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9.
백 소장이 넓힌 정치에 대한, 통일에 대한, 우리말에 대한 상상의 지평은 지면을 모두 펼쳐도 그려내기 어렵다. 이는 소설가 황석영, 유홍준 미술평론가와 함께, 백 소장을 “조선의 3대 구라”로 이른 지식인들의 농담과도 맞물려있다. 민중적·진보적 상상과 도발이 전제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던 작위였다. 그의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말은 그의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글을 읊는 것이고, 그 글은 그 말을 옹근 새기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한겨레> 창간호 때부터 등장한다. 이윽고, 백 소장은 1989년부터 통일문제연구소장으로서 <한겨레>에 ‘참벼논에 물을 대고자 할진대는'(89년), ‘장준하 선생 죽음 진상 밝히라'(93년), ‘새 아침 여는 종소리 ‘얼러라 퀑!’’(94년), ‘북행길, 돈과 소떼만 가서야'(98년) 등을 기고했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길을 찾아서'를 또 정기연재했다.
그가 민중의 통념과 익숙한 태도에 금을 내고 지워 지평을 넓히는 방식은 가령 이렇다. ‘새 아침 여는 종소리 ‘얼러라 퀑!'’은 모두 즐겨마다질 않는 ‘징글벨’이 우리의 종소리가 아님을 설파하는 데서 논리를 확장한다. ‘북행길, 돈과 소떼만 가서야’는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기소르망)이라는 찬사와 함께 전세계가 놀란 ‘정주영 현대회장의 소떼 방북’에 대해 내재적 성찰로 시선을 확장한 경우다. 그는 이 칼럼에서 ‘돈의 방북’은 돈만 있으면 방북이 통할 수 있다는 의미와 함께 함께 누군가에겐 장벽을 제공한다는 역설이 되는 점, 재벌의 화려한 방북이 국제독점자본의 무제한 증식의 위기를 은폐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 등을 강조한다.
그의 생애를 그가 남긴 글을 언급하지 않고선 졸가리로도 쳐내긴 어렵다. 그의 행로를 사실상 결정지은 백범 김구와의 인연은 아랫글에서 볼 수 있다. 2008년 10월 ‘길을 찾아서’에 연재한 한 꼭지, 제목은 ‘백범 선생의 ‘통일 사자후'’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1998년 6월18일치 6면에 실린 논단.
1988년 ‘통일마당집 벽돌쌓기’ 기금 마련을 위해 백범 김구 선생의 붓글씨 2점 가운데 변박장 교수(당시 순천향대 부속병원)가 사서 통일문제연구소에 전시해 놓은 글. ‘찰벼논에다 물을 대고자 한다면 하얀 차돌멩이에서 나오는 맑은 물을 대거라’는 내용으로 통일운동의 순수성을 당부한 것이다.
백범 선생의 ‘통일 사자후'
백기완-나의 한살매 10
1948년이던가. 아버지가 어딜 좀 가잔다. 서울에 따라온 것도 잘못이었는데 어딜 또 따라가느냐, 싫다고 했다. 그러는데도 마구잡이로 가자고 해 따라가니 백범 선생님의 집이었다.
큰 꾸벙(절)을 넙죽, 눈을 들다가 나는 눈살을 멈추고 말었다. 일찍이 할머니로부터 들은 바 있긴 했어도 꼭 까끔(조각)에 맞닥뜨린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푸근할 수가 없는 할아버지다.
“눈이 빛나는구나, 누구지?” 하고 물었다. 아버지가 “네, 저 황해도 구월산 밑 백태주 어르신네의 손자고, 제 막내”라고 하니, 놀라는 모습으로 내 손을 잡으며 눈자위가 언짢은 모습을 지으신다.
“그래 내가 잊었었구나. 그때 내가 그 어르신네한테 쇠대접을 받았었지, 쇠대접.”
