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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미디어

김영미 분쟁전문 피디 “징글징글하지만, 저널리스트잖아요”

등록 2015-08-14 20:25수정 2015-12-22 14:47

지난 4일 서울 중구 중림동 <시사인> 건물에서 만난 김영미 피디가 인터뷰 도중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을 주로 찾아 총격과 살상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 피디는 “저널리스트란 의무를 다해야 하는 직업이지 돈을 버는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4일 서울 중구 중림동 <시사인> 건물에서 만난 김영미 피디가 인터뷰 도중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을 주로 찾아 총격과 살상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 피디는 “저널리스트란 의무를 다해야 하는 직업이지 돈을 버는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김영미 분쟁전문 피디
2006년 6월, 마크가 죽었다. 스웨덴 출신 기자이자 소말리아 전문가로 알려진 마크(마틴 애들러)가 소말리아 수도 한복판에서 괴한의 권총에 피격당했다. 마크의 도움으로 소말리아 취재 준비를 해온 김영미(당시 36) 피디는 무서웠다. 해적에 납치되어 생사가 불투명한 동원호 선원들을 찾으러 나서는 길이었다. 차마 발길이 안 떨어져 중간기착지인 에티오피아의 숙소에서 나흘간 서성이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여길 가야 해?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진짜 가야 해?” 두려움과 망설임을 안은 채 그는 결국 소말리아로 떠났고, 해적의 본거지에서 동원호 선원들을 만나 그들의 생존 소식을 국내에 전했다. 한국 외교부의 무능과 태만을 질타하는 김영미의 취재 영상이 <피디수첩>으로 방영될 예정이라는 걸 알고, 당시 외교통상부는 엠비시(MBC)에 공문을 보냈다.

“일개 프리랜서 김영미 피디의 검증되지 않은 취재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재검토해 달라.”

한국 외교부를 긴장케 한 김영미(45) 피디를 이제는 아무도 “일개 프리랜서 피디”라 부르지 않는다. 세계 80개국을 넘나들며 수십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독립피디이며 <세계는 왜 싸우는가?> <사람이, 아프다> <평화학교> 등 여섯권의 책을 낸 저자이다.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에 찾아 들어가 난민촌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총격과 살상의 현장에서 질긴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를, 사람들은 ‘분쟁전문 피디’라고 부른다.

유난히 덥고 습한 폭염의 서울, 연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서울 중심가에서 그가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6월말 발생한 엠비엔(MBN) 피디 폭행 사건에 항의하며 독립피디를 대표해 싸우는 중이라고 했다. 엠비엔 앞 시위가 3주째 이어지던 지난 4일, 서울 중구의 <시사인>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영미는 2007년 <시사인> 창간 때부터 국제문제 편집위원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가는 몸매에 여린 인상이었다. 엠비엔 시위 현장에서 회의를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김영미 피디가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필동 <엠비엔>(MBN) 건물 앞에서 엠비엔 피디의 독립피디 폭행 사건 진상조사 등을 요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김영미 피디가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필동 <엠비엔>(MBN) 건물 앞에서 엠비엔 피디의 독립피디 폭행 사건 진상조사 등을 요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선배님, 저도 맞았어요”

-오늘도 1인시위를 하셨나요?

“아녜요. 처음 2주 동안은 저하고 진모영 피디(<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감독)가 주로 했는데 요즘엔 동료, 선후배들이 서로 하겠다고 나오셔서 라인업이 꽉 찬 상태예요. 처음엔 한 사람씩 하기로 했는데 둘이 되었다가 셋, 넷이 되기도 하고. 페이스북으로 접수를 하는데 ‘오버부킹'(초과예약)이 돼 가지고… (웃음) 고맙고 감사한 일이죠.”

-그래도 여전히 시위 현장에 나가시나요?

“할 일이 많거든요. 국회로, 방통위로 쫓아다녀야 하고 그것 때문에 회의도 해야 하고. 그래도 매주 <시사인> 기사는 써야 하니까 밤에는 나와서 일하고요.”

