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의 피의자로 체포되어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파키스탄 노동자들.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 1992년 9월29일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에 나온 관련 보도의 한 장면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의 인권 상황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⑤ 파키스탄 사형수 이야기(상)
⑤ 파키스탄 사형수 이야기(상)
재작년 여름 어느 일요일. 나는 초나라 장수 관운장 위패를 모셔 놓은 동대문 동묘 앞길을 걷고 있었다. 한낮에 무섭게 내리쬐는 햇볕에 온 거리가 축 늘어졌다. 재판 때가 아니면 반팔 와이셔츠로 다니는데 그날따라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라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모임을 열었다. 거기서 평화협정 초안을 해설하느라 정장을 입었던 거였다.
이 단체는 미군기지 이전비용 부담 문제를 오랫동안 집요하게 파헤쳐 왔다. 요즘은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만드는 걸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모임의 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주장이 북한에 동조하는 이적행위라며 국가정보원이 수사를 하고 있다.
동묘 앞길은 근처 황학동 도깨비시장에서 밀려난 노점상들이 헌 옷이며 신발 등 갖가지 고물들을 좌판에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거기서 공중전화를 한통 걸고 나오는데 갑자기 경찰이 다가오더니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했다. 이 더운 여름에 양복까지 받쳐 입고 안경을 쓴 내가 부랑자나 범죄자로 보였나? 왜 그러는 거냐고 묻자 대답이 참말로 희한도 하다. “당신, 전화하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치니까 당황해하면서 손을 파르르 떨었잖아.” 뭐라? 내가 손을 파르르 떨었다고? 참말로 어이가 없고 황당한 노릇이었다. “내가 변호사인데 당신을 보고 왜 손을 파르르 떤다는 거요?” 가던 길을 계속 가려 하자 그는 앞을 가로막고 파출소로 가자고 나섰다. 현행범도 아닌데 신분증을 보여 줄 필요도, 파출소로 임의동행할 의무도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사법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사형선고
어느새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삥 둘러섰다. 이런 낭패가 있나. 나는 그에게 경찰관 신분증을 제시해 달라고 했다. 그가 당황하더니 저쪽에 서 있던 동료를 불렀다. 동료가 다가와 제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당신 말고, 나 검문한 당신 거 보여 달라 하자 없다는 거다. 나는 들고 있던 봉투 겉면에 당시 상황을 간단히 적은 후 검문 경찰에게 확인 서명을 요구했다. 판세가 바뀌어 내가 저를 취조하는 꼴이 되었다. 그는 얼떨결에 내가 들이민 봉투에 제 이름을 썼다. 버스를 타려는데 또 막아서 결국은 신분증을 보여 주고서야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너 이제 죽었다.’ 경찰을 상대로 형사고소와 민사 손해배상을 청구하려고 마음먹었다. 본인 자백도 받아놓았으니 나중에 딴소리를 할 수도 없으렷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그 경찰, 인생이 불쌍하지 싶어져 그냥 넘어갔다.
무죄를 제법 받아낸 변호사도 이리 당하니 법을 잘 모르는 보통사람들은 어떨 것이며, 머나먼 나라에서 돈 벌러 온 가난한 노동자들은 또 어땠을까. 불법체류자들을 색출한다며 일하는 시간에 공장에 쳐들어가거나, 한밤중에 숙소에까지 들이닥쳐, 도망가던 외국인 노동자가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거기에 더해 변호사가 경찰을 보고 손을 파르르 떨었다는 식의 그 풍부한 상상력에 이르면 낯선 타국에 와서 형사사건에 휘말리게 된 이주 노동자들의 처지는 정말 암담, 그 자체다.
1992년 3월 두 파키스탄 청년, 아미르 자밀과 미안 무하마드 아자즈는 그야말로 절망의 섬에 갇혀 있던 셈이다.
“경찰은 한국말을 잘하는 주비의 말만 듣고, 나와 아미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협박했어요. 우리는 귀, 코, 성기에 전기고문까지 당했어요. 통역도 우리를 때렸어요. 그는 주비의 동업자였고 다른 한국인 통역은 이태원에서 장사하던 사람이었다고 해요.” 사형수 무하마드는 이렇게 호소했다.
1992년 9월 서울형사지방법원은 사법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아미르와 무하마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사건 내용은 이랬다.
