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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유물 포장도 예술이다”

등록 2005-07-12 18:18수정 2005-07-19 16:59

국보 다루는
‘인간 국보’ 김홍식씨

“함을 여세요.” 그가 지시하자 해서체 한자를 정성껏 새긴 옥판 묶음이 함 속에서 드러났다. 조선 임금의 존호와 송덕문을 새긴 옥책이다. 시골 아저씨처럼 후덕한 그의 눈이 일순 사냥꾼처럼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능숙한 손길로 옥판들 사이에서 원래 끼었던 옛 가림보를 빼고 쿠션형 완충판인 ‘듀퐁’을 끼운다. 옥판들이 서로 부딪혀 닳는 것을 막는 안전 장치다. 이제 옥판을 묶을 차례다. 옥판의 양 끝을 잡고 줄을 둘러 바싹 당긴 뒤 매듭을 치며 달아맨다. 다른 직원들이 어설프게 따라하자 불호령이 떨어진다. “어이! 유물 싸는 천을 그렇게 다루면 어떡하나! 그것도 문화재야! 잘 개켜놔야지. 매듭을 허술하게 매면 어떡해요. 유물포장도 예술이야. 멋지게 해야 유물에 좋다구.”

지난 1일 낮 서울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지하 작업실. 지난달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정년 퇴임한 유물포장 전문가 김홍식(60)씨는 경복궁 고궁 박물관으로 옮겨갈 소장 유물의 막바지 포장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전시관쪽 간청을 받고 4월부터 정년맞이 휴가조차 반납한 채 일해온 그로서는 홀가분하기도 하련만 표정이 왠지 어둡다. 100~300년 전 유물이 주종인데도 보존상태가 좋지않고, 경력이 얕은 유물 포장 관리 직원들의 손놀림은 여전히 미덥지 않은 눈치다. “포장·관리 전문가들이 없다보니 즉석에서 요령을 가르치는 게 또다른 일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물 포장에 관한 한 그는 국내 최고의 프로다. 국내 공사립 박물관은 물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해외 박물관에서도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올 정도로 이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로 통한다. 후배 학예사들은 그를 “국보를 가장 잘 다루는 인간 국보”라고 말한다. 국보의 가치는 역시 국보급 장인이 알아본다는 뜻일까. 그는 73년 박물관에 들어간 이래 줄곧 유물 관리부에서 붙박이로 유물들을 매만졌다. 덕수궁에서 지금의 경복궁 민속박물관, 헐린 옛 조선총독부,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잦았던 박물관의 이사 때 유물 포장의 주역이 그였다. 79년 미국의 한국 미술 5000년전, 90년대 미국 메트로폴리탄 한국관 개관전, 99년 독일 순회전, 2002월드컵 명보 일본 순회전 등 해외전도 대개 그의 손을 거쳤다.

박물관 지하 전시실서 32년간 유물만 매만져
굵직굵직한 해외전 대개 그의 손을 거쳤다
후배들 어설픈 손놀림엔 불호령 360도 거꾸로 뒤집더라도
탈이 없게끔 포장해야
지난달 중앙박물관 정년퇴임 “후배 양성 못해 아쉬워”

국보를 애인처럼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은 전문가로서는 행복한 경험이다. 우리 문화유산의 지보로 꼽히는 국보 78호와 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을 대한민국에서 그만큼 자주 안아보고 쓰다듬어본 이는 없다. 반가사유상을 관리하기 시작한 70년대 말 이래 백번 이상은 쓰다듬고 안고 했을 것이라는 그는 그 때의 대단한 희열을 잊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인생 황금기를 경복궁 앞 마당 지하 수장고에서 고독하게 보내야 했다.

“대개의 유물들은 사람으로 치면, 늙거나 병들어 죽기 직전에 있는 병자나 노인들입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무게가 100kg을 넘지만 그걸 제가 너끈히 안고 다녔던 것은 유물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재 포장은 오랜 경험과 숙련된 감각이 요구된다. 여러 형태의 유물들을 화학성분이 거의 없는 중성지와 완충재로 싼 뒤 특수 상자에 넣어 이송하지만, 충격에 약한 선사시대 토기나 청동기, 철기 등의 고대 금속유물, 도자기 등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충격에 약한 미세한 유물이나 모양이 독특한 조형물에 기울이는 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은선을 표면에 입힌 은입사 자기의 경우 바깥으로 미세하게 튀어나온 은선에 맞추기 위해 용기에 미세한 홈을 파서 집어넣기도 한다. 일본에서 순회한 월드컵 한국 명보전에 출품한 석가탑 출토 사리기의 경우 얇은 장식판을 고정시키기 위해 종이기둥과 종이줄이라는 기상천외한 장치를 고안하기도 했다.

“유물마다 중성지, 완충재는 물론, 특수제작된 상자를 짜는 것이 기본입니다. 360도 거꾸로 뒤집더라도 탈이 없게끔 포장하는 게 원칙이죠. 역대 해외 순회전에서 우리 유물 포장을 위임해본 적이 없고, 사고없이 무사히 유물들이 잘 돌아왔다는 것도 남들은 잘 모르는, 제 자부심이죠.”

그는 73년 임시직으로 박물관 인생을 시작했다. 대학 화학과를 다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중퇴하고, 돈을 벌어 다시 학업을 시작할 요량으로 고고부 유물담당관실에 들어갔다. 원래 유물포장에는 관심도 없던 그를 전문가의 길로 이끌어준 것은 당시 책임자였던 이난영 학예관(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유물카드 쓰는 법도 몰랐던 그는 혹독한 질책 앞에서 오기가 생겨 유물 포장과 관리 방식을 독학했다고 한다. “유물 관리 개념조차 없던 시기에 누군가는 해야 일이라는 생각에 매달렸지요. ”

김씨는 32년간 빠짐 없이 일기처럼 업무일지를 썼다. 유물 관리 포장 상황과 기획전의 실수 성과 등을 꼼꼼히 적은 일지는 캐비넷 2개를 꽉 채울 분량이었다고 하는데, 지난 연말 모두 분쇄기에 넣어버렸다. 일지 내용을 토대로 전문가 양성 제도를 제안해 보자는 마음에 공개도 생각했지만, 박물관쪽 허물만 드러낼 것 같아 고민 끝에 없앴다는 말이다. 시원섭섭했다는 김씨는 30년 근무하면서 박물관에 포장 전문가 양성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그 못다한 꿈을 앞으로 조계종 한국 불교유산 박물관의 성보 문화재 관리 전문가로 일하면서 펼쳐볼 참이라고 한다. 관리 사각지대로 방치되었던 사찰 성보 문화재의 보존 환경 개선을 통해 유물 관리의 중요성을 전파하겠다는 포부다. “유물포장·관리에 연관된 노하우를 후학들에게 차근차근 전수할 생각“이라는 그는 유물 관리·포장 등의 개설서도 구상하고 있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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