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7일 하마스의 공격을 받아 파괴된 이스라엘 남부 키부츠 크파르 아자의 모습. 크파르 아자/로이터 연합뉴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사망자가 1만명을 넘어섰다. 3일 기준 가자 지역에서 9061명, 이스라엘에서 14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어느덧 한 달째 출구 없는 수라장의 참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혼돈은 전쟁 관련 정보를 유통하는 공론장에도 번져 있다. 소셜미디어를 타고 퍼지는 허위정보와 늘 상존하는 오보의 가능성은 물론, 가장 밑바닥에서
보도 용어를 합의하는 일부터 불똥이 튄다.
가장 큰 곤욕을 치른 언론은 영국 비비시(BBC)다. 비비시는 지난달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이 있었던 날부터 줄곧 하마스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militants)”이라고 지칭해 왔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영국의 정치인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하마스는 테러 조직이니, 테러리스트라고 불러야 한다’며
공영방송을 압박했고, 결국 비비시는 지난달 21일 영국 유대인 이사회와 면담 뒤
표기 원칙을 철회했다.
비비시는 자체 편집 가이드라인을 통해 ‘테러리스트’라는 단어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보다 이해의 장벽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비비시의 국제뉴스 에디터인 존 심프슨은 지난달 11일 ‘테러리즘’은 도덕적 판단이 들어간 용어이고, “누구를 지지하고 비난할지 지시하는 일은
비비시의 역할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 원칙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상대로도 지켜졌다고 항변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프랑스노동총연맹(CGT)과 시민들이 지난 2일 프랑스 툴루즈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툴루즈/AFP 연합뉴스
미국 시엔엔(CNN)이나
폭스뉴스처럼 앵커의 입을 빌려 하마스를 테러 단체로 호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수 서방 언론은 테러리스트라는 말과 거리를 두려 노력한다. 테러리스트는 정치적인 규정이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중동 담당 부국장 셰인디 레이스는 “테러리즘에 관여하고 있지만 하마스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정치 조직”이라며 “저는 항상
상세한 맥락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비비시와 같은 이유로 자국 정치인들의 질타에 시달렸던 프랑스 아에프페(AFP)도 지난달 28일 “우리는 편견 없이 사실을 보도한다는 사명에 따라 운동·개인·단체를 테러리스트로 묘사하지 않는다”며 장문의
해설 기사를 냈다. 아에프페는 9·11 테러(2001), 파리 테러(2015), 뉴질랜드 크라이스트 모스크 테러(2019) 등 사건에 더해 자사 기자가 탈레반, 이슬람국가(IS) 등에 살해당했을 때도 지켜온 규칙이라고 썼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에 대한 사회적 몰입도가 덜한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매체가 ‘무장세력’, ‘무장정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현장 취재 기반이 빈약하고 서방 미디어 의존도가 높은 한국 언론의 아킬레스건은 용어보다 오보 위험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지난달 ‘하마스 아기 참수’, ‘가자지구 알아흘리 병원 폭발’ 등 사안이 터졌을 때, 국내에선 ‘받아쓰기’ 속보 경쟁에 따른 오보가 쏟아졌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지난 2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길 건너편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을 향해 맞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욕/AFP 연합뉴스
중동 지역학 전문가인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는 3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지금 이 전쟁에서는 양 진영 사이 서로 불리한 것들을 반대쪽에 덮어씌우는 심리전이 횡행하고 있다”며 “(언론이)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 교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다 보도해줘야 한다. 편파적인 판단이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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