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상 피아노 조율사
이종열씨와 제자 이정규씨 /
23일 오후 5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공연장에 불이 켜지고, 양복에 넥타이까지 맨 조율사 이종열(67)씨가 검은색 ‘스타인웨이&손즈’를 연다. 36개의 검은 건반과 52개의 흰 건반이 사이좋게 그의 손길을 기다린다. 한 건반에 3개씩 매인 줄을 튜닝하는 그의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사진 기자가 셔터를 누르자 조율사는 “옛날엔 사진을 찍으면 혼이 빠진다고 했다는데” 한다.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실제로 이 순간, 그는 “피아노에 혼신을 바친다.” 평소에도 빈틈없이 조율을 해두지만 주문이 다른 피아니스트에 맞춰 매번 까다롭게 다시 매만져야 한다. 텅빈 공연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뒤편엔 제자 이정규(47·여)씨가 그림자처럼 서있다. 스승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지켜본다. 그 또한 피아노 조율사다. 경력 20년. 솜씨를 인정받아 일거리도 많다. 그는 매일 새벽 5시면 일을 나간다. 저녁 시간을 온전히 비우기 위해서다. 피곤에 절어 졸면서도 저녁엔 지하철을 타고 이곳으로 온다. 일을 하거나 공연을 보러? 아니다. 스승의 일이 끝나길 마냥 기다린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스승을 집으로 편히 모시는 운전사 노릇을 하려는 것이다.
그에게 스승은 피아노를 넘어 삶을 조율하는 법을 가르쳐왔다. 스승 이씨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고등학교 시절 풍금부터 시작해 독학으로 조율을 배웠고, 조율 인생 50여년 동안 내로라하는 전세계 유명 피아니스트들로부터 인정받은 솜씨다. 1년이면 열댓명의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그의 손길을 만난다. “매번 국위선양 하는 심정으로 조율을 합니다.”
제자는 스승이 능력만큼 인정받지 못한다고 가끔 볼 멘 소리를 한다. 그럴 때마다 스승은 “조율사는 다양한 음색을 만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며 “독주와 협연의 소리는 달라야 한다”고 덧붙인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3개의 현이 서로 진동수를 밀고 당기면서 음가를 조정하는 피아노나 같다.
제자 이씨는 스승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를 절대음처럼 받아들인다.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 제자가 아니라, 아예 스승의 그림자가 돼버린 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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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일하느라 심각한데 왜 자꾸 웃어보라고 그래?” “선생님 난처해하시는 거 보니까 재밌어요.” 예술의전당 이종열(오른쪽) 조율사와 제자 이정규 조율사.
이종열·이정규씨 ‘사제 정담’
1999년, 서울 동숭동의 한 카페에서 고전음악동호회 회원들이 연주하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피아노는 정상적인 연주가 어려울 정도였고, 회원들은 서둘러 꼼꼼하기로 소문난 조율사 이정규씨를 찾았다. 피아노를 본 이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하긴, 그냥 최선을 다 하셨겠지. 막막할 땐 그저 배운대로 믿고 할 뿐이었다.
땀으로 곤죽이 될 때까지 250여개의 튜닝핀을 모두 뽑아내고 줄을 조이면서 세월을 닦아나갔다. 한나절 뒤 피아노를 쳐본 이들은 작은 기적을 체험했다. 회복 불능처럼 보이던 피아노가 맑은 음색을 내고 있었다. 무명 연주자들의 살롱 연주 한번에도 정열을 아끼지 않은 조율사 이씨에게 회원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은 제겐 절대음이죠” “세상의 다양한 음 담아야지”
요즘 이씨는 스승 이종열씨와 제자들로 구성된 조율사모임 ‘튜닝아트’의 고참 팀장으로, 공연장 나루아트센터의 전속 조율사로 일하고 있다. 조율사들 모두가 꿈꾸는 큰 공연장의 정식 전속 조율사. 그의 성공을 가장 기뻐했던 이도 스승이었다.
스승 이종열씨는 우리나라 최정상급 조율사다. 예술의전당, 호암아트홀, 케이비에스홀,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공연장의 피아노를 조율했고, 크리스티앙 짐머만, 예프게니 키신, 스타니슬라브 부닌, 조지 윈스턴까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을 두루 거쳤다. 머리가 허연 이 스승은 올해로 경력 50년을 헤아리지만 지금도 음색을 연구하느라 음악을 듣고 또 듣는다. 집에서조차 정장을 입지 않고는 피아노 앞에 서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자신을 단련해왔다.
제자가 스승을 만난 것은 90년. 조율을 배운 지 3년만에 자만심에 빠졌을 때다. 찾아가 한수 가르침을 청했을 때 스승은 말없이 피아노를 열었다.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난 소리의 공명을 접하고 제자는 처음 고개 숙이는 법부터 배웠다. 렛슨비는 없었다.
