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비록 국가권력의 강고한 힘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몸이 깨지고 쫓겨나면서도 최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싸웠으니까요. 이건 새로운 권력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해요.” 2013년 임기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질문하려다 제지당한 최승호 <문화방송>(MBC) 해직피디는 “언론이 질문을 못 하게 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나라가 망한다고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래보다 큰 대왕오징어 발견” “야생 황소로 변한 집 나간 송아지… 미인계로 잡았다” “포천 주택가에 출몰한 멧돼지 사살” “4미터 크기 대형 가오리 잡혀”
언제부터인가 문화방송(MBC) 뉴스데스크에 동물뉴스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2015년 <미디어오늘>은 ‘MBC에는 왜 이렇게 동물뉴스가 많나요?’(2015년 4월10일자)라는 기사에서, “김장겸 보도국장이 취임한 뒤 뉴스데스크에 동물뉴스가 4배로 늘었다”고 지적하고, MBC 뉴스가 “동물뉴스 전하는 식물뉴스”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해 MBC 측 대리인 박철 변호사는 “고래보다 큰 대왕오징어 뉴스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며 “한국 사회는 너무 정치 과잉이고, 과학적 지식을 보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2013년 박근혜가 취임한 뒤 국정원 댓글사건과 원전 비리, 세월호 참사 같은 굵직한 뉴스들이 터져나왔지만, MBC는 “과학적 지식”을 보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알통 굵기가 정치적 성향을 좌우한다” “비 오는 날에는 소시지빵이 잘 팔린다”와 같은 뉴스들이 전파를 탔다. 방송사의 공신력이 땅에 떨어지고 시청자들의 조롱이 빗발쳤지만 경영진은 개의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세월호 전원 구조 오보였다. 목포MBC 기자들이 전원 구조는 사실이 아니라며 현장 상황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 김장겸 당시 보도국장이 편집회의에서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 “완전 깡패네. 유가족 맞아?”라고 발언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2017년 2월 김장겸은 MBC 사장에 취임했다. <한국방송>(KBS)나 <와이티엔>(YTN) 같은 다른 공영방송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하산 사장이 임명되고 극우 성향의 친권력적 인사들만 중책에 기용되었다.
최승호(57) 피디는 이들을 ‘공범자들’이라 칭했다. 자산 규모 2조원대의 MBC를 정파적 도구로 삼는 이들, KBS에 투입되는 매년 6300억원의 공적 재원을 자신들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려는 이들…. 촛불시민이 부패한 정치권력을 몰아낸 뒤에도 이들은 건재하다. 이제 언론권력은 정치권력에 기생하고 부역하는 것을 넘어, 불온한 권력을 재생산하는 거점이다. 뉴라이트 역사학자를 대표하는 이인호는 여전히 KBS 이사장이고, “광화문 촛불집회는 모두 동원된 사람들”이라고 주장한 고영주는 MBC를 관리 감독하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으로 앉아 있다. 이것은 정파의 문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이다.
최승호 피디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은, 이명박 정부 이래 권력이 어떻게 언론을 장악해 왔으며,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는 공영방송의 언론인들이 어떤 수난을 당해왔는지 보여준다. 2012년 최승호도 25년간 재직했던 MBC에서 해고되었다. 지난 10일 서울 세종로에 있는 <뉴스타파> 사무실로 최승호 피디를 만나러 가던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출근길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 역사에서 김밥을 사서 나오다가, 문득 기억이 났다. 오래전, 밤샘 편집을 마치고 난 어느 이른 아침에도 그와 이렇게 김밥을 나눠 먹은 적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승호
-반갑습니다. 이제 영화감독으로 뵙게 되네요.(웃음)
“아, 뭐 마실 거라도? 우리가 이렇게 손님 접대가 부실해요.”(웃음)
그는 마실 것을 준비했고 나는 김밥을 펼쳐놓았다. 나는 한때 그와 함께 일하던 MBC 방송작가였다. 그는 답답하리만치 차분하고 신중하고 우직한 피디였다. 화끈하게 단방에 결론 내려 하지 않고 거듭해서 상반된 입장을 취재하고 중복 확인했다. 5·18 특집으로, 광주에서 학살돼 암매장된 실종자들을 찾는 다큐를 만들 때였는데, 어렵사리 암매장에 대해 증언해 줄 사람과 연이 닿았다. 모두들 환호하며 흥분할 때, 그는 냉정했다. “그분이 착각을 했거나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 다른 증언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그 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깊이 각인된 것은, 시사다큐 피디로서 그가 견지한 엄정함과 진중함이었다. 최승호는 그런 피디였다.
