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8월15일 평양에서 열린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왼쪽) 학생과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문규현(오른쪽) 신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걸어서 남한 쪽으로 돌아오고 있다.(왼쪽 사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연행돼 조사를 받던 동생 문 신부와 필자(왼쪽)가 8월22일 첫 면회가 끝난 뒤 함께 웃음짓고 있다.(오른쪽 사진)
문정현-길 위의 신부 39
1989년 7월28일부터 시작된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단식은 북한 사회를 발칵 뒤집었다. 문 신부는 단식을 해본 적이 있어 버텼지만 임수경은 단식 6일 만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임수경을 평양의 외국인병원으로 보내놓고 다른 외교적인 수단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8월 초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에서 그는 한 동포 신자를 통해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전해달라며 간절하게 말했다. “꼭 삼팔선을 넘어야 한다. 제3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의미가 없다. 판문점을 넘어오다가 미군에게 사살될 수도 있다. 사살되더라도 넘어야 한다. 그래야 삼팔선이 열리는 거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은 그때 옆에서 내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
미국에서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8월12일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는 판문점을 넘는 날을 8월15일, 그것도 안 되면 10월에 있을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로 잡고 있었다.
8월13일 장충성당에서 고별 미사를 드린 그는 김일성광장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임수경이 ‘통일의 꽃’이면, 나는 통일의 꽃을 피우는 화분이다. 내 기필코 분단을 넘어 통일의 꽃을 활짝 피우겠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꽃을 피우는 흙이요, 거름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북한 쪽 창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당국자들은 두 사람의 판문점 통과에 회의적이었다. “꼭 판문점을 넘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북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길이오. 그렇지 않다면 나나 임수경이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소. 우리가 판문점을 넘는 순간 죽는다 해도 상관없소. 바로 그 죽음이 이 분단 현실에 드리는 기도이고 진정한 삶이오.” 결국 북한 당국자가 말했다. “갑시다. 그럼 8월15일에 합시다.”
그렇게 8·15 광복절 때 판문점을 넘기로 합의했는데, 고려호텔 36층 특실에 묵고 있던 임수경이 그에게 전화를 했다. “신부님, 신부님이 판문점 넘는 날을 연기하셨어요?” 그가 그런 일 없다고 하자 “그런데 북쪽에서는 자꾸 연기하자고 하는데요?”라고 말했다. 그는 임수경에게 ‘그러면 안 된다’며 강하게 나가라고 얘기했고, 그 순간 임수경은 수화기를 든 채 창가로 가면서 북한 당국자에게 15일 날 넘어가지 못한다면 당장 여기서 떨어져 죽겠다고 ‘시위’를 했다.
마침내 8월14일, 두 사람은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거대한 10만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열차를 타고 개성을 거쳐 판문점으로 향했다. 기차가 서는 역마다 군중들이 환호를 했다. 조직적으로 동원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북한 민중들이 진심으로 환송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8월15일 오후 2시20분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은 끝내 두 발로 휴전선을 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삼팔선을 넘자마자 곧장 남쪽 안기부에 연행되었다. 문 신부는 옥인동 안가로, 임수경은 서울대병원을 거쳐 안기부로 갔다.
8월22일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첫 면회가 허용되던 날, 나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갔다. 동생 규현 신부의 모습은 몹시 초췌했다. 어머니는 내가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규현 신부를 포옹하면서 “아들, 김대건 신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도 어머니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으셨다. 동생에게 조사받은 내용에 대해 들으며 앞으로 받아야 할 고초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도 사제단의 결단으로 통일의 문이 확 열렸다는 생각에, 꼭 해야 할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우리 형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간다면 고통조차도 기쁨으로 승화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날 면회를 끝내고 나오기 직전 규현 신부가 수갑을 찬 채로 나와 어깨를 겯고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렸는데 그때 그의 활짝 웃는 표정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두 사람에 대한 재판은 애초 따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변호인 쪽에서 함께 해야 한다고 요구해 받아들여졌다. 그해 11월13일 열린 첫 공판 때는 법원에서 방청권을 제한했다. 재판장에 들어가려고 보니 우익단체들이 미리 자리를 다 차지하고 우리 쪽에서는 가족들조차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도 꾹 참고 있는데 우익단체의 상이군인들이 지팡이를 휘두르고 다니며 공포심을 조장했다. 그날 재판은 미뤄지고 90년 2월5일 열린 1심 판결에서 임수경은 10년, 문규현 신부는 8년형을 받았다. 이후 항소심에서 각각 5년형을 받고 수감된 두 사람은 92년 12월24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고 임수경은 99년, 문 신부는 2003년 각각 사면복권됐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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