엠비엔 피디 폭행은 김영미 피디와 직접 관련이 있는 사건은 아니다. 지난 6월25일 새벽 엠비엔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독립피디 한 사람이 엠비엔 피디한테 폭행을 당해 안면골절에 이르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김영미는 이 사건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고, 독립피디의 열악한 지위를 보여주는 구조적인 관행이기 때문에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동안 쉬쉬해서 그렇지, 알고 보니 이런 사건도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제가 1인시위 시작하고 나니까 후배들 제보가 빗발치는 거예요. ‘선배님, 저도 맞았어요…’ 하고. 그래서 ‘아니, 왜 그동안 말을 안 했어?’ 하니까 ‘그걸 어떻게 말해요? 피디 못하게 될 거 아녜요?’ 하더라고요. 그런 얘길 한 피디 하나는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맞고 들어간 날 부인이 밥상을 차려오는데 너무 비참해서 그걸 못 먹겠더래요. 부인한테도 말 못하고 밖에 나와서 술 먹고 들어갔다고….”

-지금 독립피디들 없으면 방송이 안 될 정도인데, 여전히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니요?

“독립피디들 작품이 전체 방송의 60% 정도 돼요. 지금 독립피디협회에 회비를 내는 피디만 300여명인데 전체 인력이 2000여명은 될 거라고 추산합니다. 우리는 이익단체가 아니라 ‘생존단체’예요. 과로로 죽은 독립피디도 있고,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자살한 사람도 있어요.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어요.”

-엠비엔 공식사과와 가해자 해고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 가해자가 해고되면 독립피디가 될 수도 있겠네요?

“내가 도와주고 싶어요. 그 친구가 진짜 피디로 일하고 싶으면 독립피디로 오라고, 그럼 우리가 도와주겠다고요. 지금 그 사람한테 본사 피디라는 아주 위험한 칼자루를 쥐여준 거예요. 그 타이틀이 평생 그 사람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고요.”

-독립피디들의 지위가 이렇게 형편없지만, 그래도 김영미 피디 같은 경우는 상당히 성공한 케이스 아닌가요?

“제가 창피한 게 그거예요. 그동안 제가 받는 대우가 나아지니까 딴 사람들도 다 그렇게 나아졌는지 알고 있었어요. 내가 처음 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임금이 비슷하다는 걸 이번에 알았어요. 그간 모르고 있었던 게 마음 아프고, 반성도 많이 했죠.”

동료들의 애환과 고충을 공유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책임감으로 그는 선뜻 1인시위를 자청했다. 김영미는 그 이름만으로 독자적인 브랜드를 구축한 몇 안 되는 독립피디 중의 한 사람이다. 탈레반 붕괴 직후 아프간을 처음 취재한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2002), 전쟁 직전 이라크를 취재한 <일촉즉발 이라크를 가다>(2003)와 긴급르포 <파병 100일간의 기록, 자이툰부대>(2004), 동원호 선원들의 귀환에 결정적 공헌을 한 <조국은 왜 우리를 내버려 두는가>(2006)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동원호 선원들 찾아 소말리아행
취재 돕던 스웨덴 기자는 ‘피살’
“죽을지 모를 곳으로 가야 하나”
해적 본거지서 선원 생존 확인
외교부 무능·태만 질타한 독립피디

MBN 피디의 독립피디 폭행 사건
“독립피디 열악한 지위 보여준
구조적 관행…그냥 못 넘어가”
동료 애환·고충 공유 못한 자책에
1인시위 자청 “우린 생존 문제”

김영미를 만든 시간들
김영미를 만든 시간들
서른살 애엄마, 피디가 되다

빛나는 필모그래피에 비해 그의 이력은 지나치게 평범하다. 대구의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고 사진을 부전공으로 했을 뿐, 서른살이 될 때까지 방송이나 취재를 해본 경험도 전무하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림하는 게 전부였던 그가 피디가 된 건, 스스로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셨어요? 99년에 만 네살 된 아들을 떼어놓고 1년간 동티모르에 머물면서 다큐를 만드셨죠?