양쪽 입장 거듭 확인하던 우직한 피디 25년간 몸담았던 MBC서 2012년 해고 공영방송 망가지는 과정 기록한 다큐 “이거 내가 해도 되나 고민도 했다 당사자라 빨리 정리해낼 수 있겠더라”
인제 태어나 대학까지 대구에서 자라 아버지는 월남한 실향민에 직업군인 대학 가자마자 5·18 터져 휴교령
“군 지휘관 ‘흩어져’ 소리에 흩어졌다” “늘 마음 한구석 부채감으로 남아”
“영화를 만들면서 자료화면을 보는 게 큰 스트레스였다”는 최 피디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불이익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버텨왔다는 거, 그렇게 포기하지 않았던 양심의 힘, 이런 사람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오늘 지방에 가셔야 한다고요.
“네, 오후에 전주에서 시사회가 있어서.”
-지난해 <자백>을 개봉할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공범자들>도 시사회를 많이 여는 것 같아요.
“우리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토리펀딩’이란 걸 했어요. 영화 제작에 동의하는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시는 거죠. <자백>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1억5천만원 정도를 펀딩으로 모았는데 그 후원자분들께 미리 보여드리는 거예요. 그분들이 에스엔에스(SNS)에도 올리고 해서 홍보에 큰 힘이 됩니다.”
-<자백>에 비해서 이번엔 스토리펀딩 기간이 좀 짧았죠?
“기간도 반 정도밖에 안 됐고 펀딩 액수도 한 3분의 1 될까?(웃음) 펀딩 담당자들 얘기가 대선 이후에 사회적 이슈에 대한 모금액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대요.”
-아, 그래요?
“대선 거치면서 뉴스타파도 후원자가 좀 줄었어요. 저도 이해는 가요. 지난 10년 동안 시민들이 너무 긴장된 삶을 살았잖아요. 촛불로 새 정부가 출범하고 나니 ‘아, 됐다. 마이 했다. 이제 뭐 알아서들 하시고. 우리도 우리 삶을 챙겨보자’ 이런 모드가 생긴 거 아닌가 싶어요.”(웃음)
-곧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MBC 전·현직 임원 5명이 초상권 침해와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잖아요? 어떤 결정이 나올까요?
“당연히 기각 결정이 날 거라고 봐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얘기하는 건 지난 9년 동안 언론에 보도되었던 것들이고 되풀이해서 곱씹고 곱씹었던 문제들이에요. 이제 와서 새롭게 사실관계를 다투고 말고 할 일도 아니에요.”
그가 예상한 대로 며칠 뒤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는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MBC 전·현직 임원들은 공적인 인물에 해당하니 초상권이 침해되었다고 볼 수 없고, 그들이 비판이나 의문에 적극적으로 해명할 지위에 있는데도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니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이라 볼 수 없다는 결정이었다. 법원 판결을 앞두고 63시간 만에 1만6천여명의 시민이 기각 탄원서에 서명을 하고 <공범자들>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MBC 5인방 덕분에 뜻하지 않게 <공범자들>의 개봉 홍보가 널리 된 셈이다.
퇴임한 사장은 왜 도망을 쳤을까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하셨지만 본인이 직접 관련된 사안을 다큐로 만드는 건 좀 다르지 않나요? 전 이렇게 아는 사람을 인터뷰하는 것도 신경 쓰이는데.(웃음)
“내가 당사자니까, 이거 내가 해도 되나, 객관적인 시선을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 고민도 했죠. 근데 당사자라서 더 많이 알고 빠른 시간 내에 정리해낼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도 김재철, 안광한, 김장겸 같은 MBC 사장들 만날 땐 참 조심스러웠어요. 내가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되니깐.”
-찾아가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회피하고 발뺌하고… 참 실망스러웠어요.
“안광한 사장을 만났을 땐 정말 씁쓸했어요. 그분이 편성 피디로 입사하신 분인데, 옛날에 교양국에 와서 여행프로를 만들기도 했어요. 근데 나를 보자마자 도망가니까.”
-무슨 저승사자 만난 표정이던데요. 오피스텔 계단에서 스펙터클한 추격전이…(웃음) 근데 거기가 어디예요? MBC는 아니던데.
“원래 MBC에 그런 전통이 없었는데 김재철 사장이 들어오고 난 뒤부터 사장이 퇴임하면 1년 동안 회사에서 퇴임 사장한테 좋은 오피스텔을 마련해주고 기사 딸린 차도 내줘요. 한 달에 얼마씩 1년에 1억원 이상 되는 돈도 준다고 들었어요.”
