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경과 미라에게■ 이혼남과의 연애…전처 끼어드니 부담스러워요 질문: 저는 서른의 미혼 직장 여성입니다. 말이 좋아 미혼이지, 결혼식 올리고 1년 정도 동거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고 헤어짐도 깔끔했던 편이었어요. 심정적으로는 분명히 이혼녀인데 겉보기에는 미혼이라는 이상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요. 그런데 문제는 역시 ‘연애’였습니다. 이런저런 연애 경험이 산전수전 공중전 수준이다보니 저와 통할 만큼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를 우선 순위에 두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렇게 만난 남자가 지금 연애중인 이혼남입니다. 둘 다 결혼에 대한 희망이나 환상, 기대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상적인 연애였어요. 사랑하되 결혼하지 않는, 결혼 관계 같은 의무를 요구하거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그런데 그의 전부인이 다시 합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전부인이 맡아 키우던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그 때문에 혼자 살던 그가 갑자기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면서 문제가 구체화되었습니다. 저는 한 가족을 파괴하는 주범이고 싶지 않은 거죠. 가족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지만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모순이랄까요. 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고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지만 전 솔직히 불안하고 점점 이 연애가 내키지 않습니다.(솔로 예찬)
‘과거’ 문제 안삼을 것 같아 연애 많이한 남자 택했나요?
사랑은 충만-허탈·신뢰-의혹 등…다양한 감정 체험하는 과정
먼저 자기 존중감 키운 뒤 사랑의 용광로로 뛰어드세요 답변: 네, 문제는 역시 연애입니다.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똑똑한 여성들이 유독 연애 문제에서 쩔쩔 매는 것을 보는 일은 불가사의합니다. 사람 사이를 가볍게 건너다니며 표면적으로 이른바 ‘선수’처럼 보이는 이들이 실은 내면적으로 더 많이 불안하고 상처입는다는 사실은 안타깝습니다. 그런 방식을 ‘쿨하다’는 용어로 미화시키는 데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씁쓸합니다. 솔로 예찬 님이 연애 경험 많은 남자를 선택하는 이유가 혹시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지난 경험을 문제 삼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우선 자기 존중감을 키워야 합니다. 님은 ‘의무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부담없고 쿨한 관계를 맺기 위해 그런 사람을 선택하시는 모양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선 인식하셨으면 합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애착입니다. 애착의 감정은 결핍감을 불러옵니다. 사랑할 때 느끼는 모든 긍정적 감정들은 그 배면에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만과 허탈, 열망과 좌절, 신뢰와 의혹, 합일과 질투, 행복과 불안…. 사랑은 내면의 그 다양한 감정들을 두루 체험하는 일이며, 그 과정을 통해 자아가 확장되고 의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쿨한 사랑을 표방하는 이들은 그 부정적인 감정 영역을 회피하려 합니다. 사랑에 따르는 고통의 감정뿐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떠안지 않으려 합니다. 질투나 불안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관계를 외면하고, 사소한 장애 앞에서 뒷걸음질치면서 그 행위를 쿨하다고 포장합니다. 쿨한 태도의 심리적 배경은 회피 방어의식일 뿐입니다. 그 남자분께 “결혼하자”고 제안해 보세요. “쿨하지 못하게 왜 이래?” 하는 답변이 온다면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그를 가족에게 돌려보내세요. 혼자 남게 되면 되도록 빨리 새로운 남자를 구해왔던 예전의 방식을 버리고 한동안 분노와 상실감을 체험해 보세요. 옆에 남자가 있어야만 안정감을 느끼고, 남자의 사랑을 받을 때에만 자신이 가치있다고 느껴지는 연애 의존증도 점검해 보세요. 외로움이든 불안이든 비하감이든, 죽을 만큼 힘들더라도 세밀히 느껴보세요. 지금까지 그런 감정들을 회피하기 위해 쿨한 전투복을 입고 연애의 여러 전투에 참가했음을 기억하세요. 만약 “그래, 결혼하자”라는 대답이 오면 그와 함께 사랑이라는 이름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불안하고 내키지 않는다는 지금의 감정을 더 깊이 체험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지지고 볶는 다른 감정들도 충분히 경험하면서, 고통을 감당하고 책임과 의무를 떠안는 관계를 맺어보세요. 자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실존마저 느껴지지 않는 지점에서 자신이 어떻게 더 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지 지켜보세요.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남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솔로 예찬님의 내면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동안 외로움, 불안, 분노 같은 감정들을 회피해왔기 때문에 내면에 억압되어 있는 그것들이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폭발하려 합니다. 혼자 하든, 관계 속에서 하든, 전문가의 도움을 받든, 내면을 보살피고 경험을 의식화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든 작업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지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선 위 상황에서 가정을 파괴한 사람은 그 남자 부부이며, 자신은 다만 불필요한 죄의식 과잉 상태였음을 알게 됩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싫어하지도, 결혼이라는 말에서 불행감을 연상하지도 않게 됩니다. 혼자 있어도 편안하고 충만한 그 시간이 오면 연애의 우주전을 치른들 어떻겠습니까. 부디, 쿨하다는 명목으로 삶을 냉동 창고에 처박아두지 마세요. 김형경/소설가 『소설가 김형경씨와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박미라 편집위원이 지면으로 상담을 해드립니다. <인터넷한겨레> 행복한마을( http://happyvil.hani.co.kr )의 ‘형경과 미라에게’ 게시판이나 전자우편 sangdam@hani.co.kr으로 보내주십시오. 지면 상담을 꺼리시는 분들은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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