“아니, 그땐 그냥 사진이나 찍어볼까 하고 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아이 낳고 키우면서 내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았어요. 결혼 5년 만에 이혼을 하고 나니, 문득 내 이름을 아들한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명심이 아니고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하는… 근데 그나마 할 줄 아는 거라곤 사진밖에 없었으니까.”

-그 전까지 여행을 잘 다니셨나요?

“아뇨. 애엄마가 어떻게? 집에서 살림만 했다니까요.”

-근데 어떻게 동티모르라는 나라를 생각한 거예요?

“그냥 새로운 세상에 가고 싶었어요. 그때가 서른살이었으니까 그때라면 나한테 아직 기회가 있지 않을까, 더 넘어가면 못할 것 같고 해서….”

-신기하네!(웃음) 어떻게 그렇게 용감한 생각을 했을까요?

“가고 싶었으니까, 꼭 하고 싶었으니까… 인생은 파도 타고 가는 거예요. 그 파도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대학 때 사진을 부전공으로 했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 특기나 경력을 가지지 못한 서른살의 애엄마가 낯선 동티모르에 가서 손짓 발짓 섞어가며 현지어를 조금씩 익히기 시작했다. 사진기를 살 때 덤으로 산 캠코더가 마침 있어서 동영상을 찍게 되었다. 그것이 2000년 에스비에스(SBS)를 통해 방영된 <동티모르 푸른 천사>, 김영미 피디의 첫번째 입봉작이다.

-전작이 없는 피디가 만든 장편 다큐가 공중파로 방송되는 건 무척 이례적인 일인데요.

“그때 마침 낮 방송이 생겼어요. 방송사에서 콘텐츠가 모자란 거야. (웃음) 재방송 트는 것보단 나을 것 같고 동티모르 찍은 사람도 없으니… 평일 낮에 시간 때우기용으로 나갔으니 본 사람도 얼마 없을 거예요. 하하~”

그래도 그 덕에 프로덕션에 ‘스카우트’됐다. 프로덕션 소속으로 에스비에스 아침방송에 파견되어 조연출로 일했고 오래지 않아 피디가 되었다. 제작 경험은 일천했지만 아침방송을 오랫동안 봐온 아줌마 시청자로서 아이디어는 넘쳐났다. 예쁘고 늘씬한 리포터 대신 푸근하고 친근한 리포터를 앞세우고, 엄마들이 관심 있어 할 유기농 이유식부터 건강식 콩고기까지 소개하면서 매일매일이 신났다. 8개월 동안 집에는 여섯번 들어갈 만큼 일에 파묻혀 지냈다. 다섯살 난 아들이 애끓게 보고 싶었지만, 이때 자립의 기반을 제대로 쌓지 못하면 영영 일어서지 못할 것 같다는 절박감이 더 컸다.

방송을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지면서 호흡이 긴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커졌다. 2001년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다시 혈혈단신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 적금을 깨고도 모자라 주변에서 천만원을 빌렸다. 편성계약도, 제작비 지원도 없이 모든 걸 혼자서 취재하고 촬영했다. 난민촌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자며 그들의 눈으로 아프간 사회를 기록했다(<부르카를 벗은 여인들> 2002년 한국방송(KBS) 방영).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적잖은 변화를 겪었겠군요.

“처음엔 100% ‘방송 마인드’였어요. ‘이게 얘기가 될까? 그림이 될까?’ 그런데 아프간에 가니까 진짜 막막하더라고요. 여자들이 다들 부르카(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는 덮개옷)를 뒤집어쓰고 카메라만 들이대면 도망가고. 근데 조금씩 마음이 통하게 되니까 자기들이 직접 수소문해서 이야기도 물어다 주고, 사람도 알아봐 주고. 전화기도 대중교통도 없는 데서 먼 길을 걸어 다니면서 말이에요. 걔네는 코리아가 어딘지도 몰라요. 티브이도 못 보고. 순전히 사람에 대한 진정성 하나로 날 도와준 거죠. 내가 참 부끄러웠어요. 피디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겠다 생각했지요.”