-아니, 무슨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역대 어느 사장도 하지 않았던 포악한 짓을 하고 내부에서 욕을 먹을 수밖에 없으니까 일종의 보상책이랄까? 우리 서클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돌봐줄게, 그런 거죠.”
-예전에 MBC에서 다큐를 만들 때도 친일 행위나 5·18 학살 행위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셨잖아요. 부당한 권력을 행사해 놓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엔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 같아요.
“언론의 잘못이 크죠. 언론이 제대로 조명하고 국가가 제때 조사해서 명확한 처벌을 했다면 이런 일들이 없겠죠. 어제도 보니까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노무현 정부 당시의 방송 장악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보다 훨씬 심했다’ 그랬던데,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이른바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바른정당 사람의 입으로 할까. 이런 분들한테 우리 영화 꼭 좀 보여드리고 싶어요. 끝나고 자막에 징계받고 좌천된 언론인 명단 수백명이 나오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엔 언론인들이 공정보도 관련한 사안으로 징계를 받거나 해고되거나 기소된 적은 없잖아요.”
영화 <공범자들>은 수많은 시민이 낸 후원금으로 제작됐다. 영화 공식 개봉을 앞두고 후원자들을 초청해 열린 시사회가 끝난 뒤, 한 시민이 최 피디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공범자들>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동안 KBS, MBC, YTN 등 공영방송에서 해고되고 징계받고 좌천된 수백명의 언론인 명단이 실려 있다. 언론 파행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이들은 여지없이 비제작부서로 발령을 냈고, 인력이 부족해지면 언제든 경력직 대체인력을 뽑아 충원했다. MBC 스케이트장 관리에만 피디 3명, 기자 3명, 아나운서 3명이 배치될 정도로 막무가내 인사였다.
-유능한 인력들이 대거 배제되면서 시청률이나 브랜드 이미지, 매출액에서 큰 타격을 입었어요. 경영진으로서는 거의 빵점짜리 성적표인데,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요?
“이 사람들은 시청률이 떨어진 이유가 자기네 탓이 아니고, 노조가 발목을 잡고 해직자들이 밖에 나가 비판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자기들이 해고했으니까 쫓겨난 거고 잘못하니까 비판한 건데, ‘증거도 없이 잘랐다’고 해놓고 왜 해고자 핑계를 대는지, 참.”
지난해 1월 최민희 의원실에서 입수한 녹취록에 따르면, 백종문 MBC 부사장(당시 미래전략본부장)은 최승호 피디와 박성제 기자에 대해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증거는 없지만 해고했다’고 말했다. 최승호가 백종문 부사장을 찾아가 해고한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자 백종문은 “방송의 미래를 막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며 응답을 피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방송의 미래란 대체 뭘까?
‘허랑방탕’ 연극반 생활, 피디나 되어볼까
최승호는 1960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해주에서 월남한 실향민으로 직업하사관이었고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착실한 교회 권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면서 고등학생 때 연극이란 걸 처음 해봤다. 혼자서 시나리오를 쓰고 1인극을 했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1980년 경북대 법대에 입학하고 연극반 활동에 미쳐 살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시를 보고 공무원이 되길 바랐지만, 상명하복의 위계질서에 적응하는 건 체질에 영 맞지 않을 것 같아 일찌감치 작파했다.
-이력으로만 따지면 대구 출생, 군인 아들, 경북대 법대 출신… 소위 진골 티케이(TK)가 될 조건을 얼추 갖췄는데(웃음), 어쩌다가 이렇게 딴 길로 접어든 거예요?
“그러니까요.(웃음) 내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5·18 터지고 휴교령이 났어요. 그 이전부터 ‘휴교령 내리면 그 다음날 학교 정문 앞에 모이자’고 암암리에 얘기가 돌았죠. 5월18일 아침에 저도 경북대 정문으로 갔어요. 가보니까 탱크가 딱 와 있더라고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니까 군 지휘관이 고성으로 ‘흩어져!’ 그러는데, 아주 살벌한 눈빛이었어요.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이미 피신해 있는 상태고 거기 오합지졸들만 모였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섭기도 해서 그냥 흩어졌어요.(웃음) 흩어지라니까 그냥 흩어진 거지. 근데 그날 전남대 앞에선 안 흩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계엄군 앞에서 시위도 하고 계엄군이 폭압적인 진압을 하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되었죠. 그것이 늘 마음 한구석에 부채감으로 남아 있었어요.”
-방송사 피디가 될 생각은 언제부터 한 거예요?
