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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필진] 도올에게 묻다 - ② 로고스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

등록 2007-03-09 15:15수정 2007-03-16 14:09

도올 선생님! 선생님과 대화를 위해 첫 물음,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이해>를 인터넷에 게시한 후에 몇 가지 반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반응을 통해서 느낀 것은 다양한 신학 체계를 짧은 지면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시간동안 대중을 상대로 언론 매체를 통해서 거침없이 자신의 사상을 제시할 수 있는 선생님의 사회적 지위가 부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중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상가에게 개인적으로 기독교라는 객관적인 틀에 의거한 진실담론을 하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기에 한정된 상황에서도 계속 대화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것을 통해서 부차적으로는 대중들과도 소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선생님의 기독교를 향한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한국 기독교계의 반응을 두고 네티즌들의 반응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네티즌들은 선생님과 기독교 사이에서 중용적 입장을 취하고자 하면서도 결국엔 기독교의 독선을 지적하는 쪽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탈근대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진단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생님께서 기독교의 사상적 딜레마를 한쪽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공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로 볼 수밖에 없는 요인들도 분명히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도 제기했던 것처럼 선생님의 기독교신학 이해는 하나의 사상적 기호(嗜好)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것을 하나의 선택적 옵션으로서가 아니라 절대적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설명이 대중 앞에 보다 포괄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가 있습니다. 이 당위에 따라서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요한복음 강해>에서 제시하고 계시는 로고스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에 나타난 기독론의 문제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도올의 “로고스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 이해

선생님도 주지하시다시피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기독론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기독교성과 비기독교성을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도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내부에서 파생된 수많은 분파운동은 예수에 대한 이해 및 해석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생님께서 일관되게 견지하시고 계시는 예수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로고스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의 틀에서 기독론적 이해를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기본적으로 선생님은 예수를 “역사적 예수”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계십니다. 19세기 이후로 기독론에 있어서 가장 중심된 논쟁이 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는 수년 전에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 오강남 박사가 말하고자 한 그 예수와 같은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 때 오강남 박사는 기독교가 믿고 있는 케리그마로서의 예수, 즉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는 역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는 없다”는 명제를 한국 사회에 던져주었습니다. 그 말은 다만 역사적 예수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오강남 박사와 같은 관점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로고스 기독론을 통해 신앙의 대상이자 진리의 실체로서 로고스가 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설명에서 인간 예수는 하나님의 로고스의 임재로 진리의 육체, 즉 진리의 현현이 되신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로고스 기독론의 요지는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계로 진입한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로고스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격화된 진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은 역사적 예수가 아닌 육화된 로고스의 관점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신성은 하나님과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로고스이므로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이해와는 다르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선생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입장은 나사렛 예수는 단순히 우리와 같은 역사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역사적인 예수가 영원한 신적 로고스와의 합일을 통해 인격화된 진리의 현현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2천 년 전 제자들과 함께 살다가 죽은 예수는 우리와 같은 역사적 인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과 예수와의 역사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설명은 본회퍼가 지적했듯이 가현설적인 설명입니다. 역사적 예수에게 현현된 신적 로고스는 하나님의 로고스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제거한 순전히 로고스적 측면에서 볼 때 그 로고스는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므로 하나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것은 하나의 본질은 설명해 주지만 세 위체(혹은 위격)를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선생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닌 유일한 인격신을 믿는다는 고백은 결국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신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적 배경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한 로고스와 역사적 예수를 별개의 두 실체로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정식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이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보혜사 성령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의 기독론적 이해

