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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자연에 살림 차린 ‘화가와 명상가’

등록 2006-07-11 18:55수정 2006-07-12 14:59

청원의 산골짜기 벌랏마을의 낡은 오두막에서 이종국·경옥씨 부부가 아들 선우와 함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청원의 산골짜기 벌랏마을의 낡은 오두막에서 이종국·경옥씨 부부가 아들 선우와 함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도시 떠나 충청도 두메살이
이종국씨 부부 /

충북 청원 청남대를 지나 양의 창자처럼 굽은 숲 속 외길을 돌고 돌아 또 돌면 더 가려야 갈 수 없는 막바지에 벌랏마을이 있다. 육지 속의 섬이나 다름없는 곳. 문의면 소재지에서도 50리나 더 들어가야 하는 두메다.

이런 산골로 접어들면 도시인들은 한순간 세속사를 벗어나는 듯한 해탈을 느끼지만, 만약 이런 곳에서 1~ 2년, 아니 평생 동안 살라면 두려움부터 앞서기 마련이다.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간단 말인가. 친구도 없을 텐데 외롭지 않을까. 대형 할인점도 없고 시장도 없고 구멍가게조차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축복보다는 부족한 것부터 셈하기 때문이다.

이종국(43)씨는 그런 두메에서 10년을 넘기고 있다. 이제 토박이나 다름없는 벌랏마을 사람이 된 그는 걱정부터 앞세우는 사람들에게 “죽을 때까지 먹고 써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풍요롭다”고 말한다. 식사 시간을 앞두고 그는 낫을 들고 집 뒷산에 올라가더니 20여분 만에 나물을 바구니 가득 담아 내려왔다. 깊은 산에 혼자 버려져도 살아갈 수 있는 ‘산귀신’답다.

그는 괴산의 산골 출신이긴 하지만, 청주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청주 시내에서 미대 입시학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삶은 꿈도 꾸지 않았다. 입시학원 경쟁에서 이겨 돈도 벌 만큼 벌어보았다. 그러나 ‘그림’보다는 ‘입시’ 자체에만 매달리는 환경에 신물이 난 그는 학원을 때려치우고 경기도 안성에 있는 무용가 홍신자씨의 ‘웃는돌 명상캠프’에서 1년반 가량 명상센터를 지으며 보냈다. 특히 그곳에서 호박을 키웠던 그는 알맞은 토양과 온도와 습도를 만난 호박만이 생명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런 자리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새로운 결단은 두려움을 수반하기 마련이지만 이씨의 실험정신은 그를 최고 오지라는 강원도 정선의 산골로 이끌었다.

‘과연 이런 곳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화두를 안고 벌랏마을에 오기 전 1년 반 가량을 전기도 전화도 없는 정선의 외딴집에서 홀로 살았다.

“누구나 다 그런 환경에 처하면 살아가게 돼 있어요.”


산의 온갖 풀들과 버섯들을 먹고 토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이것이 모두 야생을 회복하는 학습 과정이라고 여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산토끼들이 먼저 시식한 풀은 먹어도 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서진 집을 새로 짓느라 몸이 탈진해 갑자기 고기 생각이 간절해진 순간 바로 옆에서 매가 ‘푸드덕’ 하고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가보니, 매가 머리만 뜯어먹은 꿩이 있었고, 그는 그 꿩을 끓여 국물을 한달 내 먹으며 원기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종국씨가 나무와 철사로 만든 작품을 토담집 벽에 걸어 놓았다
이종국씨가 나무와 철사로 만든 작품을 토담집 벽에 걸어 놓았다
“자연에 살던 옛사람들은 오감이 열려 예지력이 있었지요.”

그가 이곳에 토속박물관 같은 집을 가꾸며 자연 속에 살아가는 것도 물질문명에 정신이 팔린 현대인들과 달리 오감이 열려 있던 옛사람들의 예지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화가이자 목수로 일을 맡아 이곳저곳을 누벼야 할 때가 적지 않은 그지만 흔한 휴대폰 하나 없다. 편리함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에게 이씨의 신념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그는 물질문명보다 인간의 예지를 더 믿는 쪽이다.

“(휴대폰이 없어도)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게 돼 있거든요.”