“군대에서 만난 어떤 친구가 언론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첨 알았어요. 언론사에 시험 쳐서 들어간다는 걸.(웃음) 연극만 하느라고 대학 시절을 허랑방탕하게 보냈으니 그 성적으론 대기업에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기자나 되어볼까? 그런데 제일 먼저 시험 친 언론사가 MBC였어요. MBC에는 차마 기자로 지원을 못 하겠더라고요.”
-왜요?
“그때 완전히 MBC가 ‘땡전뉴스’(전두환 홍보성 뉴스)를 할 때라 내가 거기 기자로 간다고 하면 연극반 동료들한테 지적질을 당할 것 같았어요.(웃음) 근데 MBC에는 피디도 있더라고요. 연극반을 했으니 드라마 피디를 해볼까 싶었죠.”
-근데 교양 피디가 되었네요.
“6개월씩 연수받으면서 각 부서를 죽 도는데, 교양에 가보니까 오! 좋은 거야. 그때 내 느낌으론 자기가 원하는 아이템을 정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직업 같았어요. 아,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떤 덴지 궁금한데, 교양 피디를 하면 세상 여러 곳을 가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겠구나 싶었죠.”
-그때만 해도 교양국이 시사물은 잘 다루지 않았잖아요?
“87년 6월항쟁이 있고 방송사 내부에도 방송민주화운동이 일어났죠. 그러면서 점차 사회문제를 다루는 쪽으로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어요. <명작의 무대>란 프로가 있었는데 처음엔 순수문학만 소개하다가 그 무렵부터 김수영, 고은 시인도 다루고 사회성 짙은 작품들도 다루고, 그러다가 <피디수첩>을 만드는 데까지 이어졌죠. <피디수첩>이 제 인생에는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2005년 피디수첩 책임피디로 일할 때 ‘황우석 사건’ 다뤄 엄청난 파장 불러 “방송 안 내보내는 한 있더라도 공영방송이니 제보 확인하는 게 도리” 청와대서 경고성 전화도 걸려와”
영화 만들려고 자료화면 보는 고통 “우리 몸이 깨지고 쫓겨나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싸웠다 새로운 권력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해고됐던 동료들 손잡고 들어가야지”언론이 질문을 못 하게 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최승호를 만든 시간들
-2005년 <피디수첩> 책임피디이자 앵커로 있을 때,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사건을 다뤄서 엄청난 충격을 안겼어요. 그 당시 황우석 신화가 대단해서 광팬들은 그의 연구실 계단에 진달래꽃잎을 뿌리고 ‘고독한 선각자’처럼 그를 받들었죠. 기득권층뿐만 아니라 시민들 대다수가 비난을 하고 압력을 가하는 상황에서 이런 보도를 낸다는 건 굉장히 힘들고 지치는 싸움이었을 텐데, 그런 내외적인 비난을 돌파할 수 있는 결정적 힘은 뭐죠?
“우리 사회에 ‘진실’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느냐, 그게 제일 강한 힘이죠. 처음 우리가 제보를 받은 건, 줄기세포가 조작된 것 같다는 추정이었지, 결정적 증거는 없었어요. 이걸 취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방송에 안 내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한학수 피디한테 취재를 맡겼죠. 만에 하나, 이게 가짜라면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정말 큰일 나는 거잖아요. 우린 공영방송이니까 제보가 왔으면 일단 확인은 해야 도리다, 그래서 취재를 시작했어요.”
-결국 황우석이 실험 결과를 조작해서 제출했다는 게 밝혀지고 난자 공여에 대한 연구윤리 문제도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이게 노무현 정부 때 일인데, 정치적 외압은 없었나요?
“그때 청와대에서 경고성 전화를 받기는 했어요. 박기영 당시 과학기술보좌관의 보고가 결정적인 영향을 발휘했다고 봐요.”
-2015년에 해고무효 소송 항소심 공판에서 최후진술하신 내용을 봤어요. ‘2005년 <피디수첩>이 황우석 사태를 방송할 때 노조가 강력히 버텨주지 못했으면 방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해고한 간부 중 그 누구라도 그때 MBC가 정권 편향적 방송을 한다고 항의를 한 적이 있느냐?’ 하셨어요. 소위 진보정권하에서도 공정보도를 위해 정권에 저항한 건 노조였다, 이런 얘긴가요?
“맞습니다. 전 사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노조를 혹독하게 비판한 적 있습니다. 회사 내부게시판에다가 당시 보도국의 뉴스 기조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죠. ‘고작 이런 것이 우리가 그 긴 세월 파업을 하면서 공정방송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돌아온 모습이냐?’고. <공범자들>에 나오는 김현종 피디라고 있잖아요, 나를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말했던. 그 사람한테도 얘기한 적 있어요. ‘당신은 지금까지 MBC 뉴스가 정권에 편향되게 불공정보도를 한다고 단 한번이라도 말해 본 적 있느냐? 당신은 늘 입 닫고 있었고,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해오지 않았냐? 당신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더러 편향적이라고 하느냐?’고요.”
