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지적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우리마을’에서 만난 김성수 성공회 대주교는 여느 종교계 어르신 같지 않고,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김 주교는 사무실에 놓인 ‘촌장’ 모자와 완장을 차고서 인터뷰에 응했다. 강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대한성공회 김성수 대주교
대한성공회 김성수 대주교
아이의 영정을 부둥켜안고 있는 것인지, 아이의 영정으로 가까스로 육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상처 입은 애벌레처럼 동그랗게 꼬부린 어미의 가슴마다 미소 띤 아이 사진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 어버이날 다음날이었다. 청와대 바리케이드에 가로막혀 길바닥에서 밤을 새운 세월호 유가족들은 말이 없었다. 유가족들을 지키자고 모여든 300여 시민들도 그들 뒤에서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적막한 시간이 땡볕 아래 느리게 흘렀다. 구호도 깃발도 없었다. 그들의 침묵은 통곡보다 섬뜩하고 아우성보다 강렬했다. 그것은 농성이라기보다는 참회의 묵언수행, 서약의 기도 같았다. 신은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었을까.
특정한 종교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요즘은 자꾸 어떤 초월적 존재를 찾게 된다.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냐?”고 신을 원망하다가, “이 가여운 넋들을 제발 편안한 곳으로 보내 달라”고 신에게 간구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묻는다. 이런 참혹한 사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신의 깊은 뜻은 대체 무엇이냐고. 이런 질문에 신실하게 답해줄 어른을 찾다가 문득 그가 떠올랐다. 대한성공회 김성수(84) 주교. 그는 요즘 강화도에서 지적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우리마을’을 운영하며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마을’ 안에서 김성수 주교는 “촌장님”이라 불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은 “친구”라고 불린다. 우리가 방문한 16일 오후, 청바지에 푸른 티셔츠를 입은 팔순의 촌장님이 콩나물작업장에서 나와 우릴 맞았다.
물속에 갇힌 애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요즘 사는 게 영 슬프고 괴로워서… 염치없지만 주교님께 하소연을 하러 왔다. 어째야 좋을까?
“나를 과대평가하셨다. 부끄러운 건 난데…. 아직도 배 안에 있는 아이들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다. 그 배 타지 말라고, 왜 진즉에 그런 걸 예견할 수 없었을까. 사회 한구석이 썩어가고 있는데, 냄새가 나는데, 왜 그걸 못 느꼈을까. 그걸 재빨리 도려냈으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텐데. 이번에는 정부의 책임도 크고, 사장이라는 사람이 빨리 나와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고백해야지. 에이, 못됐다. 바다에 있는 아이들한테 미안하고 부끄럽기 한이 없어. 물속에 한달째 갇혀 있는 저 어린 애들, 우리한테 살려 달라고 소리 못 지르지만 영혼으로 그 소리가 들릴 때, 얼마나 부끄럽고 뜨뜻한 밥 먹는 게 창피한지….”
-주교님도 그 아이들 위해서 기도하시나?
“허어~ (한숨) 24시간 기도한다면 거짓말이지만, 거의 매순간 ‘하느님 뜻대로 해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소원하고 빈다. 내가 옛날 신학원 다닐 때 원장이 대천덕 신부라는 미국 사람인데, 누가 있건 없건 12시만 되면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노트에 자기가 기도하고 싶은 사람, 단체 이름을 잔뜩 써놓고 그걸 30분이고 40분이고 정성스럽게 외워가면서 기도를 했다. 요즘 그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나부터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하고 남들 생각을 해왔다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후회도 하고.”
고향 부지 3천여평을 헌납해 연
지적장애인 재활시설 ‘우리마을’
50여명이 콩나물 등 키우며 일해
물려받은 나머지 땅·재산도 기부
그는 가진 걸 모두 털었다
“개인 구원과 정의는 같이 가는 것
요즘 그 배(세월호) 회사 사람들
교회가 구원파라는데 구원이 뭐야?
