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에 그린 수채화…여든셋 즐거운 여정
한글 점자 창안자의 딸
남편은 소문난 양심의사
“누구든 삶을 대신할 수 없어”
여든 넘어서도 붓을 들고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한다
맏딸이 꺾어 들고온 라일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딸이 겸연쩍지 않을 정도로만 나무랐다.
“딸이 나이들더니 개성이 강해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라일락도 개성이 만만찮지. 꺾으면 안 펴. 흥, 내가 살까봐? 하면서 죽어버린다구.”
‘박정희 할머니 육아일기’ 유명
꽃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봄날 햇살처럼 빛난다. 수채화가 박정희(83)씨. 예순의 나이에 수채화가로 화단에 데뷔한 박씨는 인천 화평동에서 ‘평안 수채화의 집’을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 한글 점자 창안자 박두성 선생의 딸로 태어난 그는 ‘육아일기’를 써 유명해졌다. 4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낳아 기르며 썼던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는 지금까지도 아이 가진 엄마들에겐 교과서 같은 책이다. 그런 그가 최근 또다시 책을 펴냈다. <나의 수채화 인생>이란 제목의 책에 그는 자신이 평생 걸려 완성한 그림과 삶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번엔 적잖이 망설였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책을 펴내면서 또 (종이 낭비로) 나무만 죽이는 건 아닌가 싶은 마음 때문에.”
책장마다 정감 어린 수채화들이 넘쳐난다. ‘세상에 보고 느끼는 것이 모두 아름답고 과분할 만큼 행복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의 고백에서는 여느 젊은이 못지 않은 열정이 느껴진다. 재능이 많아 다섯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춤, 그림, 글, 요리, 바느질 모두 전문가 뺨치게 해내며 ‘팔방 미인’으로 살았던 그다.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그의 활기는 여전하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은 “적당히 괜찮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요 며칠 내내 잠만 자고 있는 남편의 건강은 다시 조금씩 나빠져가고 있다. 남편 유영호 박사는 인천에서도 이름날 정도로 양심적인 내과의사였다. 돈 버는 데보다 환자를 고치는 데 관심이 많아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고쳐줄 때도 많았다. 아내는 그를 가리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가슴에 낙인 찍은 사람”이라고 했다. 병원 문을 닫고 작년에 몸져누운 남편은 약한 치매가 온 데다 장례식을 준비할 정도로 고비를 맞았지만 위기를 넘겨 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다.
죽음이란 준엄함 부모에게 배워
“죽음이 얼마나 준엄한 순간인지. 그런 순간을 간호사 부르고 의사 부르고 그래야 하나. 저이도 병원 가서 호흡기 꽂고 그러지 말라고 했어. 남편도 나도 죽음의 그 순간이 대단한 구경거리야.”
그는 담담했다. 떠날 남편에 대한 아쉬움도, 사그라져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연민도 마음에 크게 자리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죽음의 준엄함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아버지 송암 박두성 선생은 펄펄 열이 끓고 맥박이 1분에 200번이나 뛰는데도 손님이 오면 “아, 괜찮습니다”하면서 점잖게 체면을 차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깨끗하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으며 자식들에게 임종의 기회를 주었다.
그림과 삶의 이야기, 책에 담아
남편도, 자신도 죽음이 가까이 와 입을 쫑긋 내밀지만 “그림도 더 그리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했다. 특히 장미를 그리러 강화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많다고 했다. 몇 년 전 이웃 사람이 집을 고쳐 지으며 꽃밭에 심은 장미를 캐내 버리려고 할 때 그는 뿌리가 다치지 않게 둬달라고 부탁했다가 친척네에 옮겨심었다. 장미 나무는 죽을 성싶더니 몇 년 새 울창한 가지를 뻗더라고 했다. 나날이 번성하는 장미와 달리 남편은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다.
“적당히 시들어져가는 거 같아. 저 양반(남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종말이 오는 거를 기록으로 잡아놔야겠다 그래. 저 양반이 가는 것도 구경거리고, 나의 죽음도 구경거리야.”
아팠다가도 그림만 그리면 싹 낫는다는 요즘에도 날마다 그림을 그린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기록으로 잡아두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쉼 없이 그림을 그려댄다. 하지만 그가 정작 주위와 나누고 싶었던 건 그림이 아니라 사랑인 듯했다. 30년 넘게 운영해온 그의 화실엔 남에게 홀대 받은 사람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붕어빵을 파는 아주머니, 공장 노동자, 주부, 학생 등 적잖은 이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지위고하나 재산유무와 상관없이 이 안에선 모두가 평등한 예술가였다.
그는 특히 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살라”고 강조했다. 분신 같은 자식이나 남편도 자신의 삶만은 대신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자신의 인생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들, 남편도 삶을 대신할 순 없어요. 나는 즐겁게 살았지. 하느님이 언제 올지 물으시면 그러겠어. 만사 오케이! 지금이 최곱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딸 유명애씨가 말하는 어머니
“모든 일을 즐겼어요…천재죠”
박정희씨는 192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결혼과 더불어 평양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피난와 인천에 뿌리를 내린 뒤 수십년 동안 시가와 친정 식구를 합쳐 20여명이 넘는 대가족 살림을 도맡았다. 전쟁 같은 대가족 살림을 하면서도 예술적 상상력으로 창의적 수채화를 그렸고, 독특한 육아법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양심적 내과의사인 남편이나 시각장애인을 위해 평생 봉사한 아버지 못잖게 남 돕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아 그림을 팔아 시각장애인을 돕기도 했다. 지난 97년에는 시각장애인들을 도운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박씨는 “육아일기는 그간 기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정도로 기록을 즐겼다. 사위가 환갑을 맞았을 때는 30년 전 딸이 사위를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를 적은 기록을 엮어 선물하기도 했다. 그의 기록들은 집안의 가보였다. 자녀의 이름을 딴 각각의 육아일기는 딸들의 혼수품 1호이자 보물이었다. 그림동화도 그렸다. 구식처럼 보이기는 해도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이야기는 미움과 시기심을 가르치잖아. 그런 것 안 가르쳐도 저절로 생깁디다. 그래서 직접 동화를 만들어줬지.”
집안을 건사한 뒤 예순의 나이에 정식 화단에 데뷔하고는 한국수채화협회 공모전에서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거머쥐었고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수채화가인 맏딸 유명애씨(진흥아트홀 관장)는 그의 ‘그림 선생’이자 동시에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 박씨를 ‘헌신적인 한국 어머니’로 보는 사람들의 눈과는 달리, 유씨는 어머니를 희생적인 분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는 인생을 연극을 하듯 즐겁게 산 분입니다. 전혀 포기가 안 되는 양반이란 말이죠. 어려움을 견디거나 스스로를 볶은 게 아니라 모든 일을 즐겼어요. 천재죠. 마르지 않는 창의의 샘을 지닌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천재가 아니겠어요?”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