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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길을찾아서] 벗을 수 없는 소명처럼 규현신부 다시 평양으로 / 문정현

등록 2010-07-20 20:12

1989년 7월25일 평양을 두번째 방문한 문규현(오른쪽) 신부는 8월15일 임수경 학생과 함께 판문점으로 귀환하자마자 연행돼 옥살이를 하다 92년 가석방됐다. 이후 그가 전북 김제성당에 부임했을 때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개발위원회의 대표인 하마오(가운데) 주교가 직접 방문해 위로했다. 왼쪽이 필자.
1989년 7월25일 평양을 두번째 방문한 문규현(오른쪽) 신부는 8월15일 임수경 학생과 함께 판문점으로 귀환하자마자 연행돼 옥살이를 하다 92년 가석방됐다. 이후 그가 전북 김제성당에 부임했을 때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개발위원회의 대표인 하마오(가운데) 주교가 직접 방문해 위로했다. 왼쪽이 필자.
문정현-길 위의 신부 37
1989년 6월 평양을 다녀온 뒤 뉴욕에 머물고 있던 문규현 신부는 처음 임수경의 방북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7월6일 형 정현 신부와 만나기로 한 로스앤젤레스로 간 그는 출국정지로 떠나지도 못한 형 대신 7월 중순께 정의구현사제단에서 누군가를 보내겠다는 소식만 들었다. 그는 사제단이 가지고 올 소식이 무엇일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그냥 모르는 척 뉴욕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러나 내내 마음이 편치 않던 그는 결국 사제단에서 보낸 이상섭 신부와 통화를 했다. 이 신부는 “평양에 있는 임수경에게 보낼 짐이 있는데 좀 전해주시라”고 했다. 그는 사제단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임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선 유학 때문에 2년이나 공석으로 비워둔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개발위원회(인성회) 사무총장 자리로 하루라도 빨리 가야 했다. 하마오 주교가 자신을 기다려준 것에 대한 미안함뿐만 아니라 사무총장으로서 남북통일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현안들을 풀어보겠다는 의욕도 있었다. 더구나 다시 북한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방에서 혼자 고민을 하던 그는 문득 벽에 걸어둔 조성만 열사의 영정과 마주쳤다. 그러자 영정 속에서 조성만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신부님, 통일이 거저 됩니까? 통일이 뭡니까? 통일은 실천이에요.” 그는 순간 ‘분단 조국의 통일제단에 자신을 바친 조성만을 부활시키리라’고 다짐했던 1년 전 일이 떠올랐다. 조성만은 주저하고 있는 그를 계속 다그쳤다. “통일은 삶이에요. 지식이 아니에요. 논리가 아니에요. 통일은 민족에 대한 사랑이고 실천이에요.” 그는 생각했다. 더욱이 분열과 대립을 넘어선 ‘일치와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그분은 십자가형을 겪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던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결정적 질문에서 피해갈 수 없었다. 결국 광주항쟁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윤한봉이 조직한 한국청년연합의 뉴욕 사무실을 찾아간 그는 ‘아무래도 북한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한국청년연합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도울 길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는 내심 하마오 주교가 자신의 북한행을 허락하지 않기를 바랐다. 7월24일 하마오 주교를 만나러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거기서 사제단이 보낸 메리놀선교회의 캔 부제를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미국인을 본 순간 혹시 ‘안기부 끄나풀’은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캔이 가지고 온 편지에는 하마오 주교에게 문규현 신부의 북한 파견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런 암울한 때 어린 딸이 재물이 되고 있으니 민족화해의 뜻을 발휘하지 못한 죄를 고백하고 이루기 위해서 이에 용단을 내려서 일을 해주십시오.” 그는 솔직히 그 자리에서 그 편지를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전한 사제단의 편지를 읽은 하마오 주교는 흔쾌히 수락했다. “신부, 자랑스럽네, 내가 신부와 같이 일하겠다고 택한 걸 참 감사하게 생각하네. 내가 뭘 도와줘야 되겠는가?” 하마오 주교는 73년 적군파의 일본항공기(JAL) 납치 사건 때 평양에 억류됐던 경험도 있어서 남북문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마침내 도망갈 구멍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자신의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그는 하마오 주교에게 말했다. “도와줄 일은 없으시고 주교님을 따르지 못한 걸 용서해주시고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해서 7월25일 그의 두번째 평양행에 나섰다.

그날 나리타공항에서 베이징으로 떠나는 규현 신부와 헤어져 한국으로 온 캔 부제는 곧장 익산으로 나를 찾아와 동생이 입었던 옷을 전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동생의 주검을 보는 것 같아서 옷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사실 그때 규현 신부가 북한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을 거쳐 간 덕분이었다. 당시 일본은 우리 안기부의 안마당이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가 일본을 통해 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 원로 사제들이 그의 방북을 막아보려고 홍콩·필리핀까지 갔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것이다.

2007년 하마오 주교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나는 로마 교황청에서 그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마오 주교는 89년 규현 신부의 방북을 허락하고, ‘교회의 공식 소명을 받아 북한에 간다’는 추천서까지 써주었던 일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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