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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길을찾아서] 영국서 김대중 전 총재 만나 ‘차이’를 확인하다 / 문정현

등록 2010-08-05 20:14

1993년 1월31일 유럽 출장길에 영국에 들른 필자 일행이 바로 직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케임브리지로 건너온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왼쪽 둘째부터 이대훈(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국제담당 활동가)씨, 필자, 김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 전순옥(전태일 열사 동생)씨, 캐서린(영국 원조단체 카포드 실무대표).
1993년 1월31일 유럽 출장길에 영국에 들른 필자 일행이 바로 직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케임브리지로 건너온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왼쪽 둘째부터 이대훈(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국제담당 활동가)씨, 필자, 김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 전순옥(전태일 열사 동생)씨, 캐서린(영국 원조단체 카포드 실무대표).
문정현-길 위의 신부 49
1993년 1월26일 김대중 민주당 총재는 13대 대선 패배의 충격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로 떠났다. 그때 마침 하루 앞서 런던에 와 있던 나는 일행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방문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을 바랐던 사람으로서 위로나마 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그는 운동권의 비판적 지지가 오히려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1시간 넘게 기다려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 시간은 서로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여러가지로 착잡한 마음이 들게 한다.

나는 유신 이래로 그를 동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감옥에서도 만났고 전주 중앙성당에 있을 때도 서로 연락하는 사이였다. 내가 장계성당에 있을 때는 작은 자매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고, 창인동성당에 있을 때는 대통령 후보자로 찾아왔다. 그는 성당에서 유세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어 성당 앞 큰 도로변에서 유세를 했다. 그 뒤 주일미사 때 와서 강론을 해주었다. 그때가 사순 시기라 예수의 부활신앙에 대한 강론을 부탁했다. 76년 3·1구국선언 사건으로 함께 재판을 받을 때 그가 말한 부활신앙에 무척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가 강론을 한다고 하자 성당은 사람들로 꽉 차 마치 유세장처럼 되었다. 그때 “내가 대통령 되면 어머니, 꼭 청와대에 모실게요”라는 그의 인사에 내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셨던 기억도 난다.

내가 그를 어쩔 수 없는 정치인으로 여기게 된 것은 89년 임실 고추 싸움 때부터였다. 농민회가 평민당 당사에서 단식농성을 했을 때 그가 농민들을 지지해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신부님의 말씀이 옳지만 정치는 다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물론 그는 정치인이고 나는 사제이니 서로 처지가 다르긴 하지만 그 역시 가톨릭 신앙인이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

그렇게 영국에 다녀온 뒤부터 몸이 점점 힘들어졌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허전했다. 곰곰이 생각하니 92년 12월 문규현 신부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이 된 뒤부터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동생이 구속된 뒤 내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금마성당의 주임신부로, 또 작은 자매의 집 책임신부로 일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면회를 다녔다. 또 동생을 대신해서 여기저기 강연도 다녔다. 그렇게 2년을 살다가 갑자기 중요한 일 하나가 없어지자 공황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그래서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72년 지학순 주교님의 구속사건 뒤부터 그때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당 사목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해야 했고, 그 와중에 감옥생활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민중들의 삶에 눈을 뜨면서 노동자, 농민과 함께 길 위에서 싸우고 잠을 잤다. 독재권력과 자본의 거대한 힘과 맞서다보면 툭하면 경찰들한테 연행돼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고 느닷없이 단식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혼자 고민하다가 규현 신부에게 말했다. “내가 요즘 미칠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거 같다. 안식년이라도 얻어볼까?” 그도 안식년을 권했다. 일단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가서 메리놀신학교에 가보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유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메리놀신학교와 규현 신부를 후원했던 신자들이 그의 근황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자유로운 몸이 아닌 그를 대신해서 출옥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93년 겨울, 규현 신부에 관한 자료를 챙겨 뉴욕을 갔다. 우선 그와 친분이 있는 신자들에게 소식을 전한 뒤 메리놀신학교로 갔다. 학장 신부에게도 안부를 전하고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당분간 마음 정리를 하고 새로운 삶의 힘을 얻을 수 있게 메리놀신학교에서 공부하면 어떨지 의논을 했다. 학장 신부는 흔쾌히 환영하며 입학허가서를 써주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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