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내삶의 선물] 엄마의 나침반인 딸들

등록 2005-06-14 16:21수정 2005-06-14 16:21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정육점 여자는 전의를 상실했다.

남편이 죽고 이 정육점을 혼자서 9년 동안 꾸려왔다. 이를 정리하고 나면 두 딸이야말로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밑천인 셈이다. 둘째야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첫째는 나이가 벌써 열여덟. 짐 정리를 돕든가 엄마 대신 가게를 보든가, 아니면 최소한 일찍 들어와서 엄마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할만도 한데 어쩌면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는지…. 큰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자마자 여자는 수화기를 벽에다 집어던졌다. 애써 구해온 빈 상자도 내던졌다.

딸들의 책가방이 방 한쪽에 나란히 놓여있는 걸 보자 여자는 더 화가 났다. 책가방이 있는 걸 보면, 빈 상자를 구하러 잠깐 가게를 비운 사이에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이야기다. 결혼해서 저희들 둘을 낳고, 저희들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지금까지 살아온 이 사당동이 엄마한테는 고향이나 다름없다는 거, 이 정육점마저 내놓고 이웃 하나 없는 경기도 변두리로 쫓겨 가는 거, 이번 이사가 엄마한테는 살점을 도려내는 거나 다름없다는 거, 저희들도 짐작은 했을 것이다.

“이 꼴을 보고도 우동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뭐? 엄마도 포장마차로 오라고?”

여자는 이제는 자식이고 뭐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산단 말인가? 무얼 붙들고 살아가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여자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니들이 사람이냐?”

사당역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로, 엄마야 혼자 살려고 발버둥을 치든지 말든지 나 몰라라 하는 딸들이 우동을 먹고 있는 포장마차로 뛰어가 정육점 여자는 악이 받쳐서 소리쳤다.

“옛날에 가게 일 끝나면 아빠랑 엄마랑 여기 와서 맥주 한 잔씩 하던 거 생각나?”

큰 딸 미선이가 내민 맥주 한 잔에 그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 술이라도 마시고 소리라도 질러보자, 정육점 여자는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고, 혼을 내주려고 두 딸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 서슬 퍼런 엄마의 눈에 둘째딸 미영이가 꾸러미를 내밀었다.

나침반이었다.

“엄마! 나침반은 항상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밤하늘의 북극성 같은 뜻이래. 엄마가 길 잃어버리면 우리가, 우리 둘이 엄마한테 북극성이 되어줄 거야….”

“이것들이 오늘 진짜….”

엄마 옆에 앉아 큰 딸은 엄마 앞에 놓인 빈 잔에 또 한 잔 그득하게 맥주를 따라 붓고 있었다.

이명랑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