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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용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던 웹툰 작가 김성연(가명·44)이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45도로 비스듬하게 세워진 태블릿 모니터 화면은 절전모드로 바뀌어 까맣다. 액정을 켜보니 새벽 3시. 이번주 마감까지는 이제 6시간 남짓 남았다. 지난 3일 동안 의자에 앉아 하루 1~2시간씩 눈을 붙이며 작업을 해왔지만 또다시 ‘데드라인’에 몰린 것이다. 이제 더는 이전 화면으로 되돌리기 위한 키보드 단축키인 컨트롤 제트를 눌러선 안 된다. 보호대를 한 손목이 저려왔다. 어깨는 돌처럼 굳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다시 움직이면서도 김성연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이라고 되뇌었다.
웹툰 편집과 기획, 작가 관리를 맡는 플랫폼 피디는 지난번 미팅 때 김성연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작가님, 이번에도 지각하면 사내에서도 평가가 자꾸 나빠져요.”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말 속에 가시가 숨어 있었다. 10년 이상 보조 작가 경험을 쌓은 끝에 어렵게 데뷔한 김성연에게 ‘상습 지각 작가’ 낙인은 치명적이다. 일주일 안에 완성해야 하는 웹툰은 약 70컷 분량. 그림체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김성연의 경우 1컷당 작업 시간이 최소 1시간에서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최소 1시간만 잡아도 일주일 동안 꼬박 하루 10시간씩 그려야 한다. 저녁을 걸렀던 김성연은 마감 때를 대비해 사둔 인스턴트 쌀국수로 허기를 달랬다. 국물은 마시지 않았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야 한다.
‘일어나면 출근, 누우면 퇴근.’ 과중한 노동을 빗댄 표현이지만 김성연에게 이 말은 비유가 아닌 현실이다. 일요일에 업로드되는 작품 기준으로 월요일은 콘티와 스토리를 짠다. 화요일은 스케치하고, 수요일과 목요일은 스케치에 그림을 입히는 펜 터치 작업을 한다. 금요일은 그림에 색깔을 입힌다. 토요일은 배경을 그리고 마무리 작업을 한다. 이 빡빡한 일정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끝나야 일주일에 딱 하루, 일요일에 쉴 수 있다. 그러나 그 휴일도 플랫폼 쪽의 수정 요구에 응하며 보내는 일이 태반이다.
<한겨레>가 만난 작가 상당수가 김성연처럼 일주일에 적게는 하루, 많게는 사흘가량 ‘잠들 수 없는 밤’을 보낸다고 했다. 작가들은 통상 60컷 이상, 많을 때는 90~100컷 사이의 색채 웹툰 작업을 1주일당 1회 연재에 소화한다. 혼자는 물론, 어시스턴트 1~2명의 도움을 받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분량”이다. “매회 마감을 하면서도 ‘이게 진짜 말이 되나’라고 생각하곤 해요.” 신인 작가 장주연(가명)의 말이다.
연재 1회당 그려야 할 그림 컷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웹툰 업계에서 주 1회 60컷 이상 컬러 마감은 2010년대 이후 업계의 암묵적 ‘룰’이 됐다. 2000년대 초반엔 대체로 채색이나 배경 작업이 크게 필요 없는 웹툰을 주 1회 30~40컷 연재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작가와 플랫폼들 사이에서 경쟁이 심화하고 독자들의 요청까지 겹치면서 컷 수와 그림 퀄리티 향상이 함께 요구되기 시작했다. 네이버 인기 웹툰이었던 조석 작가의 ‘마음의 소리’도 연재를 시작한 2006년에는 주 2회 연재에 회당 20컷(주당 30~40컷) 정도 분량이었는데, 지난 6월 말 연재 종료 때(주 1회 연재)는 회당 70컷 가까운 분량으로 늘었다. “얼마나 더 스크롤을 길게 내릴 수 있는가 하는 경쟁이 붙은 거죠. 어떤 작가가 100컷 풀컬러로 작품을 내놓으면 독자들이 ‘분량 혜자다’라며 반응이 좋잖아요. 그럼 다른 작가들도 과노동으로 가는 거죠.” 김희경 전국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장의 말이다.