선생님의 로고스 기독론의 이해는 3세기의 오리게네스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역시 요한복음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해서 나사렛 예수를 영원한 로고스의 체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런 설명은 영원한 로고스와 역사적 예수가 하나의 인격으로 된 “신인”임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적 탐구의 결과였습니다. 이런 사유적 결과가 선생님의 기독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론에 대한 오리게네스적 해석은 전체 기독론 논쟁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 대한 설명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논쟁을 야기한 주제입니다. 4-5세기에 그것은 삼위일체 논쟁과 더불어서 진행되었고, 11-16세기에는 구원론적 논쟁과 더불어서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에는 역사적 예수 논쟁과 더불어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과정과 더불어 지난 1980년대에는 기독론 논쟁의 현대적 논쟁이라 일컬을 수 있는 예수 세미나가 개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예수에 대한 현대신학적 해석은 정말로 다양하게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내용은 역사적 예수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요한복음 강해에서 인용하신 마커스 보그나 타이센의 견해들은 모두 이 현대신학적 논쟁에 기초한 예수 이해와 관련된 것임을 선생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에서 기독론에 대한 이해는 매우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 유명한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경을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된 존재이시며(니케아 신경), 따라서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칼케돈 신경)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 고백에 의거해 기독교 신학은 논쟁과 정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이런 신앙 고백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계시며, 그래서 그런 고백들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진리를 벗어난 잘못된 신앙 고백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선생님의 그런 지적은 어느 정도는 수용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앙고백적 정식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기독교 신학적 본질이 있다는 것도 아울러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그 신경들은 기독교 역사에 불현듯 등장한 프랑켄슈타인과도 같은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니케아와 칼케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정말 많은 신학적 논의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레코로망 사회에서 사상적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기독교가 기울인 신학적 성찰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헬라철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사상이 헬라화되지 않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 부분은 선생님의 책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p.305)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상적 딜레마를 극복하면서 기독교 신학의 정식을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니케아 신경과 칼케돈 신경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경들이 확립되기까지의 신학적 성찰을 고려한다면 결과물을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신경들은 이후의 기독교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도 기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에서의 기독론 논쟁이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과 위로부터의 기독론간의 긴장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동일한 논쟁이 현대신학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니케아와 칼케돈의 정식이 여전히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다루는데 있어서 논의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해석학적 지평이 매우 넓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틀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저는 이러한 기독교 신학의 기본 정신을 벗어난 선생님의 기독론적 이해는 하나의 신학적 옵션이지 절대적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께서는 로고스와 성령은 결국 하나님의 본체에 속한 특질들이기 때문에 결국 한 본질이며 한 실체일 뿐이지 세 위체나 위격으로 볼 수 없음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니케아 신경의 정식을 벗어난 삼위일체적 해석이지요. 이러한 해석은 고대의 사벨리우스나 현대의 칼 바르트가 이해한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격적 유일신일 뿐이지 세 위체로 계신 존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고백되고 계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요한복음이 기록되어지기 전에 바울의 기록(고전 13:13)과 마태의 기록(마 28:19)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학은 이렇게 세 실체로 고백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성을 유일신 신앙과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에 대한 신학철학적 성찰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파생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본질, 세 위체적 존재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지금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말이지만 당시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의 하나님(일자)로부터 세 위체가 유출되었다는 식의 설명 말입니다. 일자로서의 신적 본질(Godhead)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신성으로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구속사적으로 유출되었으므로 이 셋은 결국 하나이다라는 것이 삼위일체 정식의 철학적 논리입니다. 물론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철학적 논리를 유일신 신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복잡하지만 단단한 신념 체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및 예수의 신성의 문제는 신앙적 교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칸트의 통찰력에 따라 초월적 하나님의 존재성을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논의의 여지가 되는 부분들은 믿음의 영역으로 인식한 것이 기독교신학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신학적 성찰들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론 이해는 이 시대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시도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역사적 관점에서, 또 어떤 사람은 과학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이 주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상적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 사상의 한 큰 흐름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것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도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매 시대마다 실념론과 유명론이, 관념론과 경험론이,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현상학과 해석학이 초월주의와 실존주의가 대립하고 갈등하고 경쟁하면서 각 시대의 사상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선생님의 기독론 이해는 고대 로고스 기독론으로부터 현대 역사적 예수 논쟁까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흘러온 사상적 지류 중 하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의 입장은 하나의 옵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것을 옵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절대적 대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학적 견해와 더불어 선생님께서는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지적하시는 기독교의 현상적 문제들은 정말 반성과 회개가 필요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신학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은 신학의 문제이기 보다는 현상적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과 현상 모두를 동일한 과정에서 지적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대중들은 현상과 신학 모두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학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각각의 문제 요소들이 변증법적으로 작용해 더 깊은 신학적 성찰을 낳게 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이해는 이러한 변증법적 흐름의 한 틀 정도로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적 대안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디 선생님의 강의가 이런 변증법적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강의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과 추가적 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가 좀 더 적극적으로 선생님과의 대화를 추진하기를 또한 바랍니다. 아울러 한국의 대중들이 좀 더 균형진 시각으로 기독교의 진리체계들을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계기가 창출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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