그런 하느님이 세상에 어디 있나
하느님은 다 똑같은 사랑 주신다”
-지난 반세기, 근대화와 민주화로 우리 사회가 많은 걸 이뤘다고 믿었는데, 요즘 보니 그게 여기저기 ‘날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잘못 산 걸까? “이게 어제오늘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벌써 수십년, 건국 60년간, 그렇게 엉망진창 쌓아온 것이 넘어진 거다. 여러 가지가 문제지만 난 특히 교육이 문제라고 본다. 내 아이만 돈 많이 들여서 가르치려고 했지, 이웃을 가르치는 교육은 빠져 있지 않았나. 혼자 잘되기 위한 교육 말고, 손 붙잡고 같이 가는 사람 되게 하는 교육을 했어야 한다.” -주교님 팔십 평생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 온 가치가 있다면? “내가 부끄러운 게, 내가 뭘 하겠다고 작정하고 한 게 별로 없다. 신부가 된 것도, 주변에서 ‘신부 하면 잘하겠다’ 하니까 ‘그거 괜찮겠네’ 해서 된 거고, 지금은 어디 뭐 (엔지오단체들) 이사회 가면 회장 해라 뭐 해라 하는데 그거 내가 훌륭해서 하나? 주변에서 하라니까 한 것뿐이지. 못난이 같은 얘기지만, 나는 뚜렷한 뭐(좌우명)가 없다. 그저 매일이 고맙고 신기하고 희한하고… 그뿐이지.” 김성수 주교는 말끝마다 “내가 무식해서” “내가 못나서…”를 입버릇처럼 덧붙였다. 그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 대부분은, 그의 공이 아니고 “훌륭한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많아서” 이룬 성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모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64년 서른네살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74년 한국 최초의 지적장애인 특수학교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2000년에는 성베드로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고향의 부지 3천여평을 헌납해 지적장애인을 위한 직업자활시설 ‘우리마을’을 열었다. 현재 지적장애인 50여명이 콩나물 키우기나 전자제품 조립을 해서 월급을 받아간다. 그가 물려받은 땅 중에 ‘우리마을’ 부지를 제외한 나머지 4천여평은 동네 주민을 위한 공설운동장 부지로 기증했고, 나머지 일부 땅에 ‘우리마을’에서 곧 퇴직하게 될 장애인을 위한 양로원을 지을 계획이다. 그는 가진 걸 모두 털었다. 개인재산 대부분을 기부했고, 65살 이후 주교로서 받는 월급도 따로 없다. ‘우리마을’ 안에 자리한 사택은, 건축가 사위가 설계하고 자녀들이 돈을 모아 지어줬다. 20대 청년기를 폐결핵 투병으로 다 보내 -지적장애인 한 명을 노동 가능한 인력으로 키우기 위해, 비장애인 교사들이 촘촘히 달라붙어 재활교육과 작업관리를 돕고 있다. 콩나물공장에선, 전 자동시스템으로 훨씬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수작업을 할 수 있게 자동화라인을 없애기도 했다. 자본주의 효율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하는 게 타당한가? 장애인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렇게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뭔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건강한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건강한 사람이 만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건 지상명령이다. 하느님의 명령! 네 이웃이 배고프면 밥 좀 줘. 일을 못하면 일거리를 줘. 그 말씀을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거다. 그걸 전적으로 못하는 게 부끄러울 뿐이지.” 김성수 주교의 어린 시절은 유복하고 평탄했다. 강화에서 선박업을 하는 아버지 덕에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고, 교육에 적극적인 어머니 덕에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와서 보이스카웃, 해양소년단, 아이스하키 선수 등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뜻밖의 시련은 배재중 6학년(고3) 때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각혈을 쏟았다. 폐결핵 3기였다. -폐결핵 환자라고 하는 게 당시에는 굉장한 터부의 대상이었는데. “그때 내가 좀더 똑똑해서 폐결핵이 뭔지 알았으면 못살았을 수도 있다.” -지레 절망해서? “그렇지. 근데 무식하니까.(웃음) 의사 선생님이 ‘인마, 너 이제 죽어’ 했는데. 3기라고.” -병세가 그렇게 되도록 모르셨나? “몰랐다 전혀. 