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아요.” 지난 19일 저녁,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이겼어요!”라는 소식을 전하던 달뜬 목소리는 이내 흐느낌으로 바뀌었습니다. 방송 작가 이가은(가명)씨.
그를 처음 만난 건 올해 초 청주방송 고 이재학 피디의 1주기를 맞아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 현실을 취재할 때였습니다(▶관련 기사 보러가기). 당시 가은씨는 동료 김유정(가명)씨와 함께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문화방송>(MBC)을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내고 판정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이날 마침내 중노위로부터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맞고, 해고는 부당하다’는 취지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두 작가는 문화방송 아침 뉴스 프로그램 <뉴스투데이>에서 2011년부터 지난해 여름까지 10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아침 신문 보기’ ‘이 시각 세계’ 꼭지 등을 만드는 데 참여했죠. 아침 6시에 시작하는 생방송 뉴스라서, 두 작가는 매일 새벽 3시~3시30분에 출근했습니다. 이들은 문화방송 정규직 직원은 아니었지만, “엠비시 보도국에 내 자리가 있음을 감사했고”(김유정씨) “사고라도 나서 회사에 못 가게 되는 상황이 올까봐 눈·비가 오면 늘 마음을 졸였던”(이가은씨) 문화방송의 구성원이었습니다. 두 작가는 부친상에도, 자동차가 박살 난 교통사고에도 일을 쉬지 않고 출근해 당일 뉴스를 만드는 데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방송 작가의 ‘숙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노동 인권 의식이 높아진 요즘에도, 방송사나 담당 피디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작가 등 프리랜서들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 해묵은 관행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작성된 <뉴스투데이> 개편안을 보면, ‘이 시각 세계’ 꼭지에 “작가·리포터 교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방송사는 ‘프로그램 개편을 위한 인적 쇄신’의 일환으로 작가를 “교체”하는 것이라지만, 작가의 입장에선 일자리를 잃는 ‘해고’였죠.
두 작가는 “원래 방송 작가는 그런 거야”라는 ‘숙명론’에 맞서기로 했습니다. 관행에 따라 ‘프리랜서 업무위임계약서’를 썼지만, 실제로는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는 ‘방송 노동자’로 일했음을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작가로 일하지 못하더라도 알리자고 했어요.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 온 나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가은씨가 한 말)
지난해 작성된 <뉴스투데이> 개편안 일부. 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작가나 리포터는 ‘교체’ 대상이 된다.
지난해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는 두 작가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각하했습니다. 작가는 ‘노동자’가 아니라서, 신청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둘은 포기하지 않고, 중노위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지난 19일 오후 중노위 심문회의가 열렸습니다. 심문은 공익위원 3명, 근로자·사용자위원 각 1명이 신청인 당사자들과 사쪽 관계자 등에게 질문을 던지는 재판과 비슷한 절차입니다. 미디어 담당 기자인 저는 참관인으로 이날 심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1시간30분가량 지켜봤습니다.
이미 프리랜서로 계약했는데 뒤늦게 노동자로 인정해달라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러한 다툼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실제 어떤 일을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수행했는가’에 해당하는 ‘근로실질’입니다. 계약 형태가 결정적인 건 아닙니다. ‘정규직 기자’로서 제가 지노위 판정문을 읽을 때 가장 의아했던 점은, 작가들에게 “업무에 대한 자율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사실이 이들의 노동자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쓰였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업무에 대한 독립성·자율성을 일정 부분 보장받지만, 제가 속한 언론사와 상급자의 지시·지휘 권한에 종속돼 있거든요. 두 작가가 맡은 꼭지도 공영방송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일부이니,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중노위 심문에서는 두 작가가 맡은 일이 원래 정규직 기자가 하던 일이라는 점, 두 작가가 휴가를 간 경우 정규직 기자가 업무를 대신한 점, 뉴스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정규직 데스크(피디)의 지시·지휘가 이뤄졌다는 점 등 ‘근로실질’을 세세히 따졌습니다. 한 공익위원은 “프리랜서의 업무 자율성이 존재하더라도 상급자들이 프리랜서의 업무 일상에 지속해서 개입했다면 노동자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심문을 통해 두 작가가 뉴스 원고를 쓰기 전후, 어떤 지시·지휘를 받으며 뉴스 제작에 밀착되어 일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방송 뉴스 제작의 특수성’과 ‘작가들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사쪽 주장의 허점이 노출된 것입니다.
2019년 방송작가유니온이 발표한 ‘방송작가 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방송 작가 다수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근무 형태는 ‘상근’이 더 많았다. 2018년 8월 방송사 최초로 <티비에스>(tbs)가 방송작가들과 근로계약서를 체결한 바 있다. 방송작가유니온 자료집 ‘방송작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가이드 맵’ 갈무리.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방송 작가의 ‘숙명론’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문화방송을 대리하는 노무사는 심문 최종진술에서 “통상 방송 작가는 드라마 작가와 비드라마 작가로 구분한다. 팩트(사실)에 기반한 글을 쓰느냐 아니냐로 구분하는 것이다. 비드라마 작가를 ‘구성작가’라고 부르는데 이들 대부분은 프리랜서다. 보도국 작가가 (구성작가와) 크게 다른지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방송 작가, 특히 시사교양·라디오·예능·다큐 등 비드라마 부문에서 일하는 ‘구성작가’ 다수가 프리랜서 처지에 놓인 현실을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제시한 겁니다. 사쪽 노무사는 또한 두 작가가 방송 아이템 선정 등 업무 과정에서 상급자의 지시·지휘를 받아들인 것을 두고도 “위임계약에서는 보통 ‘갑을관계’가 발생한다. ‘사용자 지시’가 아니라, ‘갑을관계’가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작가를 노동자로 인정하느니 차라리 ‘갑질’ 인정이 낫다는 주장처럼 들렸습니다.
유정씨는 이날 최종진술에서 “저희는 엠비시 정규직임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닌, 사회 보편적 기준의 근로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해고의 부당함조차 다투지 못한 채 일터에서 쉽게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현명한 판단 내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고 덧붙였습니다. 두 작가는 이번 싸움이 구성작가를 포함한 다른 방송 작가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방송 작가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프리랜서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바꿔주고픈 바람이었습니다. 어깨가 무거웠던 두 작가는 이날 오후 심문회의가 끝난 뒤 판정 결과가 나오는 저녁 8시까지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 사무실에 모여 애타는 마음을 함께 달랬습니다. 결과는 앞서 밝힌 대로 이들의 ‘작은 승리’였습니다.
여기서 끝은 아닙니다. 중노위 판정 결과는 나왔지만, 자세한 내용을 담은 판정문이 나오려면 한 달 정도 기다려야 합니다. 문화방송 사쪽은 판정문을 받은 뒤, 불복할 경우 15일 이내에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노위 판정대로 두 작가를 원직 복직시키는 선택도 가능합니다.
지난 2017년 11월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작가지부 조합원들이 직접 제작한 큐카드(대본 등이 적힌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문화방송의 선택이 어느 쪽이든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중노위의 ‘초심 취소’(지노위의 판정을 취소하여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임을 인정하며, 해고는 부당하다는 의미) 판정이 나온 뒤 언론시민단체들은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방송작가유니온은 22일 낸 성명에서 “중노위의 이번 결정은 ‘프리랜서’라는 허울 아래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있던 방송작가들의 ‘무늬만 프리랜서’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방송작가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은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전국의 2만여 방송작가들에게 냉소와 체념을 넘어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두 작가가 싹 틔운 “희망과 용기”의 씨앗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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