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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람은 하늘이니 아내도 하늘이다

등록 2005-04-06 18:42수정 2005-04-06 18:42



동학 재야학자 팔순 표영삼씨의 ‘섬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 곰산 앞 전원마을인 점말부락. 표영삼(80)씨 집 거실 겸 부엌 탁자에 앉자 표씨가 자연스레 물을 끓여 커피를 타준다. 며느리나 손자의 시중이나 받을 법한 노인의 손놀림이 날래다.

천방지축인 여덟 마리의 애완견과 놀던 표씨의 아내 오미경씨(72)는 어느새 텃밭을 멘다. 손님이 오든 가든 도무지 상관치 않는 눈치다. 남편의 손님을 대접할 형편이 안 되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라도 접대하는 게 최고의 여인상으로 교육받고 자랐을 법한 노부인의 행동 치곤 유별나다.

잠시 뒤 사진을 찍으려 오씨를 찾았더니 오씨는 보이지 않았다. 골짜기로 산책을 갔다가 오후 늦게야 돌아올 것이란다.

“아니, 점심은 안 드시나요?”

“집사람은 아침만 잡수고, 점심은 안 잡수지요.”

그 부인의 행동만큼이나 아내에 대한 표씨의 어법이 더욱 ‘가관’이다. 남녀 평등을 지나 ‘여성 상위 시대’라는 요즘도 아내가 남편에게 ‘잡수세요’란 말을 쓰는 경우는 있어도,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경어를 쓰는 집은 보기 어렵다. 그러나 표씨는 50년 넘게 살아온 아내에게 이렇게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표씨가 ‘공처가’이기 때문일까. 표씨가 애초부터 아내에게 “진지 잡수세요”라고 했던 것은 아니다. 평생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한울이다)을 표방하는 ‘동학’(천도교)을 탐구해온 그는 ‘아는 데’ 머무르지 않고, 아는 것을 실천해 보고 싶었다.

그에겐 일찍이 아는 것을 몸소 실천했던 ‘선생’이 있었다. 같은 동학도였던 소파 방정환보다 먼저 어린이운동을 시작했고, 1920년에 발행됐던 종합잡지 <개벽>의 편집국장이던 김기전 선생이었다. 표씨와 같은 평안도 구성이 고향인 김 선생은 아내만이 아니라 어린 자녀들에게도 존댓말을 썼다.

‘개벽’ 편집장 김기전 선생 본받아
쉰 넘어 인내천 사상 몸소 실천
“여보 진지 잡수세요” 말 10년 걸려
남편 손님 아내가 접대하는 법 없어
서로 공경하는 손길, 부부는 행복

50살이 넘어 동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자신도 김 선생처럼 실행할 것을 다짐했지만, 한 번 들인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그 뒤에도 아내에게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이 스스럼 없이 나오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동학의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한울처럼 섬긴다)의 실천은 존댓말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51살이 된 외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내는 자신의 출근과 아들의 등교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늦잠이나 자는 게 미안해 아침식사 준비에 나섰다. 그 때부터 아침 당번은 표씨가 했고, 10여년 전부터는 아예 모든 식사를 그가 도맡아 하고 그의 아내는 저녁식사 뒤 설거지만 한다. 표씨가 외부 강연 등으로 집을 비울 때면 부엌살림에 어두운 아내가 아예 밥을 해먹지 않는 경우도 있어 표씨는 걱정이 될 정도다.

표씨가 빵과 샐러드로 아침마다 내놓는 밥상은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무색케 할 정도다. 빵은 우리 밀 통밀가루로 두 차례에 걸친 8시간의 발효를 거친 뒤 증기로 쪄서 식사 때마다 보기 좋게 썰어놓고, 샐러드는 케일과 피망, 오이, 양배추, 양상추, 사과 등을 살짝 기름에 데친 당근과 약간 볶은 양파에 꿀을 버무려 내놓는다. 북엇국과 시래깃국, 미역국, 배춧국, 곰국을 차례로 끓여 식힌 뒤 냉장고에 넣어두고 끼니때마다 먹을 만치 꺼내 데워 먹는 그의 세심한 손길은 보통의 주부들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다.



세 가족이 이렇게 훌륭한 밥상에 ‘함께’하며 행복을 나누지만, 개인적인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다. 표씨에게 온 손님은 표씨가 상대하고, 아내는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처음 온 손님에겐 어색한 일일지 모르지만 이 집에선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주 손님을 맞고, 또 서재에서 글을 써야하는 자신을 아내가 온종일 뒷바라지해줘야한다는 것이 오히려 터무니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아내가 4년 전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매일처럼 골짜기 20여리길을 산책하며 야생화를 보러 다녀도 표씨는 불평하지 않는다. 표씨가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한 것처럼 아내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하나 뿐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미대를 나와 그림을 그리다 지금은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인 아들이 결혼적령기에 접어들자 결혼을 권유했지만 그가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뒤론 그의 삶을 존중해줄 뿐이다.

가족의 자유를 거북스런 마음으로 방조하는 게 아니라 존중하는 것이다. 그가 가족이 둘러앉아 웃으며 즐길 빵을 만들 밀가루를 반죽한다. 그 따사로운 손길을 통해 ’사람을 모시는‘ 그의 마음이 스며들고 있다. 양평/글·조연현 기자 cho@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모든 사람·사물 한울(天) 공경
동학사상 김지하·도올 경청도

표영삼씨는 ‘동학’의 대표적인 재야 학자다. 그는 ‘동학을 배운다’는 것보다 ‘동학을 산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한울’(天)을 학문의 대상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모든 사람과 사물을 한울로 공경하며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을 연 수운 최제우 선생의 깨달음은 한울과 지상, 너와 나라는 이중의 틀이 무너지고 일체가 한 생명이라는 자각이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여성과 아이도 남성이나 어른과 다름없는 한울이며, 천대받는 이들이나 훼손 되는 자연도 똑같은 한울이므로 공경하고, 경물(敬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의 도나 학문을 본으로 삼고 배우는 것)하며 우리나라 생명운동의 모태가 됐던 원주의 장일순 선생과도 교류했던 표씨는 “장 선생은 동학을 몸소 실천했던 분이고, 난 말만 할 뿐”이라고 겸허해 했다.

그러나 학력이라곤 지금의 초등학교엔 보통학교를 나온 게 전부지만, 김지하 시인과 도올 김용옥 교수 등 당대의 지성들이 그로부터 ‘동학’에 대해 경청하기도 했다. 도올은 표씨가 쓴 <수운의 삶과 생각 동학>이란 책의 서문에서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이 하라’고 한 수운 선생의 말씀만을 실천하고 살아온, 동학 일세대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마지막 빛줄기였다”고 표씨를 소개했다. 표씨는 또 김지하 시인의 도움으로 명동성당 안 전진상기념관에서 매주 한차례씩 동학을 강의하고 있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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