춘천에 아이스하키 시합을 하러 가서 저녁때 숙소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울컥하더니 어마어마하게 피를 쏟았다. 피비린내가 확 나는데, 각혈한 내색 안 하고 수습하고 들어와 친구들하고 놀고… 그때 우리 아이스하키팀 멤버가 많지 않아서 어떻게든 안 빠지고 이를 악물고 이겨보겠다고… 그런 바보가 어딨겠나.(웃음)” -그로부터 10년간, 20대 청년기를 폐결핵 투병으로 다 보내셨다. 그 10년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을 듯하다. 그 이전까지는 부잣집 개구쟁이 도련님이었는데. “10년을 혼자 산 셈이니까. 처음엔 아프다고 가족도 친구도 위로를 많이 하다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멀어지고… 폐결핵 옮을까 봐 내가 어린애를 안으면 다들 싫어했다. 내가 능력도 부족하고 무식하지만, 내 인생에서 그 10년이 나를 많이 가르친 것 같다. 특별히 내가 훌륭한 일은 아직 많이 못 했지만, 어쨌든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 가야겠다는 거, 배웠다기보다는 체험으로 느끼게 되었으니까.” 긴 투병기간을 거쳐 몸이 조금씩 회복될 무렵,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에 출근을 시작했다. 처음엔 서울 사무실에 있었는데, 직장을 구하지 못한 동창들이 수시로 밥 먹자, 차 마시자 하고 찾아오면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걸 보고는 나이든 직원들이 “김군, 이게 자네 회사야? 여기가 무슨 식당이야?” 하고 핀잔을 줬다. 일도 서툴고 사무실 분위기만 흐리다가 결국 수원 사무실로 발령이 났는데, 마침 수원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방이 하나 나서 그곳에 숙소를 정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보육원 아이들이랑 어울려 노는 게 낙이었다. 그걸 본 보육원 아주머니들이 “신부님이 되면 잘하시겠다”고 해서 처음엔 “아이고, 될 말씀이 아니다” 하다가 차차 “한번 해볼까?”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서른한살, 뒤늦은 나이에 성미가엘신학원(성공회대학교 전신)에 입학했다.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으셨나?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죽어가던 놈이 살아나서 뭘 한다는데 내버려둬야지. 또 아프면 어쩌나… 아마 부모님들이 그런 의논을 하셨던 것 같다.” -성공회 신부님은 천주교 신부님과 달리 결혼도 하고 가족도 건사하지만, 그런다 해도 성직자가 된다는 건 뭔가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만 해도 성공회가 교인도 많지 않고 교세도 약할 때라, 그저 신학 공부하러 들어오면 저런 못난이라도 거둬주자 했는지…(웃음) 성공회가 나를 봐준 거지.” -신부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근데 그게 쉬운 게 아니지. 그거 깊이 고민했으면 아마 신부한단 생각 못 했을 거다. 그저 어려서부터 봐온 게 신부님들 미사 열심히 드리고 교인 집 찾아다니고 하는 거였으니까. 서울에서 처음 신부 생활 하는데 가족 없는 사람이 세상 뜨면 가서 수의 입혀드리고 장례해드리고, 내가 가진 건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 있으면 도와주고… 그래 봤자 다 부수적인 일이지. 정말 진심으로 이웃을 섬기느냐, 예수님의 종다운 종으로 사느냐, 이런 게 고민이면서도 무서워서 그냥 넘어온 거다. 거짓말만 하고 사는 거지. 요즘 죽어서 천당 가면 ‘이 사람이 아닌데, 당신은 여기 올 사람이 아냐’ 하고 돌려보낸다며? 성형수술을 너무 많이 해서…(웃음). 나도 거기 가면 ‘너 저리 가, 위선자야’ 그럴 거다 아마.” -주교님 같은 분이 위선자라고 하시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나도 평범한 사람이다.” -나처럼 교회도 안 다니고 종교도 없는 사람이 집착과 탐욕을 버리고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음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세월호 보면서 “우리 잘못 살았나 봐, 나부터 바뀌어야 해” 맘먹고 딱 돌아서면 일상에 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그물망이 너무 촘촘하다. “그러니까 우린 사람이라고. 안 그러면 다 성인(聖人)이 되었게.”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하고는 뭣부터 해야 하나? “그것만 있으면 될 것 같다. ‘고쳐먹어야겠다’. 그 마음 안 가지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잠시나마 ‘고쳐먹어야겠다’ 하는 마음이 하나둘 자라면 큰 나무가 되지 않겠나. 그럼 그늘이 생겨서 누군가 와서 쉴 수도 있고.” -근데 “고치겠다” 해놓고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이래서 신부가 부끄러운 거다. 