“내가 조율을 혼자 익혔기 때문에, 몰라서 애끓는 심정을 너무 잘 알죠. 돈 받고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대가들의 예리한 주문을 말 그대로 ‘조율’하는 스승은 늘 배우는 자세지만, 쉽게 기죽지도 않았다. 피아니스트 미켈레 캄파넬라는 자신의 전속 조율사가 못 오게 되자 불안해하다 이종열씨의 조율이 끝난 뒤 “다음엔 따로 조율사를 데려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3장짜리 팩스까지 보내며 까탈스럽게 음색을 주문한 조지 윈스턴도 결과에 대만족이었다. 그 자신 훌륭한 조율사인 크리스티앙 짐머만은 연주 뒤 관객 앞에 서서 “완벽한 조율을 해준 미스터 리에게 감사한다”고 전했다. 그 날 2600여명의 관객들이 보낸 우레 같은 박수는 연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늘 무대 뒤에서 애태우며 기다리는 조율사의 인생을 보상받은 기분이었죠.” 함께 가슴을 졸이던 제자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처음 가름침 정했을 때 말없이 피아노 열어 보여 주고 국내파 홀대에 유학 권한 스승 거장들도 감동시킨 스승에게 배울 게 더 많다며 눌러앉은 제자 소리없이 함께 화음의 길 17년
요즘 많은 조율사들이 튜닝기를 쓰지만, 스승 이씨는 귀로 음정과 음색을 고른다. 연주자의 연주 기법과 음색을 며칠 내내 고민하고, 공연장 구조와 음향까지 체크한다. 일상에서도 술과 유흥을 멀리 하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채 소리를 찾으라는 가르침을 몸소 보여준다. 조율사가 잡생각을 하면 맨 먼저 피아노가 알고, 연주자가 알고, 관객이 알게 된다. “조율사란 단순히 피아노를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어루만지는 예술가”라고 스승은 말했다.
제자 이씨도 그 모습을 그대로 좇아왔다. 스승은 “누굴 만나 정치할 생각일랑 말고 원칙적으로 승부하라”고 자주 일렀다. 깐깐한 음악전공자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일감이 부쩍 늘어난 제자 이씨는 스스로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한다”고 말한다. 잘난 척이 아니라 진짜 자부심이다. 우리나라 3000여명의 조율사 가운데 100여명 남짓 되는 여자 조율사로 최고가 되는 길은 오로지 공부와 열정뿐이었다.
스승이 또 한가지 바라는 바는 다양한 음색을 받아 안을 그릇을 키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방법만 고집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렇게 조율하지만, 너는 다를 수 있다”고 여지를 남긴다. 국내파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 우리나라의 풍토에 좌절할까봐 스승이 언젠가 유학을 권했을 때도 제자는 도리질쳤다. “아직 배우지 못한 게 너무 많은 걸요!”
공연장은 이들의 전쟁터다. 피아노는 늘 가파른 산맥이다. 그들에겐 언제나 최고의 연주를 위한 최소의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다. 곧이어 연주자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리허설을 하러 들어올 것이다. 피아노의 뚜껑을 닫으며 스승이 말했다.
“이 나이에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그러겠죠. 조율은 예술이고, 예술엔 끝이 없습니다. 단지 제자들이 어서 빨리 나를 넘어서면 좋겠는데.”
공연장을 떠나며 피아노에 앉은 먼지 한올까지 털어내는 스승의 뒷모습을, 제자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소리 없이 만들어낸 그들의 화음이 이제 공연장을 울릴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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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음색을 설명하는 이종열씨. 그의 귀는 살아있는 소리굽쇠요 튜닝기다.
“풍금 고치다 홀로 터득한 소리의 길”
전주에서 태어난 이종열 조율사에게 ‘소리’의 길을 열어준 이는 조부였다. 한학을 공부하는 선비였던 조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대나무를 베어 단소를 직접 만들어 불 정도로 풍류를 즐겼다. 그 역시 할아버지에게서 귀동냥으로 시조를 배우고, 단소 만들기를 어깨 너머로 익혔다. 나중엔 11개의 구멍을 뚫어 12음계 대나무 피리까지 만들어 불 정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조율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탁발승이 “너는 나중에 소리 나는 직업을 갖겠구나” 했을 때도 그 얘길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왔다. 한 친척의 강권으로 우연히 교회에 들렀다 풍금을 만난 뒤 독학으로 풍금을 배웠다. 잠자는 시간 빼고는 오로지 풍금 연주에 매달려 위장병을 얻을 정도였다. 낡은 풍금을 뜯고 조율을 시작했다가 엉망이 돼 독학으로 조율을 익히기 시작했다. 피아노 조율책을 찾다 일본에서 주문해 구한 뒤에는 책을 읽으려고 일본어부터 독학했다. 책을 번역해 읽고 또 읽었다.
피아노가 국내에서 생산되기 시작한 20대 중반에 서울로 온 그는 수도피아노 성수동 공장을 거쳐 삼익 피아노 영업부에서 조율을 맡았다.
1971년 독립한 뒤엔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먼저 실력을 인정받아 국내 주요 공연장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조율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길 바란다.
“박수는 늘 연주자의 몫이지만 그 음악 속에는 변함 없이 조율사의 피땀이 녹아있음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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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