왜놈 병정을 맨주먹으로 때려눕히고 때(감옥)엘 가셨다가 마곡사, 거기서 우리 집엘 오셨는데 소를 잡아 아침저녁으로 구워 드리고 끓여 드려도 한술도 물리시질 않고 보름을 자셨다는 말을 나는 듣고 자랐다.
그 이야기는 부엌에서도 수군대고 밭머리에서도 수군대고 우리 고을에서는 잇줄(전설)처럼 내려오던 것이 바로 눈앞에서 다시 이는 그런 벅찬 때박(순간)이었다.
그래 그런지 선생님께서는 눈길을 아득히 주시는 듯 낯빛이 훤해지신다. 어린 나는 왠지 배가 더 고팠다.
그때 백범 선생은 ‘남북 정치협상’에 다녀오신 곧 뒤라, 잘은 모르지만 말들이 잘못 날뛰고 있어 우리 아버지가 묻는 것이었다.
“이참에 거둔 알맹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는 선생님께서 김일성 장군한테 속았다고 하고 또 누구는 선생님을 미국의 앞잡이라고 헐뜯어서…” 그랬는데, 백범 선생은 갑자기 가슴을 앞으로 뻑 내시더니 딱 부러지게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고구려 열두 자의 취타 소리보다 더 가파르게 재를 넘고 떠나간 님을 목메어 부르는 장산곶 마루의 북소리보다 더 우람하게 하늘땅을 울리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그런 싸움이 아니래두.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온 곧맴(양심)이 하나가 돼서 갈라진 땅덩이, 찢겨진 겨레를 하나로 하고 그래서 참다운 통일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이야.”
한참을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눈도 깜박이질 않고 꼭 붙박이 까끔처럼 무달(침묵)을 재우시는 것 같다가 “네 이름이 뭐지?” 물으셔서 “백기완이요” 그랬더니, “옳아, 기완아. 이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가고 너희들이 크면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그런 싸움이 아니라는 것. 통일은 제국주의와 싸우는 곧맴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이어 주었으면 하는구나” 그러신다.
아버지가 “알겠습니다” 하고 일어서려는데 선생님이 손을 젓는다. “저렇게 쏘는 눈을 가진 애한테는 무언가를 물려주어야지, 그냥 보내면 되나” 하고 선생님의 글묵(책) ‘백범일지’에 시를 하나 적어 주신다.
‘눈이 허옇게 내린/ 들판을 가드래도/ 발걸음을 흐트러뜨리지 말거라/ 왜냐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뒤에 올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느니라.’
서산대사(휴정)의 시라고 하신다. 나는 그 시가 적혀 있는 ‘백범일지’를 전쟁 때문에 잃었다가 겨우 찾았다. 그것을 88년 ‘통일마당집’(이참의 통일문제연구소)을 짓는 데 보태고자 했다. 그래서 그 글씨를 갖고자 하는 사람을 찾노라고 했다(<중앙일보>). 그랬더니 미국 사는 이만영 선생이 신문사로 엄청난 돈을 보내주고 나는 그 글씨를 미국으로 보내 이참 내 손엔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려주겠다고 했었는데 어디서 살아나 있는지 생각만 하면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난다.
“통일은 네가 이기고 내가 지는 싸움이 아니다. 곧맴이 하나 되는 것”이라는 말(<조선일보> 1972년)을 널리 알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 곧맴이란 무엇일까. 남을 짓밟고 남의 것을 뺏고자 죽이고 불 지르고 갈라놓고 짓이기는 잘못된 틀거리, 잘못된 세계사를 갈아엎겠다는 마음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곧맴은 착한 사람이 이끄는 갈마(역사)와 함께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아주마루(영원한) 혁명가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못한 내 때도 벌써 다 지나가고 있다. 옛일을 더듬는 것도 부끄러워 오늘밤엔 팍 하고 엎으러져 나를 물어뜯고 싶으다. “네 이놈, 네놈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 이놈!”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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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63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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