성직자라는 게 사실 부끄러워. 평신도, 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그런 고운 마음씨가 있는데,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만나면 뭐 질투, 시기, 돈, 이런 걸 생각하니 이게 될 말인가. 지금 가지신 그런 마음을, 하느님은 우리 성직자 마음보다 더 기쁘게 받아들이실 거다. 그 마음만 있으면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한다.” ‘내 하느님, 내 하느님’ 하니까 문제지 -아까 ‘우리마을’ 둘러보면서 직원한테 들으니, 이곳에서 일을 하는 비장애 직원이나 장애인 친구들이나 성공회 교인일 필요는 없다고 하던데. “그럼, 꼭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 -종교시설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복지원은 대개 자기 종교를 가지기를 요구하지 않나? “성공회의 특징은 개인의 이성에 맡긴다는 거다. 대학교수 되려고 목사님 추천서 받고 교회 서약하면 뭐하나? 목사님 추천처럼 그 교회를 52주 다 다녔나? 그런 거 아니지 않나. 왜 거짓말하고 그래. 교인 아닌 사람 들어와서 일한다고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성공회 신도 수가 얼마나 되나? “부끄러워… 5만.(웃음)” -대형 교회 하나의 신도 수가 50만인 경우도 있는데 성공회 전체가 5만이라니! “내년이면 125주년이다. 근데 5만….” -성공회가 우리 사회에 주는 영향력과 메시지의 무게에 비해서 턱없이 적은 숫자다. “궁색하고 교만한 대답이지만, ‘양보다 질’이지. 우리는, 신도가 우리 교회 오기 멀면 근처 가까운 교회 가라고 한다. 하느님 말씀은 다 똑같은 거니까. 장로교, 감리교, 천주교 다 똑같잖아. 하느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똑같이 외우면서 틀린 게 뭐가 있나. 사람이 만든 제도가 우리를 갈라놓고 찢어놓는 거다. 우리는 이성에 대한 신뢰의 강도가 다른 교파에 비해 높다.” -이성에 대한 신뢰? “그렇지. ‘여러분, 헌금 많이 내야 천국 간다’ 하는 데랑,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하는 데랑 어디를 선택할지, 그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결정을 해야지. 우린 본인이 결정을 하게 놔둔단 얘기다.” -성공회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두가지인데, 87년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된 장소가 성공회 정동성당이었다는 점, 그리고 비판적 지식인의 요람인 성공회대학교가 있다. 성공회는 전도와 개인의 구원보다는 이웃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더 중시하는 걸로 보인다. “개인의 구원과 정의는 같이 가는 거다. 요즘 그 배(세월호) 회사 사람들 교회가 구원파라고 하는데 구원이 뭐야? 구원은 왜 저희들만 받아? 그런 하느님이 세상에 어딨나? 구원파건 아니건 하느님이 다 똑같이 사랑을 해주시니까 하느님이지. 사랑이 있으니까 구원을 해주는 거거든.” -정의는 뭔가? “불의를 보고 고치라고 할 줄 아는 사람이지.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손잡고 더불어 가는 사람들이지.” -요즘 그런 말씀 하시면 종북이라고 한다.(웃음) “내가 요즘 주기도문을 좋아한다고. 그 몇줄 안 되는 기도문에 ‘우리’라는 말이 여섯번 나오거든. 근데 자꾸 ‘내 하느님, 내 하느님’ 하니까 문제지. 나와 조금 다른 말을 했다고 못된 사람, 나쁜 사람이라 하고….” -정작 회개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뻔뻔스럽고 당당해서 화가 치민다. “기다리는 수밖에. 그걸 억지로 고치는 법은 독재나 제국주의밖에는 없으니, 어떻게 하겠나. 그 사람들도 죽을 때는 ‘아이고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하겠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도하고 기다려야지….” 김성수 주교가 말하는 기다림이 단순한 관망이 아니란 점은, 그의 평생의 삶이 증명한다. 이웃을 섬기고 함께 버티면서,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치열한 기도로 그는 지치지 않고 기다려왔다. 기다림은,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이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낙관(樂觀)의 의지이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지적장애인 재활시설 ‘우리마을’
50여명이 콩나물 등 키우며 일해
물려받은 나머지 땅·재산도 기부
그는 가진 걸 모두 털었다
“개인 구원과 정의는 같이 가는 것
요즘 그 배(세월호) 회사 사람들
교회가 구원파라는데 구원이 뭐야?