-찍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 그들을 대하게 되셨군요.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죠. 또 한 가지, 내게 큰 가르침을 준 건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저널리스트들이었어요. 분쟁지역에는 훌륭한 저널리스트들이 많이 모이거든요. 전쟁지역에선 밤이 되면 나가질 못해요. 그럼 호텔 같은 데 모여서 많은 얘길 나눠요. 베트남전부터 코소보 취재한 분들까지 노장들도 많은데, 그분들한테 저널리즘 정신에 대해 배운 게 많아요.”

-특별히 롤 모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여러 분 계신데… 앤더슨 쿠퍼라고 시엔엔(CNN)의 <360°>란 프로그램의 앵커 같은 분도 그중 하나죠. 소말리아, 베트남 같은 델 다녀온 사람인데 평소엔 나보다 더 거지같이 입고 다니고, 생활할 때도 전혀 표가 안 나서 미국의 재벌 3세(미국 대부호인 밴더빌트 가문, 앤더슨은 2000억원대 유산 상속을 포기해서 화제가 됨)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분들한테 뭘 배웠나요?

“저널리스트란 의무를 다하고 가야 하는 직업이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고. 그래서 저도 가끔 (언론인들한테) 특강할 기회가 생기면 그런 말을 해요. 월급쟁이 회사원이 될지, 저널리스트가 될지 선택하라고.”

“전쟁 전 시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착했는데…”

-‘분쟁전문 피디’로 불리는데, 분쟁지역을 주로 찾는 이유가 있나요?

“그런 타이틀은 제가 만든 게 아니라서… 저는 그냥 피디예요. 내가 딱히 분쟁지역만 다닌 것도 아니고요. 난 휴먼다큐를 하고 싶어 하는 피디고, 세상 어딜 가든 그 사회의 독특한 얘기들이 있다고 봐요.”

-세상 어딜 가나 얘깃거리가 있다면 뭐 하러 굳이 위험한 곳엘 가세요? 좀 빼놓고 다른 델 가지.

“모두 다, 빼놓잖아요.”

-모두 다 빼놓는다?

“의사들이 돈 되는 성형외과나 피부과로만 몰리면 의료 시스템이 붕괴할 것 아니에요. 누가 위험한 정형외과, 흉부외과 하려고 하겠어요. 누구나 쉬운 걸 하고 싶어 하고 방송연예 기자를 하고 싶어 하면 국제뉴스 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그럼 우리 국민은 그만큼 알 권리의 제한을 받는 건데. 시청률이 안 나온다고 뭐라 하는데, 보건 안 보건 일단 밥상은 차려놔야죠. 그건 취재진 책임이에요. 나도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죠. 소말리아(동원호 납치사건 어부들 만나러) 갈 때도 버티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어 간 거예요. 아무도 안 가니까.”

-막상 소말리아 들어가서는 좀 덜 무섭던가요?

“계속 무서웠죠. 왜 여길 기어들어왔을까 한탄하면서.”

-어떻게 견뎌요. 그럴 때?

“무서워 떠는 건 인간 김영미고, 취재하러 온 저널리스트 김영미는 물러서면 안 되는 거죠.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가 환자를 살리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의무이듯이.”

-김영미 다큐는 여성이나 아이들에게 특히 주목하는 것 같아요. 사회적 약자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피디가 여성이어서 접근의 용이성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요?

“여성 피디여서 유리하다고 한다면 분쟁지역 취재는 여성이 압도해야 맞게요? 근데 그렇지 않잖아요. 여성이라서 유리한 건 없어요. 난 (권력자가 아니라) 가장 밑바닥 서민들, 아이들, 여자들의 시각에서 전쟁이나 분쟁을 보고 싶은 거예요. 저의 강점은 여성이 아니라, 아이 가진 엄마라는 점 같아요. 원래 위험한 거를 아이들이 만질까봐 제일 촉각을 곤두세우는 게 엄마들이잖아요. 어딜 가나 내 아이 또래 애들이 눈에 밟혀요. 아랍의 봄을 이끈 주역도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이고, 아이에스(IS)로 가는 애들도 우리 아이 또래예요.”

-지금 아드님은 몇살이죠?

