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결혼은 사실상 국혼(國婚) 아님?”
지난 25일 김연아의 소속사 올댓스포츠는 “김연아가 오는 10월 하순 성악가 고우림과 화촉을 밝힌다”고 밝혔습니다.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커뮤니티 곳곳이 ‘주접’(유명인을 향한 애정을 과장되게 표현)으로 들썩였습니다. 그럴 만하죠. 김연아는 한국 피겨 역사는 물론 세계 피겨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레전드’ 선수니까요.
그런데 이 결혼소식이 공식화되는 과정에서 혹시 ‘찝찝함’을 느끼신 분 없으신가요? 저는 이날 오전 한 언론이 낸
‘[단독]‘피겨여왕’ 김연아 ♥ ‘팬텀싱어’ 고우림, 결혼 전제 ‘열애’’ 보도로 두 사람의 관계를 처음 접했는데요. 두 사람 몰래 찍은 것 같은 보도 사진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더군요.
해당 기사 안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습니다. “과거 열애설 보도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는 김연아 측에서 열애 관련 보도에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고”, “두 사람은 함께한 모습이 (카메라에) 찍힐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철저히 대비했다.” 두 사람이 이 같은 파파라치식 보도를 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해당 매체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같은 날 배포된 취재 후기에는 “무려 7개월 동안 (김연아의 결혼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그동안 평소 김연아의 일정을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7개월을 쫓아다녔다는 의미겠죠.
물론 언론은 당사자들이 바라지 않는 뉴스도 취재해서 보도합니다. 그 내용이 사생활이라도, 시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필요가 있는 공적 사안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되면 그렇게 합니다. 그럼 김연아의 열애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으로 알려져야 할 사안일까요?
누군가는 ‘김연아가 스포츠 스타라서 치러야 하는 유명세’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스포츠 셀럽(유명인)’이란 지위는 학계의 연구 대상일 정도로 논점이 복합적인 주제입니다. 스포츠사회학 연구자들은 스포츠 스타의 경우 다른 분야 셀럽과 달리 당사자들이 갈고닦은 실력으로 스포츠 대회에서 선전하면서 대중에게 더 신뢰감을 준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스포츠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모두 스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연구자들은 스포츠 셀럽의 탄생 경로는 다른 셀럽과 다소 다르더라도, 탄생 뒤 유지 과정은 다른 엔터테인먼트 영역의 셀럽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공통점이 언론·미디어에 재현되는 방식입니다.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 테니스 선수 안나 쿠르니코바처럼 선수로서의 업적보다 외모와 사생활 등 가십 거리가 집중 보도된다는 거죠.
국내 스포츠 셀럽 연구 가운데는 ‘김연아’가 제목에 들어간 논문이 다수 존재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김연아를 통해 본 스포츠 셀러브리티의 지위와 조건’(박보현·한승백, 2014) 논문은 2010년 2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3년 동안 김연아의 경기 전후 및 ‘공백기’의 언론 보도 7만9500여건을 분석했는데요. 연구 결과, 예상대로 김연아의 경기력, 성적, 대회준비 등과 같은 운동 영역 보도만큼이나 외모, 패션, 방송연예활동, 사회활동, 가십 등의 운동 바깥 영역을 둘러싼 보도가 계속 나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김연아의 경기 영상은 물론, 김연아를 둘러싼 가십성 보도에도 이미 익숙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런 보도를 즐기지는 않았다 할지라도요). 파파라치식으로 보도한 매체도 그러한 관성의 연속 선상에서 움직인 거로 볼 수도 있겠죠.
이쯤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국민 영웅’ 김연아조차 성별을 강조하는 젠더화된 보도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앞서 언급한 ‘단독’ 보도의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피겨여왕’ 김연아가 다섯 살 연하와 나이를 초월한 사랑에 빠졌다.” 만약 김연아가 남성이고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다섯 살 차이에 “나이를 초월한”이라는 표현을 붙였을까요?
소속사에서 공식 입장을 낸 뒤에는 다른 언론 보도도 쏟아졌는데요. 기사 제목에 “곰신”, “품절녀” 같은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곰신’은 고무신의 줄임말로, 군 복무 중인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품절녀’는 10여년 전에 등장한 신조어로, ‘이미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인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품절녀’든 ‘품절남’이든 사람을 상품 취급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앞서 열애 사실을 단독 보도한 매체의 취재 후기에는 이런 내용도 나옵니다. “김연아가 결혼을 안 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식이 부모보다 (피겨 스케이트) 더 훌륭해 세계적 스타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결혼의 목적이 임신·출산임을 전제한 건데요. 김연아가 임신·출산을 원하는지, 자신의 자녀가 피겨스케이팅 선수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고려는 보이지 않습니다.
김연아의 전공 분야가 아닌, 결혼소식을 다룬 보도들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연아가 현역 선수일 때부터 그의 능력이나 성과보다 외모, 사생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데 일조하는 보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김연아의 ‘긴 팔다리’가 피겨스케이팅에 도움되는 신체적 특성이라는 묘사까지는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김연아의 눈꺼풀에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요? 지난해 김연아가 참여한 한 잡지 화보에서 ‘무쌍’(쌍꺼풀 없는 눈)인 줄 알았던 얼굴에 쌍꺼풀이 눈에 띄자, 성형 의혹 보도가 쏟아졌는데요. 결국 김연아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쌍수(쌍꺼풀 수술) 안했어요”라는 글을 올려 성형설을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태수미(진경) 변호사가 등장하는 장면. 유튜브 갈무리
최근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를 보면서 작은 감탄을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극중 법무법인 ‘태산’의 전 대표인 태수미(진경)가 법정에 나타나자, 한 변호사가 이렇게 수군댑니다. “왜 왕이 직접 나왔어?”
주로 ‘여왕’이나 ‘여제’ 같은 표현을 접하다가, ‘여’(女)를 뗀 대사를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피겨여왕’이나 ‘피겨퀸’이란 표현도 달리 보이더라군요.
김연아 결혼소식이 알려진 뒤 한 트위터 글이 많은 누리꾼에게 공감을 얻었는데요. “국혼 축가 듣고 싶어/ 근데!!/ 파파라치는 싫어/ 하지만!!/ 웨딩화보도 궁금해/ 그러나!!/ 두 분이 싫다면 괜찮아/ 하우에버(However)!!/ 결혼식 하객 되고 싶어 미칠 거 같아/ 벗(But)!!/ 아무나 가서 결혼식 망치지 말고 둘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짜 내 마음은 뭘까?”
이런 양가감정, 저도 느꼈습니다. 김연아 결혼설 취재를 위해 7개월을 바친 매체 입장에서는 ‘대중의 관심이 큰 사안을 보도한다’는 명분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공식 발표하는 내용을 기다렸다가 보도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김연아의 경기영상을 보며 위로와 희망을 찾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당사자의 입장이 정리되기까지의 ‘기다림’ 정도는,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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