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당신은 의사로서 안성맞춤입니다

등록 2005-03-30 17:51수정 2005-03-30 17:51

안성의료생협
권성실·이인동씨 부부

“어떡해! 본인은 병명을 모르고 계신 거예요?”

경기도 안성 우리생협의원 권성실 원장(43·여)은 양미간을 찌푸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 서있던 이인동 원장(45·안성 농민의원 원장)의 얼굴에도 애석한 빛이 역력했다. 암에 걸린 가족 문제를 상의하느라 병원에 들른 농민은 “어쩌긴요, 운명이려니 해야지요”라며 애써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의사들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권위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한 식구’였다. 뭇 병원과 다르게 이곳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병원의 주인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의사와 환자는 한 동네에서 살며 같은 공기, 같은 물을 마시고 사는 생활공동체의 식구들이다. 생명을 살리는 이는 의사 혼자만도 아니고, 건강은 약과 주사로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언제나 운동과 섭생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이들은 거기서 더 나간다. 환자들의 손을 끌어 함께 운동을 하기도 하고, 고장의 물과 공기 그리고 자연을 지키려고 팔을 걷어부치기도 한다.

권성실·이인동 원장 부부는 환자들을 진료만 하는 게 아니다. 환자들과 ‘함께’ 삶을 산다. 두 사람은 도시의 큰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지냈지만 굳이 도시에서 병원을 열지 않았다. 병원의 수익성을 고민하는 대신 “의사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어떤 의사가 제대로 된 의사일까” 골똘히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거니와 요즘도 서울에서 ‘잘 나가는 의사 친구’들이 많지만 둘은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월급? 그런 친구들보다는 훨씬 적다. 의사로서 많이 버는 수준은 아니지만 부족하지도 않다.

“그런 친구들은 안 만나요. (웃음) 우리가 훨씬 더 행복하죠. 지역사회와 분리된 삶에는 뿌리가 없거든요. 저희에겐 돈으로 견줄 수 없는 풍성함이 있어요.”

권 원장의 말이다. 20대 초반부터 이들은 대안적 삶에 관심이 많았다. 87년부터 연세대 의대 기독학생회 농촌봉사활동을 하면서 농촌에 애정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아예 이곳에 눌러앉아버렸다. 민중신학과 생명사상을 함께 공부하던 두 사람은 그 시절의 386세대가 대체로 그러했듯 자본주의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90년대 공동체를 꿈꾸던 이들의 필독서인 <몬드라곤에서 배우자>가 이들의 ‘교과서’였다. 협동조합은 인간의 소외를 낳는 자본주의의 질병을 극복할 삶의 방식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의사는 대단히 권위적이었어요. 의사나 환자 모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진료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구조가 의료생협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중신학·생명을 공부하던 두사람 농활 하던 곳 아예 눌러앉았다
자본주의 질병‘인간소외’치유 뜻…공동체라는 꿈 오늘도 처방전
지역 환경살리기에도 늘 함께

두 사람과 “꿈이 맞는” 농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이 힘을 모아 94년 처음 ‘농민의원’의 간판을 내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생활협동조합이었다. 서로 정을 주고 받는 재미도 쏠쏠하다. 98년 농민의원이 이전을 할 때는 조합원들 20~30명이 직접 용달차를 끌고 와 서너시간만에 이삿짐을 모두 옮겨주었다. 권 원장은 지금도 그 때를 되새기며 “감동의 파노라마였다”고 한다. 의사는 행복하다. 조합원들도 행복하다. 물론 불행할 때도 있었다. 조합원 사이의 갈등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조합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을 넘어 이제 안성의료생협은 한두사람이 빠져도 끄덕없이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덕분에 이 생협은 지역보건의료활동을 펼치는 가장 모범적인 국내 사례로 손꼽힌다.

