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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길을찾아서] 정숙한 삶 일깨워준 고 권정생 선생 / 문정현

등록 2010-09-27 18:57

2004년 9월18일 단식평화순례에 나선 필자가 인천 만석동의 공부방인 ‘기차길옆 작은학교’에서 김재복 수사, 박기범 동화작가와 함께 아이들이 주는 ‘평화지킴이상’과 사탕목걸이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2004년 9월18일 단식평화순례에 나선 필자가 인천 만석동의 공부방인 ‘기차길옆 작은학교’에서 김재복 수사, 박기범 동화작가와 함께 아이들이 주는 ‘평화지킴이상’과 사탕목걸이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문정현-길 위의 신부 83
2004년 9월부터는 단식평화순례단을 꾸려 전국을 돌았다. 이라크 파병 철회를 주장하며 청와대 앞 사랑방에서 단식하고 있던 김재복 수사, 울진에서 단식을 하던 박기범 작가, 전범민중재판운동 활동가 그리고 평화바람이 함께했다. 김 수사는 한국천주교 수도장상연합회 대표로 이라크 현지로 가 성금을 전하고 이라크전쟁의 참상을 직접 보고 온 수도자였다. 동화작가였던 박기범도 인간방패로 이라크를 다녀왔다. 김 수사나 박 작가나 현장에서 전쟁의 참담함을 보고 온 뒤였기 때문에 더 절절히 파병을 반대했다.

단식평화순례단은 18일 동안 울진을 시작으로 안동·함양·실상사(남원)·여수·공주·춘천·시흥·인천·임진각 등 전국을 다니며 시민들을 만나 이라크 철군과 종전을 위한 행동을 호소했다. 그러나 우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파병 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그 순례 동안 인천의 ‘기차길옆 작은학교’에서 평화지킴이상을 받았다. 그해 9월17일 경기도 시흥 샘물공부방과 인천 월미 평화축제에 들렀다가 인천 만석동에 있는 기차길옆 작은학교로 갔다. 좁은 방에 모인 초·중·고 학생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이들은 손수 만든 평화지킴이상을 나와 박기범 작가, 그리고 평화바람에게 주었다. 또 사탕화환도 목에 걸어 주었는데 그 어떤 화려한 꽃다발보다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아이들과 같이 징을 치고 북을 치면서 가난한 동네를 누비고 돌아다녔다. 아이들이 굉장히 신나했다. 그 아이들은 지금까지도 우리 평화바람과 인연을 맺고 있다. 대추리에 있을 때는 대추리를 지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내가 아이들 손을 잡고 있는 벽화를 그려주어 대추리의 명물이 되었다. 용산 남일당에 있을 때는 미사에 자주 참여하며 아이들 하나하나가 기교를 발휘한 손팻말이나 커다란 카드를 유족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한 아이들이 자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9월20일에는 임진각 ‘평화의 종’에서 ‘바끼통’(박기범 이라크 통신)과 함께 전범민중재판운동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그해 가을에는 충북 괴산 솔뫼농장에 가서 가을걷이를 도우며 자연농업을 하는 농가와 누룩공동체를 방문했다. 또 부산에서 ‘천성산 살리기’ 단식을 하는 지율 스님을 지지방문하기도 했다.

평화유랑을 다니면서 가장 인상에 남는 분은 권정생 선생이다. 동화작가인 권 선생에 대한 얘기는 익히 들은 바가 많고, 책도 많이 읽었기에 안동을 지나가다 뵙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간다고 말하면 혼내고 오지 말라 한다고 해서 연락도 안 하고 조심스럽게 찾아갔다. 선생의 가난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손바닥만한 방이 두 칸인데, 그마저 하나는 책으로 꽉 차 있고, 침실로 쓰는 방은 겨우 혼자 누워 잘 만했다. 세간도 없이 홀로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댓돌 위에 올라서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은 때마침 인기척을 듣고 나오다가 나와 딱 마주쳤는데 굉장히 놀라셨다. 반가운 마음에서 들어갔지만 내가 무례했다. 어리둥절하던 선생은 내가 문정현 신부라니까 그제야 얼굴을 좀 펴시더니 문간으로 나가서 토방에 걸터앉으라 했다. 거기서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날 오두막 주변의 잡초 하나까지 소중히 여기고 길을 다닐 때도 다른 생명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선생의 모습을 보며 감동했다.


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
선생이 내게 “전쟁 반대를 신부님 혼자서 하는 것 같아요.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시던데 김지미도 만날 나오면 식상하지 않아요?” 했다. 그 말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나는 그 말이 전쟁 반대가 혼자서 되겠느냐? 그것은 민중 속에서 무르익어야 되는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선생은 이미 물질화된 세상에서 희망을 못 보시는 것 같았고, 나는 그래도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우리가 삶의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고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선생의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분의 생각은 가식이나 욕심 하나 없이, 정말 땅과 호흡을 맞춰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면서 터득한 것들이라 그 말씀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선생과의 만남은 나를 정숙하게 만들었다. 2007년 5월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로 마지막 모습이나마 뵙고 싶어 장례식에 참석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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