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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길을찾아서] 눈앞에서 노동자 끌려가자 “화염병 더…” / 문정현

등록 2010-07-28 20:43수정 2010-07-30 14:40

1989년 익산 창인동성당 주임신부를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깊이 참여하게 된 필자는 날로 폭력성이 심해지는 시위 현장의 맨 앞에 서서 노동자들을 보호하려 애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익산 창인동성당 주임신부를 맡으면서 노동운동에 깊이 참여하게 된 필자는 날로 폭력성이 심해지는 시위 현장의 맨 앞에 서서 노동자들을 보호하려 애썼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정현-길 위의 신부 43
1989년부터 전북지역에서도 노동자 탄압과 전노협 건설을 위해 날마다 시위가 있다시피 했다. 시위를 나갈 때마다 노동자들은 성당 마당에 모여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들어올 때를 대비한 연습을 했다. 빈손인 노동자들이 공권력에 맞서 싸우려면 불가피한 노릇이었다. 그런데 사목회 몇 사람이 와서 점잖게 말했다. “신부님,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데모하는 건 좋지만, 총검술을 성당 마당에서 하시면 되겠습니까?” 나는 그들에게 그럼 노동자들은 만날 경찰들한테 당하라는 말이냐며 도리어 호통을 쳤다.

나는 ‘비폭력주의자’라고 자칭하며 남이 폭력을 쓰는 건 비판한다. 하지만 나도 폭력적일 때가 많다. 특히 농민이나 노동자들 같은 약자들이 당할 때는 경찰들과 맞서게 된다. 힘을 가진 자들이 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하는 게 무모하고 애매할 때가 많다.

그해 어느날 노동자의 집에 들렀더니, 들리는 소문으로 익산 시내 고물상마다 2홉들이 소주병이 동이 났는데 그 까닭이 며칠 뒤 있을 시위 때 쓰려고 노동자들이 소주병을 다 수거했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제관 아래 아주 가까이 있던 노동자의 집에서 밤새도록 소주병 부딪치는 소리, ‘찍찍’ 베 찢는 소리가 났다. 화염병을 만드는 소리였다. “저 화염병이 사람을 다치게 할 터인데 어떡하나” 싶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참다못해 인터폰으로 혼을 냈다. “밤새워 화염병을 만들 거야?” 노동자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런데 다음날, 시위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경찰한테 밀리고 깨지다가 잡혀가기까지 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화염병을 찾게 되는 모순이 일어났다. 막다른 골목에서 전투경찰과 대치하게 되고 최루탄이 터지면 노동자들은 화염병으로 경찰을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어린 노동자들이 경찰한테 맞아 다친 채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화염병 더 없냐? 성당에서 실어 와. 그것밖에 안 남았어?”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 시위현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노동자들이 화염병을 던지다가 실수로 자기 몸에 화상을 입고도 병원에 가지 못한 채 상처를 키우는 상황이었다. 나중에야 상처를 발견해 살펴보면 구더기가 나올 정도로 염증이 심해져 있다. 어린 노동자들은 어려서부터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참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노동자들 편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신과 동료들의 권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던 어린 노동자들이 훗날 자라 사회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걸 보면 기특하고 보람도 있다.

나는 노동자의 집을 통해 각 사업장의 파업을 지켜보았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노동자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조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아코디언을 배우고 연주하게 된 것도 노동자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에서였다. 마음으로는 그때 한참 유행하던 행진풍의 노동가요를 멋지게 연주해 노동자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시위 현장에서는 격려해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내가 아코디언을 연주한다고 하면 노동자들이 잔뜩 기대에 찼다가도 제대로 못하고 삑삑거리다 말면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떠들거나 슬쩍 자리를 비웠다. 언젠가는 멋지게 연주를 하고 싶어 열심히 연습했지만 한 번도 뜻대로 연주를 못했다. 요즘엔 왼쪽 어깨와 팔까지 아픈 탓에 아코디언 연주를 영영 못할까봐 아쉽다. 그래서 왼팔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멜로디언으로 종목을 바꿔 틈틈이 연습하고 있다.

창인동성당은 익산 시내 인북로라는 큰길가에 있어서 주변에 관공서들이 가깝고 특히 경찰서와는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게다가 익산에서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집회는 언제나 창인동 노동자의 집에서 시작해 거기서 끝나는 셈이니 성당은 늘 경찰의 사찰 대상이었고, 집회의 마지막 집결지는 항상 그곳이었다. 그때는 창인동성당이 ‘노동자 투쟁의 메카’라는 소리도 들었다.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모이면 경찰들은 성당을 향해서 최루탄을 쏘아대고, 노동자들은 돌멩이로 막으며 대치를 했다. 그때마다 나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앞막이를 충실히 했다. 그렇게 차츰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어갔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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