이 의사 부부의 활동은 비단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95년 생긴 안성천살리기시민모임에서 지금까지 두 사람은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는 안성의 젖줄인 안성천에 대한 환경생태탐사활동부터 정책제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살림’의 문화를 지역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만드는 곳이다. 단체가 97년부터 벌여온 안성 쓰레기소각장 건설 반대운동을 하면서 재작년 이 원장은 휴가를 내고 단식에 참가했다. 지역을 사랑하고, 지역의 농산물을 사랑하고, 지역의 이웃을 사랑하다보니 자연 생태계의 질서와 숨쉬는 공기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셈이다. 그는 “정치도, 돈도 모르지만 무엇이 옳은 일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그 희망을 쫓아갈 뿐”이라고 했다. 쓰레기 퇴비화시설을 만드는 대신 다이옥신이 발생하는 소각장 건립에 나선 시 당국의 정책에 맞서면서 그는 글을 남겼다.

“제가 사는 동안 수많은 쓰레기를 만든 나의 삶을 반성하고 그로 인해 신음하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향한 분노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국 소각시설은 지어졌지만 비닐과 플라스틱 소각을 줄이는 방법에 대한 협상을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보개면 주민들은 수백일간의 ‘소복 시위’를 하고 비닐과 생활쓰레기를 태우던 드럼통을 스스로 반납하는 운동을 펼쳤다. 힘든 싸움이었지만 공동체의 삶터를 일구는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의료생협 운동도, 지역살림 운동도 모두 한 몸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들의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앞으로 이곳에서 생명, 노동, 영성 3가지 테마를 아우르는 지역 공동체를 만들려고 준비중이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에너지를 지열이나 태양열 시스템으로 하고, 생태 건축으로 삶터를 만드는 사업이죠. 그냥 사회운동하다가, 자본주의 틀속에서 싸우다 지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서 좀더 행복하게 살아보려고요.”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의료생협은 지역주민들이 스스로의 건강과 관련한 모든 생활의 문제를 다루려고 조직한 주민자발 협동조합이다. 의료생협이 발달된 일본에서는 의료생협수가 137개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 인천, 대전, 안성, 안산, 원주, 전주 등에서 의료생협이 활동중이다.


안성의료생협

1994년 만든 국내 최초 의료생협…창출이익 모두 조합원에 되돌려줘

우리나라 생협의 시초인 안성의료생협은 지난 94년 처음 문을 열어 의료진과 조합원들의 공동 출자로 만들어졌다. 처음엔 의료진 20여명을 포함해 309명이 출자해 1억2천여만원의 종잣돈을 모았다. 현재 안성 의료생협의 연간 수입은 종잣돈의 10배가 훨씬 넘는다. 협동조합의 운영 원칙에 따라 수입과 지출합계를 맞춰 수지차액을 0원으로 잡는다. 창출되는 이익의 모든 것을 조합원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인 셈이다. 의료진은 양방의사 3명, 한의사 3명, 치과의사 1명까지 모두 7명이다. 현재 조합원 수는 1960세대 6576 가구원으로 안성전체 인구의 4%가 조합원일 만큼 규모도 커졌다.

‘농민의원’이라는 의료생협 최초의 간판 그대로 병원의 주인은 실제로 농민들이다. 운영부터 회계감사까지 모두 조합원들의 손을 거친다. 조합의 회계는 1원짜리까지 투명하게 공개되며 감사 보고, 자원봉사자 운영, 잉여금 처분에 관한 사항도 일일이 조합원들의 결정을 거친다.

이곳에서 모든 일은 조합원들이 각자 알아서 한다. 마을 단위 노인들을 상대로 건강체크를 나갈 때도 조합원들은 손수 플래카드를 노인정에 걸어놓고 며칠 전부터 홍보를 하고, 주변 노인들에게 건강체크일시를 일러준다. 자원봉사도 조합원들의 몫이다. 중풍환자들을 돌보거나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집고치기 사업도 벌인다. 어린이 건강검진, 고위험군 환자관리, 건강걷기 운동 교육, 먹거리문제 모임, 대안생리대 만들기까지 동네 의원이 지역주민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의료생협연대 http://medcoop.or.kr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