-그랬더니 뭐라던가요?
“자기가 두 해 선배인데, 어따 대고 ‘당신’이라고 하냐고,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웃음)
최승호에게 있어, 공영방송의 본분이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부족한 점은 질타하고 은폐된 진실은 밝혀내 시청자들에게 알리고 공론화하는 일이다. 2013년 그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는 이명박에게 다가가 물었다. “4대강 수심 6미터, 대통령이 지시하신 겁니까?” 경호원들이 최승호를 끌어내려 하자 그는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언론이 질문을 못 하게 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나라가 망한다고요!” 아직 우리 공영방송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공영방송의 오너는 국민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언론 환경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젠 다매체, 다채널 시대인데, 공영방송 망가지면 <제이티비시>(JTBC) 보면 되고, 아니면 뉴스타파 같은 독립언론 만들면 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굳이 다 망해가는 KBS, MBC를 살려서 뭐 하냐고.
“공영방송은 오너(소유자)가 국민이니까요. 어느 개인이 아니고. 이건 국민의 재산이고 거기 수십년 동안 쌓인 노하우와 잘 훈련된 방송인들이 있어요.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했었다면 세월호 같은 국가적 참사 이후에 그 사건의 원인과 책임이 어디 있는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중지를 모아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배를 인양하냐 마냐 논란이나 벌이고, 단식하는 유족 앞에서 일베가 폭식투쟁을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못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공영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니까 국민의 것으로 돌려서 자기 역할을 잘하게 하고, 그 기반 위에 다른 언론들이 더 좋은 역할을 해준다면 진짜 좋은 거죠. <비비시>(BBC)가 그렇게 공영방송으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해고무효 소송에서 2심 승소 판결이 난 게 2015년인데, 2년 넘게 대법원에 계류중입니다. 대법원에서 해고무효 판결이 확정되면 복직하실 건가요?
“하하하, 여전히 전 해고자 신분이고 다신 이런 일이 없어야 하니까 함께 해고됐던 동료들과 손잡고 들어가야죠. YTN 해고자들은 18일날 복직해서 돌아간다는데.”
-복직이 된다 해도 이미 한창 일할 40대를 다 넘기고 머리가 허예져서 들어갑니다. 지난 시절 돌이켜보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에 빠진 적은 없어요? 한 직장 안에서 동료를 몰아내고 감시하고 모욕했던 세월인데.
“영화를 만들면서 자료화면을 보는 게 제겐 큰 스트레스였어요. 2008년부터 처절한 패배의 역사거든요. 정말 질기게 싸웠는데 끝도 없는 이 터널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모르겠고, 이 영화를 만드는 시점까지 정말 끝없는 패배의 연속이었단 말예요. 근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원시적이고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탄압을 지속적으로 몇년 동안 받으면서 이 대열을 유지해 왔다는 거 정말 대단한 사람들인 거죠. 그간 조합원 수가 줄지 않았단 말예요.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불이익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버텨왔다는 거, 그렇게 포기하지 않았던 양심의 힘. 이런 사람들이 정말 자랑스럽고 감동적이죠.”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회의해 본 적은 없나요?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매장당하고 청춘을 날려 보내고 건강을 잃기까지 했는데.
“(단호하게) 그럼요. 그럴 만한 가치가 넘치도록 있는 일이죠. 우리가 비록 국가권력의 강고한 힘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몸이 깨지고 쫓겨나면서도 최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싸웠으니까요. 이건 새로운 권력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해요. 언론인의 양심이라는 게 어떻게 해도 완전히 꺾을 수는 없는 거구나, 쉬운 일이 아니구나 깨닫게 하는 것. 우리를 물가까지 끌고 갈 순 있어도 물을 먹게 하는 건 어렵겠구나 포기하게 하는 것. 그러면 앞으로 정치권력이 언론을 대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올 거라고 믿습니다.”
영화 <공범자들>에서 MBC 해고자 이용마 기자가 복막암으로 핼쑥해진 얼굴을 한 채 웃으면서 한 얘기와 같았다.
“최소한 우린 기록을 남겼잖아요. 우리가 침묵하지 않았다는 거. 많은 사람의 청춘과 인생이 날아갔지만 그 시기에 적어도 우린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 기록을 남겼으니까.”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관련 영상] <한겨레TV> | 잉여싸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