이종국씨는 닥나무를 두들겨 만든 종이에 야생화들을 그려넣어 독특한 질감의 예술작품을 실험하고 있다.
이종국씨는 닥나무를 두들겨 만든 종이에 야생화들을 그려넣어 독특한 질감의 예술작품을 실험하고 있다.

■ 아궁이 때는 토종 열정, 한지 예술촌 불 지펴요 ■

벌랏마을 이종국·이경옥 부부 만남과 삶 /

벌랏마을은 요즘 모처럼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로 흥이 났다. 이 마을에 15년 만에 아기 울음을 선사한 이들이 이종국·이경옥(44)씨 부부다. 종국씨는 수백년 전 보부상이나 중인들이 쓰던 건을 머리에 쓰고 살아갈 만큼 토종인 데 반해 경옥씨는 20대 초반부터 인도 등 세계를 다니면서 요가와 명상을 배우며 의식개발 프로그램인 ‘아봐타 코스’를 교육해온 아봐타 마스터이자 명상가다.

경옥씨가 스승과 진리를 찾아 넓은 세상으로 나간 사이 종국씨는 더욱더 ‘우리 것’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던 셈이다.

종국씨도 한때 외국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정선 두메산골에서 홀로 살 때 아우라지 장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서던 중 강가에서 본 광경이 그를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그때 그는 안갯속에서 강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물은 흐른다’는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무와 산, 인간 등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달리 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사물의 본질을 멀리 여행을 통해 찾을 일이 아니라 주변을 다른 관점에서 봄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가 유학을 포기하고 이 마을에 정착해 낡은 옛집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옛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은 선인들의 의식주와 삶 속에 진리가 모두 완비돼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처럼 의식주와 떠나 있는 듯 깨끗한 명상홀에서 고상한 음악을 들으며 명상을 하던 경옥씨에게 온갖 옛 잡동사니가 발에 차이는 낡디낡은 옛집의 삶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종국씨가 손재주 좋은 목수이긴 하지만, 옛집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데다 현대식 장롱이나 서랍장, 싱크대는 반입 금지이니 현대 여성이 살기엔 녹록지 않은 집인 것이다.

그러나 종국씨의 믿음대로 만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일까. 경옥씨는 5년 전 서울의 명상센터를 방문했다가 아주 영적인 분위기로 꾸며진 인테리어에 마음이 끌렸다. 누가 이 인테리어를 했느냐는 물음에 원장은 산골 노총각이라고 했다.

그 뒤 속리산으로 명상을 할 만한 집을 물색하러 가던 경옥씨는 누군가로부터 대청호 산골의 노총각 집을 들러보자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가 바로 그때 궁금했던 사람인 것만 같은 느낌에 선뜻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종국씨를 만난 경옥씨가 이 두메마을 옛집에서 살겠다고 했을 때 부모 형제들은 “정 시골서 살고 싶으면 좀 더 편리한 곳에 집을 구해주겠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인도를 오가던 명상가였던 이경옥씨는 벌랏마을에 정착해 한지체험 방문객들에게 명상을 가르친다.(왼쪽사진) 집 바로 뒷산에서 나물을 채취하는 이종국씨는 자연의 예지력을 체험하며 삶의 예술화를 꿈꾸며 산다. (오른쪽사진)
인도를 오가던 명상가였던 이경옥씨는 벌랏마을에 정착해 한지체험 방문객들에게 명상을 가르친다.(왼쪽사진) 집 바로 뒷산에서 나물을 채취하는 이종국씨는 자연의 예지력을 체험하며 삶의 예술화를 꿈꾸며 산다. (오른쪽사진)

두건 쓰고 낫질하는 산골총각에 진리 찾아 떠돌던 명상가 찾아와…
필연인듯 아이 낳고 알콩달콩, 자연의 안식 세상과 나눌 채비

그런데도 서울토박이인 그는 이 두메에 정착했고, 지난해 초엔 결혼식도 올렸다. 그러나 서울 깍쟁이에게 이런 시골살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겨울엔 한밤중에 화장실을 한 번 갈래도 두꺼운 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그런데 방문 밖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것을 보고 마음조차 하얗게 되고, 화장실에서 나와 우연히 바라본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것을 본 순간 그 축복을 무엇에도 견줄 수 없었다.