그런 하느님이 세상에 어디 있나
하느님은 다 똑같은 사랑 주신다”
-지난 반세기, 근대화와 민주화로 우리 사회가 많은 걸 이뤘다고 믿었는데, 요즘 보니 그게 여기저기 ‘날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잘못 산 걸까? “이게 어제오늘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벌써 수십년, 건국 60년간, 그렇게 엉망진창 쌓아온 것이 넘어진 거다. 여러 가지가 문제지만 난 특히 교육이 문제라고 본다. 내 아이만 돈 많이 들여서 가르치려고 했지, 이웃을 가르치는 교육은 빠져 있지 않았나. 혼자 잘되기 위한 교육 말고, 손 붙잡고 같이 가는 사람 되게 하는 교육을 했어야 한다.” -주교님 팔십 평생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 온 가치가 있다면? “내가 부끄러운 게, 내가 뭘 하겠다고 작정하고 한 게 별로 없다. 신부가 된 것도, 주변에서 ‘신부 하면 잘하겠다’ 하니까 ‘그거 괜찮겠네’ 해서 된 거고, 지금은 어디 뭐 (엔지오단체들) 이사회 가면 회장 해라 뭐 해라 하는데 그거 내가 훌륭해서 하나? 주변에서 하라니까 한 것뿐이지. 못난이 같은 얘기지만, 나는 뚜렷한 뭐(좌우명)가 없다. 그저 매일이 고맙고 신기하고 희한하고… 그뿐이지.” 김성수 주교는 말끝마다 “내가 무식해서” “내가 못나서…”를 입버릇처럼 덧붙였다. 그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 대부분은, 그의 공이 아니고 “훌륭한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많아서” 이룬 성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모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64년 서른네살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74년 한국 최초의 지적장애인 특수학교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2000년에는 성베드로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고향의 부지 3천여평을 헌납해 지적장애인을 위한 직업자활시설 ‘우리마을’을 열었다. 현재 지적장애인 50여명이 콩나물 키우기나 전자제품 조립을 해서 월급을 받아간다. 그가 물려받은 땅 중에 ‘우리마을’ 부지를 제외한 나머지 4천여평은 동네 주민을 위한 공설운동장 부지로 기증했고, 나머지 일부 땅에 ‘우리마을’에서 곧 퇴직하게 될 장애인을 위한 양로원을 지을 계획이다. 그는 가진 걸 모두 털었다. 개인재산 대부분을 기부했고, 65살 이후 주교로서 받는 월급도 따로 없다. ‘우리마을’ 안에 자리한 사택은, 건축가 사위가 설계하고 자녀들이 돈을 모아 지어줬다. 20대 청년기를 폐결핵 투병으로 다 보내 -지적장애인 한 명을 노동 가능한 인력으로 키우기 위해, 비장애인 교사들이 촘촘히 달라붙어 재활교육과 작업관리를 돕고 있다. 콩나물공장에선, 전 자동시스템으로 훨씬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수작업을 할 수 있게 자동화라인을 없애기도 했다. 자본주의 효율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하는 게 타당한가? 장애인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렇게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뭔가?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건강한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건강한 사람이 만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이건 지상명령이다. 하느님의 명령! 네 이웃이 배고프면 밥 좀 줘. 일을 못하면 일거리를 줘. 그 말씀을 우리가 흉내 내고 있는 거다. 그걸 전적으로 못하는 게 부끄러울 뿐이지.” 김성수 주교의 어린 시절은 유복하고 평탄했다. 강화에서 선박업을 하는 아버지 덕에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고, 교육에 적극적인 어머니 덕에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을 와서 보이스카웃, 해양소년단, 아이스하키 선수 등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뜻밖의 시련은 배재중 6학년(고3) 때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각혈을 쏟았다. 폐결핵 3기였다. -폐결핵 환자라고 하는 게 당시에는 굉장한 터부의 대상이었는데. “그때 내가 좀더 똑똑해서 폐결핵이 뭔지 알았으면 못살았을 수도 있다.” -지레 절망해서? “그렇지. 근데 무식하니까.(웃음) 의사 선생님이 ‘인마, 너 이제 죽어’ 했는데. 3기라고.” -병세가 그렇게 되도록 모르셨나? “몰랐다 전혀. 