플랫폼은 “독자가 원한다”는 말을 무기로 노동 조건 변화를 무시했다. 컷 수를 늘리고 퀄리티도 높여달라고 요구하면서 고료나 마감 주기는 그대로 유지했다. 작가들은 이 요구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플랫폼은 ‘싫으면 관둬라. 다른 작가 찾겠다’는 태도인 거죠. 어시스턴트를 쓸 여력이 없는 신인 작가나 지망생은 더 힘들어지는 구조입니다.” 이재민 웹툰 평론가의 설명이다.
웹툰 노동의 과중함은 국가인권위원회가 2019년 진행한 ‘플랫폼 노동 종사자 인권 상황 실태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조사 결과를 보면, 웹툰·웹소설 작가의 주당 평균 일하는 날은 6.1일,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은 9.88시간으로 나타났다. 작업하지 않는 시간도 늘 아이디어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조사에서 웹툰·웹소설 작가에게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는 질문을 제시하고 ‘매우 그렇지 않다’(1점)부터 ‘매우 그렇다’(5점)까지 5점 척도를 표시하도록 했더니, 평균 4.5점이 나왔다.
웹툰 업계에는 지금껏 ‘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인식이 있었다. 최근엔 많은 웹툰 작가들이 ‘창작 노동자’로 자신들이 규정되길 바라고 있다. “저는 창작의 대가보다 노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싶어서 ‘창작 노동자’라는 호칭에 적극 동감하는 편이에요. 노동을 하고 있으니 정당한 보상을 책임져달라는 의미도 있고요.” 29살 웹툰 작가 박정배(가명)가 말했다.
플랫폼에 속한 노동인 만큼 회사원들처럼 노동 시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강해지고 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데 친구가 부러울 때가 많아요. 적어도 퇴근 뒤에나 주말에는 시간이 자유로우니까요. 저는 일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다 보면 어느덧 밤이 되고 주말이 훌쩍 지나가거든요.” 장주연의 말이다.
한 웹툰 작가가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작업하고 있다. 익명의 작가 제공.
과노동은 당연하게도 건강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겨레>가 인터뷰한 작가와 지망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작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앉아서 작업하는 탓에 손목(손목건초염, 손목터널증후군), 허리(허리디스크, 신경통), 다리(하지정맥류 등), 목(거북목, 목디스크) 등에 통증을 달고 산다. “마감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면역 체계가 무너졌어요. 심한 피부질환도 앓고 있고요. 지난해엔 종양 제거 수술도 했어요. 그리고, 저 20대인데 머리가 하얗게 세었어요.” 작가 장누리(가명·29)의 말이다.
작가 다수는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정신 질환도 경험했다고 답했다. 극한 노동과 함께 사이버 불링(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괴롭힘)도 원인으로 꼽힌다. ‘지각이 잦은데 왜 이렇게 게으르냐’, ‘그림체가 별로라 로맨스물에 집중이 안 된다’는 등의 댓글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욕설과 비꼬는 말들이 작가들의 마음을 헤집는다. “‘‘재미있다’, ‘센스 있다’는 댓글이 악플로 바뀌는 순간 더는 작업할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더라고요.” 박정배가 말했다.
인터뷰에 응한 작가들은 “데뷔작만 남기고 사라진 작가 중 꽤 많은 이들이 몸과 마음이 소진돼 떠났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오늘도 수십만명이 플랫폼 진입을 위해 대기 중이다. 소진되어 떠난 이들이 있던 그 자리, ‘21세기형 봉제공장’이라고 할 만한 플랫폼에 진입한 대체자들은 선배들의 ‘지옥 마감’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웹툰 노동자들을 갉아먹는 이 ‘맷돌’이 바로 ‘케이(K) 웹툰 열풍’을 이끄는 웹툰 산업의 그늘진 성공 공식이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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