한 후배는 외양간을 개조한 부엌에서 살림을 하고 쑥으로 모깃불을 피우며 살아가는 그를 보고, “우리 어머니가 가장 벗어나고 싶은 게 이런 삶이었다”며 “그런데 언니는 뭐가 그리 당당하냐”고 했다. 그러나 경옥씨는 “이제 짜여진 공간에서 변화 없이 살아가는 도시의 아파트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몸은 불편할지 모르지만, 자연 속의 삶은 명상하려 애쓸 필요가 없이 저절로 명상이 일어날 만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란다.

변한 것은 경옥씨만이 아니다. 명상가들이 현실도피적이고 관념적이라며 무시하기만 했던 종국씨도 경옥씨의 영향으로 아봐타를 하면서 ‘옛것이 진리’라는 것도 자신의 신념이며, 다른 사람들은 다른 신념,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생각이 넓어졌다.

그리고 외국인들을 이 두메 마을로 초청해 교유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이 두메 사람들끼리만 돌던 ‘마실’의 문화를 더 넓은 세계로 확장하려는 것이다. 또한 오감이 열린 시골사람들이 별다른 생각 없이 빚어낸 삶의 부산물들을 예술품들과 함께 전시도 할 생각이다. 토종과 명상가의 인연을 계기로 두메 사람들이 예술가로, 두메 마을이 예술품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지체험위원장인 이종국씨는 화가이자 목수 감각을 살려 직접 기른 닥나무 줄기로 한지등을 비롯한 공예품을 개발하고 있다.
한지체험위원장인 이종국씨는 화가이자 목수 감각을 살려 직접 기른 닥나무 줄기로 한지등을 비롯한 공예품을 개발하고 있다.

되살린 한지공예 체험 발길 북적

벌랏마을에 불어온 변화

벌랏마을은 1980년 대청호가 만들어지면서 차 한대 다닐 수 있는 외길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룻배로 강을 건너 대전 쪽으로 나가야 했던 육지 속의 섬이었다. 하지만 골짜기마다 밭이 많아 ‘벌랏’이라 불렸고, 감나무가 지천이었다. 또 70년대까지만 해도 한지를 만들어 팔았다. 그래서 두메 중 두메였음에도 보리로 천 냥, 감으로 천 냥, 한지로 천 냥씩을 벌어서 가구당 3천 냥을 벌 정도로 부촌이었다. 그러나 30여년 전부터 새마을운동과 주택 개량으로 한지 수요가 없어지고, 감과 보리도 수지가 맞지 않으면서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갔다. 그래서 67가구였던 마을은 27가구로 줄었다.

그런데 10년 전 종국씨가 찾아오고, 그 뒤 경옥씨와 인연이 있는 박공산씨 부부와 야생화를 키우는 이동고씨가 함께하면서 마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들이 심귀환(57) 이장을 도우면서 벌랏마을은 올해 초 한지체험마을이 되었다.

지난 6일에도 경기도 양주 농촌지도소의 안내로 1박2일 동안 이 마을 체험에 나선 70여명의 여성들이 북적거려 이 두메 마을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한지체험위원장인 종국씨는 이미 몇 년 전부터 2천여평에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를 심으며 이를 준비해왔다.

종국씨의 실험정신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그는 닥나무로 한지를 만드는 데 머물지 않는다. 닥나무 줄기와 한지로 부채와 등, 모자를 만드는가 하면 닥나무를 두들겨 가죽 같은 느낌이 나는 책 표지도 만들어냈다. 또 그가 둘러맨 머플러는 한지다. 마치 실크처럼 부드럽다. 한지 머플러가 더러워지면 감물 염색을 해서 더 쓸 수 있다고 한다. 또 그는 그림을 그릴 때도 인공 염료 대신 닥나무를 물에 담가서 나오는 닥풀을 사용한다. 심은 닥나무로 만든 한지에 뒷산의 야생화를 닥풀로 그려넣으니 그야말로 그의 작품은 완전한 토종인 셈이다.

화가와 목수에다 한지공예 연구가가 된 종국씨의 손이 빚어낸 작품들을 보면 우리가 간과한 사물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수백년 동안 고립돼 있던 마을도 얼마든지 세상과 잘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리잡을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043)222-5808.

청원/글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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