“대학교 2학년이에요. 작년엔 ‘국경 없는 의사회’ 인턴 한다고 바빴고 올여름에도 뭐, 일이 많대요.(웃음)”

-세계 어딜 가나 아들 또래의 애들을 만나겠군요.

“이라크에서 미군들 취재 다닐 때도 그랬어요. 거의 스무살 전후인데, 애들이 전투 나갔다 오면 노트북 놓고 게임을 해요. 그럼 내가 잔소리를 하죠. ‘자! 잠을 자라고! 왜 게임들을 해?’ 그러면 애들도 ‘집에서 듣던 잔소리를 여기서까지 들어야 되냐?’고 투덜거리곤 해요.(웃음) 내가 취재진으로 왔지만 세상의 엄마들을 대신해 와 있는 듯한 생각으로 같이 있는 거죠. 그렇게 대하니까 나중에 ‘사람 죽일 때 기분이 어때?’ 이런 걸 물어도 솔직하게 답을 하죠.”

전쟁터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폭격 맞은 폐허에서도 아이들은 뛰어놀고, 여자들은 전쟁통에도 밥상을 차린다고 바동거린다. 그러나 전장(戰場)은 가정이 아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약속은 깨지고, 사람들은 등 뒤에 비수를 꽂는다.

-전쟁터를 다니다 보면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 때 없어요?

“왜 없겠어요? 사람들은 내가 아랍을 너무 사랑해서 자꾸 가는 줄 아는데… (과장스런 표현으로) 저요, 사랑 안 해요!”

-하하하, 진짜요?

“극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목숨 지키려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사기 치고 거짓말하는 게 일상이라고. 하루만 있어도 징글징글해. 그런 사람을 수십 명 만나면서 몇달씩 있는다는 건 정말 인내심 테스트예요. 고토 겐지(일본인 저널리스트)가 참수당했는데 그 친구를 시리아로 데리고 간 게, 걔 코디네이터였다고요. 나도 아는 사람인데 만오천달러에 고토 겐지를 넘긴 거예요. 이게 다 전쟁 때문이라고. 전쟁 나기 전 시리아 사람들은 얼마나 순박했는지 아세요? 내가 이라크(전쟁) 취재하다가 시리아 넘어가서 일주일씩 쉬다 오곤 했다니까요. ‘악마의 소굴에서 천사의 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전쟁이 인간을 그렇게 피폐하게 만들어요.”

결혼 뒤 애낳고 5년간 살림하던
애엄마가 아이 두고 동티모르로
첫 입봉 다큐가 공중파로 방영
“인생은 파도 타고 가는 것…
그 파도가 어디로 갈지 모른채”

한국에서도 운전할 때 옆 차가
나란히 달리면 “암살 아닌가” 의심
천둥 번개 칠 때 싱크대서 자고
김선일 환영 밤마다 찾아온 적도
3년간 열심히 약물치료 받아

서울 중구 <시사인> 사무실 안에 있는 김 피디의 자리. 김 피디는 2007년 <시사인> 창간 때부터 국제문제 편집위원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서울 중구 <시사인> 사무실 안에 있는 김 피디의 자리. 김 피디는 2007년 <시사인> 창간 때부터 국제문제 편집위원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카불서 폭탄 터져 몸이 날아갔을 때…

-<세계는 왜 싸우는가?>란 책을 내셨는데, 그 답이 뭡니까? 왜 싸우는 걸까요?

“소통이 안 돼서 싸워요. 나랑 ‘다른’ 걸 ‘틀리다’고 여기고, 나 혼자 떼돈 벌겠다고 지구 저편 가장과 가족들에 대해선 생각을 안 하니까. 느그들은 상관없어! 그리고 군수산업 일으켜서 전쟁을 벌이는 거죠.”

-그동안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기셨을 텐데… 제가 질문을 하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게 아닐지,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내 취재원들도 날 위해서 하기 힘든 얘기를 해준 경우가 많아요. 내가 여기 인터뷰를 하겠다고 결심할 때에는 나도 그런 용기를 좀 내야 하지 않을까, 각오한 거니까… 괜찮습니다. (질문)하세요.”

