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정육점 여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남편이 죽고 이 정육점을 혼자서 9년 동안 꾸려왔다. 이를 정리하고 나면 두 딸이야말로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밑천인 셈이다. 둘째야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첫째는 나이가 벌써 열여덟. 짐 정리를 돕든가 엄마 대신 가게를 보든가, 아니면 최소한 일찍 들어와서 엄마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할만도 한데 어쩌면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는지…. 큰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마자 여자는 수화기를 벽에다 집어던졌다. 애써 구해온 빈 상자도 내던졌다.
딸들의 책가방이 방 한쪽에 나란히 놓여있는 걸 보자 여자는 더 화가 났다. 책가방이 있는 걸 보면, 빈 상자를 구하러 잠깐 가게를 비운 사이에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이야기다. 결혼해서 저희들 둘을 낳고, 저희들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지금까지 살아온 이 사당동이 엄마한테는 고향이나 다름없다는 거, 이 정육점마저 내놓고 이웃 하나 없는 경기도 변두리로 쫓겨 가는 거, 이번 이사가 엄마한테는 살점을 도려내는 거나 다름없다는 거, 저희들도 짐작은 했을 것이다.
“이 꼴을 보고도 우동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뭐? 엄마도 포장마차로 오라고?”
여자는 이제는 자식이고 뭐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산단 말인가? 무얼 붙들고 살아가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여자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니들이 사람이냐?”
사당역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로, 엄마야 혼자 살려고 발버둥을 치든지 말든지 나 몰라라 하는 딸들이 우동을 먹고 있는 포장마차로 뛰어가 정육점 여자는 악이 받쳐서 소리쳤다.
“옛날에 가게 일 끝나면 아빠랑 엄마랑 여기 와서 맥주 한 잔씩 하던 거 생각나?”
큰 딸 미선이가 내민 맥주 한 잔에 그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 술이라도 마시고 소리라도 질러보자, 정육점 여자는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혼을 내주려고 두 딸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 서슬 퍼런 엄마의 눈에 둘째딸 미영이가 꾸러미를 내밀었다.
나침반이었다.
“엄마! 나침반은 항상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밤하늘의 북극성 같은 뜻이래. 엄마가 길 잃어버리면 우리가, 우리 둘이 엄마한테 북극성이 되어줄 거야….”
“이것들이 오늘 진짜….”
엄마 옆에 앉아 큰 딸은 엄마 앞에 놓인 빈 잔에 또 한 잔 그득하게 맥주를 따라 붓고 있었다.
이명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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