춘천에 아이스하키 시합을 하러 가서 저녁때 숙소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울컥하더니 어마어마하게 피를 쏟았다. 피비린내가 확 나는데, 각혈한 내색 안 하고 수습하고 들어와 친구들하고 놀고… 그때 우리 아이스하키팀 멤버가 많지 않아서 어떻게든 안 빠지고 이를 악물고 이겨보겠다고… 그런 바보가 어딨겠나.(웃음)” -그로부터 10년간, 20대 청년기를 폐결핵 투병으로 다 보내셨다. 그 10년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을 듯하다. 그 이전까지는 부잣집 개구쟁이 도련님이었는데. “10년을 혼자 산 셈이니까. 처음엔 아프다고 가족도 친구도 위로를 많이 하다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멀어지고… 폐결핵 옮을까 봐 내가 어린애를 안으면 다들 싫어했다. 내가 능력도 부족하고 무식하지만, 내 인생에서 그 10년이 나를 많이 가르친 것 같다. 특별히 내가 훌륭한 일은 아직 많이 못 했지만, 어쨌든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 가야겠다는 거, 배웠다기보다는 체험으로 느끼게 되었으니까.” 긴 투병기간을 거쳐 몸이 조금씩 회복될 무렵,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에 출근을 시작했다. 처음엔 서울 사무실에 있었는데, 직장을 구하지 못한 동창들이 수시로 밥 먹자, 차 마시자 하고 찾아오면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걸 보고는 나이든 직원들이 “김군, 이게 자네 회사야? 여기가 무슨 식당이야?” 하고 핀잔을 줬다. 일도 서툴고 사무실 분위기만 흐리다가 결국 수원 사무실로 발령이 났는데, 마침 수원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방이 하나 나서 그곳에 숙소를 정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보육원 아이들이랑 어울려 노는 게 낙이었다. 그걸 본 보육원 아주머니들이 “신부님이 되면 잘하시겠다”고 해서 처음엔 “아이고, 될 말씀이 아니다” 하다가 차차 “한번 해볼까?”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서른한살, 뒤늦은 나이에 성미가엘신학원(성공회대학교 전신)에 입학했다. -신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으셨나?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죽어가던 놈이 살아나서 뭘 한다는데 내버려둬야지. 또 아프면 어쩌나… 아마 부모님들이 그런 의논을 하셨던 것 같다.” -성공회 신부님은 천주교 신부님과 달리 결혼도 하고 가족도 건사하지만, 그런다 해도 성직자가 된다는 건 뭔가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만 해도 성공회가 교인도 많지 않고 교세도 약할 때라, 그저 신학 공부하러 들어오면 저런 못난이라도 거둬주자 했는지…(웃음) 성공회가 나를 봐준 거지.” -신부의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근데 그게 쉬운 게 아니지. 그거 깊이 고민했으면 아마 신부한단 생각 못 했을 거다. 그저 어려서부터 봐온 게 신부님들 미사 열심히 드리고 교인 집 찾아다니고 하는 거였으니까. 서울에서 처음 신부 생활 하는데 가족 없는 사람이 세상 뜨면 가서 수의 입혀드리고 장례해드리고, 내가 가진 건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 있으면 도와주고… 그래 봤자 다 부수적인 일이지. 정말 진심으로 이웃을 섬기느냐, 예수님의 종다운 종으로 사느냐, 이런 게 고민이면서도 무서워서 그냥 넘어온 거다. 거짓말만 하고 사는 거지. 요즘 죽어서 천당 가면 ‘이 사람이 아닌데, 당신은 여기 올 사람이 아냐’ 하고 돌려보낸다며? 성형수술을 너무 많이 해서…(웃음). 나도 거기 가면 ‘너 저리 가, 위선자야’ 그럴 거다 아마.” -주교님 같은 분이 위선자라고 하시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나도 평범한 사람이다.” -나처럼 교회도 안 다니고 종교도 없는 사람이 집착과 탐욕을 버리고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음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세월호 보면서 “우리 잘못 살았나 봐, 나부터 바뀌어야 해” 맘먹고 딱 돌아서면 일상에 내가 이미 만들어 놓은 그물망이 너무 촘촘하다. “그러니까 우린 사람이라고. 안 그러면 다 성인(聖人)이 되었게.”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하고는 뭣부터 해야 하나? “그것만 있으면 될 것 같다. ‘고쳐먹어야겠다’. 그 마음 안 가지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잠시나마 ‘고쳐먹어야겠다’ 하는 마음이 하나둘 자라면 큰 나무가 되지 않겠나. 