적으로 중산층이나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켜 갑니다. 실제로 이들은 대부분 긴급재난지원금을 공돈이라고 생각하고, 자전거를 사거나 와인을 사고 비싼 한우를 사 먹는 데 썼잖아요. 그들에게는 결국 이 돈이 긴급재난 구호금이 아니었고, 생활비는 그만큼 굳었으니 그 돈을 연대기금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70/647/imgdb/original/2020/0626/20200626502901.jpg)
권영숙 사회적파업연대기금 대표가 지난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사파기금 사무실에서 ‘코로나19 노동재난연대기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단위노조 수십억원 기금 왜 쌓아두나” ―긴급재난지원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서 이미 다 썼을 것 같아요. 모금이 사실상 끝난 것 아닌가요? “사회연대기금의 취지에 공감한다면 재난지원금은 썼더라도 개인 돈을 내면 되죠. 굳은 생활비가 있잖아요. 사회적 연대로 나아가는 실천의 한 방식을 제안한 것이니 지금이라도 참가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모인 돈은 상대적으로 적은데 쓸 데는 많아 보여요. “그건 큰 걱정 안 해요. 돈을 모으지만, 이런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거든요. 돈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죠. 자본주의에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자체가 부패의 첩경이라고 보기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가 그런 방식의 기금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파기금이나 재난기금으로 아무리 돈이 많이 모여도 근본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다만, 참여자들이 많으면 우리 사회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죠. 사파기금이나 재난기금은 그렇게 가는 징검다리이자 마중물일 뿐이죠.”
![사파기금은 ‘사파동행’과 ‘사파 작은 희망버스’라는 제목으로 현장 연대 집회도 꾸준히 열어왔다. 2015년 12월15일 삼척 동양시멘트 비정규 해고 노동자들의 서울 광화문 삼표 본사 앞 농성장에서 벌인 3차 사파동행 집회에서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사파기금 제공 사파기금은 ‘사파동행’과 ‘사파 작은 희망버스’라는 제목으로 현장 연대 집회도 꾸준히 열어왔다. 2015년 12월15일 삼척 동양시멘트 비정규 해고 노동자들의 서울 광화문 삼표 본사 앞 농성장에서 벌인 3차 사파동행 집회에서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사파기금 제공](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60/630/imgdb/original/2020/0626/20200626502904.jpg)
사파기금은 ‘사파동행’과 ‘사파 작은 희망버스’라는 제목으로 현장 연대 집회도 꾸준히 열어왔다. 2015년 12월15일 삼척 동양시멘트 비정규 해고 노동자들의 서울 광화문 삼표 본사 앞 농성장에서 벌인 3차 사파동행 집회에서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사파기금 제공
![2011년 7월 출범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지금까지 모두 77회에 걸쳐 노동 투쟁을 지원했다. 지난해 12월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농성자들에게 무릎담요 500개 중 일부를 전달하는 모습. 왼쪽 셋째가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 사진 사파기금 제공 2011년 7월 출범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지금까지 모두 77회에 걸쳐 노동 투쟁을 지원했다. 지난해 12월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농성자들에게 무릎담요 500개 중 일부를 전달하는 모습. 왼쪽 셋째가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 사진 사파기금 제공](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960/640/imgdb/original/2020/0626/20200626502902.jpg)
2011년 7월 출범한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사회적 연대 차원에서 지금까지 모두 77회에 걸쳐 노동 투쟁을 지원했다. 지난해 12월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려진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노동자 추모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농성자들에게 무릎담요 500개 중 일부를 전달하는 모습. 왼쪽 셋째가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 사진 사파기금 제공
“나는 아직 ‘80년대’ 살아가는 구좌파” 1983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한 권영숙은 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이른바 86세대(80년대 학번의 1960년대생들)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일간지(<한겨레신문>) 기자로 6년간 있다가 늦깍이 공부를 시작해,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찰스 틸리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노동계급 없는 자유민주주의: 한국의 민주화, 동맹정치, 노동운동, 1987~2006’)을 쓰고 2008년 귀국했다. 스탠퍼드대학교 출판부가 곧바로 박사논문의 출판을 제의했을 정도로 학계의 평이 좋았다. 그는 현재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있으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인권과 노동사회학, 정치사회학 등을 강의해왔다. ―정규직으로 자리잡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비정규직 교수로 있어요. 노동 투쟁 현장에는 빠지지 않고요.(웃음) “귀국했을 때 연구자로서 공부에 전념하면서 얌전하게 살 수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연구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이 80년대 이후 제가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도 봤어요. 그런데 한국에 왔을 때 용산참사가 막 터졌어요. 그리고 얼마 뒤 평택에서 쌍용차 투쟁이 있었고요. 노동현실이 제가 한국을 떠날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그 두 사건이 제게 준 문제의식이 커서 학교에만 안주할 수가 없었어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거죠.” ―법학에서 노동으로 전공을 바꾼 것도 특이해요. “1992년 기자를 관두니까 사법시험을 봐서 인권변호사가 되라고 조언하는 지인들이 많았어요. 그러나 저는 1980년대의 뜨거웠던 변혁운동이 왜 실패했는지, 이른바 86세대가 왜 운동의 길을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 변혁의 꿈을 폐기했는지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싶었어요. 오랜 공부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는 노동을 배제했던 결과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진단할 수 있었죠. 이를테면, 1980년대 초반 담론이었던 삼민, 즉 민주와 민중, 민족 가운데 지금 민주만 남았죠. 그런데 민족 문제는 모두가 고민하고 있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가 될 것 같은데, 민중, 그리고 나아가 계급은 아예 사라지고 없어요. 저는 삼민의 꿈을 꿨던 80년대의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저는 구좌파입니다. ‘86세대’만 남고, 80년대는 사라진 지금, 그때의 생각을 이런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두죠.” ―앞으로 계획은요? “연구자와 활동가 이 두가지 모두 저의 현재 정체성이라고 봐요. 사파기금을 통해서 노동과의 연대와 연결을 모색하는 한편 연구자로서의 활동도 꾸준히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가 던진 질문이 신문사로 돌아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내내 맴돌았다. 나는 과연 코로나 긴급재난에 처했던가. 나는 어떤 연대를 했던가. 컴퓨터를 켜고, 지원금 받은 계좌를 열어 노동재난연대기금에 접속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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