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한겨레>와 인터뷰하는 윤지영 변호사의 모습.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김효실 기자
“방송사들의 노동 인권 감수성이 매우 낮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가 지난 21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윤 변호사는 2010년 공감에 합류해 청소노동자, 골프장 캐디, 아파트 안내데스크 직원 등 불안정·취약 노동 관련 사건들을 맡아왔다. 노동 인권 보장을 위한 법·제도적 보호망에서 제외돼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대리해온 것이다.
윤 변호사는 지난해부터 방송계 취약노동 이슈에도 참여하고 있다. ‘시제이비(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 사망 사건’, ‘대전문화방송(MBC) 여성 비정규직 아나운서 성차별 채용 사건’, 드라마 제작 현장 스태프 장시간 노동 문제 제기 등을 지원했다. 그리고 지난 19일에는 <문화방송> 보도국에서 일했던 두 방송작가를 대리하여 ‘부당해고 구제 재심 판정 취소’ 소송에 보조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두 작가는 2011년부터 10년 가까이 생방송 아침 뉴스 프로그램의 일부 꼭지를 만들었는데, 계약 기간 6개월을 남겨두고 ‘프로그램 개편을 위한 인적 쇄신’을 이유로 해고됐다. 지난 3월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는 두 작가가 낸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받아들였는데, 방송작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판정이었다. 하지만 문화방송은 이러한 판정에 불복하며 중노위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두 작가는 소송 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는 당사자로서, 중노위의 편에서 보조참가를 하기로 선택했다.
지난 3월19일 중앙노동위원회 재심을 앞두고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가 연대 단체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 문화방송 사옥 앞에서 방송작가 부당해고 구제 및 근로자성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효실 기자
윤 변호사는 문화방송이 중노위 판정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소송전으로 이어진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노동자가 법원의 판결을 받기 위해 들여야 할 시간, 돈, 노력은 매우 크다”며 “노동위원회 제도는 노동자를 위해 신속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존재하는데, 엠비시가 중노위의 복직 명령을 지키지 않고 벌금(이행강제금)을 내면서까지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건 제도 취지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또한 이번 보도국 작가 사건을 둘러싼 문화방송의 대응이, 다른 ‘무늬만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문제 제기를 위축시키는 부정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봤다. 그는 “작가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앞으로 부당한 일을 겪어도 용기 내기가 더 어려워진다. 지방노동위원회, 중노위에 이어 법원까지 다섯번을 싸워야 하고, 그사이 복직조차 어렵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화방송 쪽은 “중노위 판정으로 복직시킨 뒤 소송에서 판정이 취소되면 또 다른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 있고, 중노위 판정이 두 작가를 어떤 형태의 근로자로 인정한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향후 법원 판결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문화방송은 대형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들을 법률대리인으로 선임했다.
2017년 11월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작가지부 조합원들이 직접 제작한 큐카드(대본 등이 적힌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방송계 취약노동에 대한 문제 제기는 수십년간 꾸준히 존재했다. 윤 변호사는 노동자 개인이 방송사 조직을 상대로 벌인 법정에서의 승소 결과가 이미 쌓일 만큼 쌓였다고 판단한다. 그는 2020년 ‘시제이비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 사망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유가족 추천 위원을 맡아서, 방송 제작 현장 프리랜서들의 노동자성 여부를 다투는 앞선 판결들을 정리한 바 있다. 이미 대법원은 2002년 <한국방송>(KBS) 드라마 외부제작 진행요원(FD)과 스크립터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고, 2010~2011년 한국방송의 영상취재요원(VJ), 문화방송의 프리랜서 피디가 실질적으로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서 일한 것과 같다고 판결했다. 윤 변호사는 “통상 근로자성을 다툴 때 증거 자료를 대부분 회사 쪽이 갖고 있어서 노동자가 불리한 편인데도, 생각보다 방송계 비정규직이 승소한 케이스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방송계 ‘무늬만 프리랜서’ 관행에는 별다른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윤 변호사는 “방송사들은 판례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보다는, 문제를 회피하려고 (소송 등을 활용해) 가능한 한 시간을 오래 끌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4월 방송사들이 모인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거리 캠페인. 고 이재학 피디 사건 대책위 제공
방송사들이 내부 취약노동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오래된 명분은, ‘방송 제작의 특수성’과 ‘프리랜서의 재량권 보장’이다. 윤 변호사는 “방송사뿐만 아니라 모든 회사가 업무 특성을 빌미로 프리랜서 인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법은 이러한 회사 주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며 “종속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노동력을 제공받았다면 회사는 사용자 책임을 져야 한다. 방송사라도 예외일 순 없다”고 말했다. 방송사들이 노동권 문제의 핵심에 답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윤 변호사는 또한 “‘방송의 특수성’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더 문제적인 경우도 있었다”며 “대전엠비시 아나운서 성차별 사건에서는 ‘여성 아나운서는 젊고 예뻐야 한다’는 게 방송사가 말하는 ‘특수성’이었다”고 덧붙였다. 방송사들이 오랜 관행이나 편견을 ‘특수성’으로 포장해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재학 피디 사건 대책위는 지난 1월27일 서울 상암동에서 1주기 추모 주간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고 이재학 피디 사건 대책위 제공
윤 변호사는 방송사들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적극적 개입을 촉구했다. 방송사들이 내부 문제도 방송으로 다뤄서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도 했다. “경비 노동자 문제 등 각종 비정규직 이슈를 공론화하는 데 방송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는 (방송) 보도가 거의 안 된다.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더딘 주요 이유가 방송사들의 외면 탓이 아닌가 싶다.”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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