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할복투신한 서울대생 조성만 열사의 장례 행렬이 광주 망월동 묘지에 가기 전 전주 중앙성당 앞 사거리에서 노제를 열고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자살’이란 이유로 성당 안에서 장례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34
전북 장수의 장계성당에서 익산 창인동성당으로 부임한 것은 1988년이었다. 통일문제에 눈을 뜨게 해준 조성만 열사 사건, 동생 문규현 신부의 방북사건을 겪은 잊을 수 없는 시절이다.
88년 5월15일 오후 3시30분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서울대 휴학생 조성만이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제 몰아내고 광주학살 진상 밝혀내라”, “남북 올림픽 공동참여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할복투신했다.
나는 조성만이 투신을 한 뒤에야 내가 그의 영세신부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생전에 내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듣고 전주 중앙성당에 가서 영세문서를 찾아보았다. 그제야 조성만이란 친구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그는 중앙성당에 있을 때부터 눈에 띄던 학생이었다. 미사 때 강론을 귀기울여 듣고, 미사가 끝나면 반드시 와서 인사를 했다. 그러나 가까이 와서 적극적으로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저 학생 신자의 한명 정도로 넘겼다. 그 뒤 그는 84년 서울대 자연대에 합격했을 때와 85년 군대에 갈 때 찾아와 인사를 했다. 군대에서도 가끔 편지를 보냈는데 위에서 아래로 종서로 써보내 특이했다. 장계성당에 있을 때도 제대를 했다며, 또 복학을 했다고 인사를 다녀갔다.
조성만이 나를 안 것은 전주 해성고등학교에 입학해서였다고 한다. 거기서 내가 해성학교 종교감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중앙성당을 찾아와 나한테 영세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 소속의 ‘가톨릭민속연구회’에서 활동했고, 함운경·김세진이 속해 있는 서울대 자연대 동아리에서 공부를 했다. 동아리에서 그는 차분하고 심지가 곧고 희생정신이 강하면서도 부드러워 ‘예수 같은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영세를 받은 뒤 내내 사제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그는 어느날 문규현 신부를 찾아가 고백을 했다. 그때 규현 신부는 그에게 “사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을 생각해서 우선 대학을 마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조성만에 대한 이런 모든 이야기를 그가 죽은 뒤에야 알게 된 나는 그에 대한 연민이 더 사무치고,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장례절차로 문제가 생겼다. 교회에서는 그가 자살을 한 것이므로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5월19일 아침, 사도예절 형식으로 명동성당 정문에서 노제를 드렸다. 사도예절은 정의채 신부가 이끌었다. 그 뒤 서울시청에서 열린 노제에는 30만여명의 시민과 학생이 모였다.
나는 해성고에서 그를 위한 장례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전주교구에서도 장례미사를 하지 말라고 전해왔다. 내가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그러려면 사제복을 벗고 하라”고 할 정도로 완강했다. 나는 “그럼 옷 벗고 팬티만 입고 하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죽은 자 앞에서 기도한다는데 옷을 벗고 기도하라고? 옷을 벗고 기도하면 내가 신부가 아니냐?”고 화를 냈지만 끝내 미사를 드리지는 못했다. 결국 전주에서도 장례미사 대신 사도예절 예식서에 있는 기도를 하고 노제를 드렸다.
나는 조성만의 죽음이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단순한 자살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교회의 법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때 청년학생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마저도 장례미사를 드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에 실망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때를 떠올리면 내가 항상 용기있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산화라고 생각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 남북통일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의로운 분노로 죽음을 택한 사람에 대해 산 자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왜 죽었는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가 중요하다. 한 사람이 옳은 일을 위해 감옥에 가거나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선택이다. 예수님 역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조성만 열사의 죽음, 그에 앞선 안중근 의사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현실 교회의 잣대가 아니라 성서의 잣대로 봐야 한다. 요즘은 해마다 그를 추모하는 미사가 봉헌되지만 교구로부터 제재를 받지는 않는다. 그가 투신한 자리에 작은 추모비나 동판이라도 새겨 그의 죽음을 기리고 싶지만 아직 못하고 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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