-제일 힘든 기억 같은 게 있다면…?

“끔찍한 기억이 너무 많아서… 음~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갔을 때 폭탄이 터져서 내 몸이 휭 날아갔어요. 어딘가 꽝 떨어졌는데 아프다는 건 전혀 못 느끼고 일어나려고 하니 몸이 안 움직이더라고요. 근데 아래를 보기가 두려운 거예요.”

-다리가 잘렸을까봐서요?

“다리가 없는 것 같았어요. 한 15분쯤 그렇게 멍 때리고 있는데 출동한 미군들이 ‘일어나보라’고 하데요. 그때 알았죠. 아, 다리는 붙어 있구나. 꼬리뼈가 부러졌는데 나중에 누운 채로 편집해서 방송을 냈지요.”

-나 같은 사람은 서너 시간 인터뷰만 하는데도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며칠 동안 감염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아픈데, 몇달씩 분쟁지역에서 처참하게 죽는 사람과 그 가족들을 보고 나면 얼마나 힘드세요? 더구나 편집할 때마다 그 장면을 보고 또 보고 할 텐데.

“볼 때마다 울컥하죠. 후유증이 오래가요. 한국에서도 운전할 때 내 옆 차가 나랑 나란히 달리면 겁이 덜컥 나요. ‘저거, 암살 아닌가?’ 싶어서. 총 쏠까봐. 여긴 한국이니 그럴 일 없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불안감에 냅다 속력을 내게 되죠. 천둥 번개 칠 때면 그 소리가 폭격 소리 같아서 싱크대 안에서 자기도 하고….”

-(깜짝 놀라) 싱크대 안에서 잔다고요?

“심할 땐, 막 밤에 찾아왔어요.”

-뭐가요? 무슨… 환영 같은 게요?

“죽은 애가. 김선일 사건 때 선일이 (참수당한) 시체를 처음 본 것도 나였기 때문에 걔가 밤마다 날 찾아왔어요. 목이 잘린 채로 문을 두드리고 의자에 앉아서 나한테 이야기를 하고….”

-휴우!(한숨)

“마침 (비슷한 경험을 한) 외신기자 한 분이 조언을 해주셔서 한 3년 치료를 열심히 받았지요. 약물치료, 심리요법… 뭐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치료 중엔 그럼 위험한 지역은 안 가셨나요?

“갔죠.”

-그 와중에도요?

“그것도 치료의 하나였어요. 피하지 말고 부딪혀보는 것. 어느 곳이든 A부터 Z까지 다 있으니까 전쟁터에서도 좋은 것, 긍정적인 것, 아름다운 것, 이런 걸 집중적으로 보라고, 의료진들이 권하더라고요.”

언론인 사명감은 내가 결심하는 것

미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법도 이와 같지 않을까? 도망치지 말고 아름다운 것들, 희망을 주는 것들을 보듬으며 악몽과 싸워 나가기.

-요즘 언론고시생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예요. 언론인 지망생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씀 있나요?

“피디는 내가 되는 거지, 누가 시켜주는 게 아니에요. 이런 사명과 의무감은 내가 결심해야지, 남이 어떻게 강요하겠어요?”

-하고 싶어도 기본 요건이 있을 것 아니에요? 국제기자가 되려면, 영어도 잘해야 하고 국제적 인맥도 있어야 하고….

“그 정도면 피디를 하지 말고 정치를 하시든가!(웃음) 더 훌륭한 인물이 되셔야지. 그 정도면 정치계에서도 한몫하실 텐데… 저널리스트는 스킬로 하는 게 아니에요.”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세요?

“(망설임 없이) 네!”

김영미에게 저널리즘이란 직업이 아니라 책임이고 사명이다. 그 징글징글한 숙명에 늘 양심이 ‘강제소환’되는 느낌이라고, 그는 말한다. 여전히 그에게 ‘유명해지고 싶어 목숨을 내놓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다지만, 김영미 같은 사람이라면 좀 더 유명해져도 좋겠다.

녹취 박성희(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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