그럼 그늘이 생겨서 누군가 와서 쉴 수도 있고.” -근데 “고치겠다” 해놓고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이래서 신부가 부끄러운 거다. 성직자라는 게 사실 부끄러워. 평신도, 교회 안 나오는 사람도 그런 고운 마음씨가 있는데,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만나면 뭐 질투, 시기, 돈, 이런 걸 생각하니 이게 될 말인가. 지금 가지신 그런 마음을, 하느님은 우리 성직자 마음보다 더 기쁘게 받아들이실 거다. 그 마음만 있으면 이 땅에 하늘나라가 임한다.” ‘내 하느님, 내 하느님’ 하니까 문제지 -아까 ‘우리마을’ 둘러보면서 직원한테 들으니, 이곳에서 일을 하는 비장애 직원이나 장애인 친구들이나 성공회 교인일 필요는 없다고 하던데. “그럼, 꼭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 -종교시설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복지원은 대개 자기 종교를 가지기를 요구하지 않나? “성공회의 특징은 개인의 이성에 맡긴다는 거다. 대학교수 되려고 목사님 추천서 받고 교회 서약하면 뭐하나? 목사님 추천처럼 그 교회를 52주 다 다녔나? 그런 거 아니지 않나. 왜 거짓말하고 그래. 교인 아닌 사람 들어와서 일한다고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성공회 신도 수가 얼마나 되나? “부끄러워… 5만.(웃음)” -대형 교회 하나의 신도 수가 50만인 경우도 있는데 성공회 전체가 5만이라니! “내년이면 125주년이다. 근데 5만….” -성공회가 우리 사회에 주는 영향력과 메시지의 무게에 비해서 턱없이 적은 숫자다. “궁색하고 교만한 대답이지만, ‘양보다 질’이지. 우리는, 신도가 우리 교회 오기 멀면 근처 가까운 교회 가라고 한다. 하느님 말씀은 다 똑같은 거니까. 장로교, 감리교, 천주교 다 똑같잖아. 하느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똑같이 외우면서 틀린 게 뭐가 있나. 사람이 만든 제도가 우리를 갈라놓고 찢어놓는 거다. 우리는 이성에 대한 신뢰의 강도가 다른 교파에 비해 높다.” -이성에 대한 신뢰? “그렇지. ‘여러분, 헌금 많이 내야 천국 간다’ 하는 데랑,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하는 데랑 어디를 선택할지, 그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결정을 해야지. 우린 본인이 결정을 하게 놔둔단 얘기다.” -성공회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두가지인데, 87년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된 장소가 성공회 정동성당이었다는 점, 그리고 비판적 지식인의 요람인 성공회대학교가 있다. 성공회는 전도와 개인의 구원보다는 이웃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더 중시하는 걸로 보인다. “개인의 구원과 정의는 같이 가는 거다. 요즘 그 배(세월호) 회사 사람들 교회가 구원파라고 하는데 구원이 뭐야? 구원은 왜 저희들만 받아? 그런 하느님이 세상에 어딨나? 구원파건 아니건 하느님이 다 똑같이 사랑을 해주시니까 하느님이지. 사랑이 있으니까 구원을 해주는 거거든.” -정의는 뭔가? “불의를 보고 고치라고 할 줄 아는 사람이지.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손잡고 더불어 가는 사람들이지.” -요즘 그런 말씀 하시면 종북이라고 한다.(웃음) “내가 요즘 주기도문을 좋아한다고. 그 몇줄 안 되는 기도문에 ‘우리’라는 말이 여섯번 나오거든. 근데 자꾸 ‘내 하느님, 내 하느님’ 하니까 문제지. 나와 조금 다른 말을 했다고 못된 사람, 나쁜 사람이라 하고….” -정작 회개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뻔뻔스럽고 당당해서 화가 치민다. “기다리는 수밖에. 그걸 억지로 고치는 법은 독재나 제국주의밖에는 없으니, 어떻게 하겠나. 그 사람들도 죽을 때는 ‘아이고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하겠지.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도하고 기다려야지….” 김성수 주교가 말하는 기다림이 단순한 관망이 아니란 점은, 그의 평생의 삶이 증명한다. 이웃을 섬기고 함께 버티면서,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치열한 기도로 그는 지치지 않고 기다려왔다. 기다림은,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이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낙관(樂觀)의 의지이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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