‘이태원을 무대로 ‘비키파’와 ‘주비파’라는 파키스탄 폭력조직들이 활동하고 있다. 두 조직은 동족들을 상대로 불법 취업을 알선하고 금품을 빼앗았는데, 서로 갈등이 있었다. 1992년 3월경 비키파가 이태원 상가에서 목걸이를 사면서 위조지폐를 쓰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자 주비로부터 받은 것이라 거짓말을 했다. 본명이 ‘임란 사자드’인 주비는 처벌이 두려워 대신 돈을 갚은 뒤 비키파에 앙심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1992년 3월24일 새벽 2시경 이태원 길거리에서 주비파 일원인 고고가 비키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주비파 6명은 한남동 여관에 모여 보복을 하기로 공모하고 길거리를 찾아다녔다. 3시쯤 비키와 나나를 발견해서 성남 야산으로 끌고 가서 주비파인 아미르와 무하마드가 칼로 비키와 나나 두 사람의 심장과 폐를 난자하고, 확인차 목을 칼로 긋고, 임란(주비)도 이를 거들어 살해했다.’
비키와 나나를 마구 찔러 죽인
임란(주비)은 15년을 받았고
영문도 모른 채 현장에 있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그들은 추기경에게 호소했다 “경찰은 얼굴에 전기고문하고
한국말 잘하는 주비 말만 들었죠
통역까지 우리를 때렸어요” 급조된 조폭 이름, 주비파와 비키파 검찰은 두 조직이 수년 전 결성되어 파키스탄에서 잘 알려져 있고, 국내 폭력조직과 연계될 경우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다며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다. 93년 5월 대법원에서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나머지 셋은 5년 형이 확정되었다. 1996년 가을, 사형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자신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추기경께서 부르셔서 혜화동 집무실을 찾아가니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책임지고 진상을 밝혀보라 하셨다. 사형수들은 광주교도소에, 임란과 또 한 사람은 안동교도소에, 나머지 둘은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몇 달 동안 찾아다니며 진술을 들었다. 23살 아미르는 한국에 오기 전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자동차 매매업을 하는 중산층으로, 파키스탄에 있을 때는 ‘주비파 두목’이라는 임란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사건이 나기 불과 한 달 전 한국에 와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취업 브로커인 임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건 당일도 일자리 때문에 임란을 만난 것일 뿐 그가 주비파 조직원이란 건 소설이었다. 31살 무하마드 역시 불과 한 달 전에 한국에 왔고 먼 친척뻘이 되는 아미르의 소개로 며칠 전 임란을 알게 된 것으로 무슨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비파니, 비키파니 하는 이름 자체가 경찰이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 1980년 군산제일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빨갱이 조직으로 엮을 때도 그랬다. 선생님들이 4·19를 기념하러 막걸리 떠 놓고 모였던 곳에 마침 소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는데 경찰은 여기에 착안해 선생님들이 ‘오송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고 지어냈다. 사건이 난 날은 마침 파키스탄 명절이어서 아미르는 임란과 고고에게 취업을 부탁할 겸 저녁을 같이 먹었다. 임란과 고고는 한국에 온 지 1년이 넘어 한국말을 비교적 잘했고 이를 바탕으로 파키스탄 사람들을 한국에 취업시키고, 여권을 위조, 변조해 주는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미르는 이 자리에 무하마드도 데리고 갔다.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한국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어서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고 모든 게 낯설고 막막했다. 그들은 임란에게 의지했다. 임란은 저녁을 먹고 난 뒤 비키와 나나에게 돈을 받을 것이 있다며 이들을 리버사이드 호텔 방에 불러들였다. 24일 0시경 호텔 방에는 임란과 아미르, 무하마드,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이들 역시 공장에서 일하러 한국에 온 지 불과 열흘 정도밖에 안 되어 물정을 전혀 몰랐다-과 비키, 나나가 모였다. 조금 뒤 임란은 고고를 데리러 간다며 이태원에 갔다가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have something wrong”(무언가 잘못되었어)이라고만 말하고 임란 자신이 일하던 공장이 있는 성남으로 가자 했다. 일행이 성남 공장 근처 야산에 이르자 임란은 갑자기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고고가 비키 친구들에게 살해되었다면서 비키와 나나를 마구 찔렀다.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영문도 모른 채 이 끔찍한 현장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란 혼자서 한 짓이었다. 임란은 아미르와 무하마드를 포함해 다섯 사람을 자신의 범행에 들러리로 세운 거였다. 이들은 공장에서 일해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지 한 달에서 열흘 정도밖에 안 되어서 임란의 ‘주비파’에 가입하고 자시고 할 경황이 못 되었다. 또한 이들에게는 비키와 나나를 죽일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임란에게는 위조지폐 건 이외에도 경쟁자인 비키를 해칠 동기가 또 있었다. 임란은 이태원 미용실에 일하던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임란과 헤어지고 비키와 만났다. 판결은 이들이 한남동 여관에 모여 살해를 공모하고 길거리에서 비키와 나나를 발견하고 끌고 간 거라 했다. 하지만 비키와 나나는 처음부터 이들과 호텔에 같이 있었고 살인 공모를 했다는 장소인 여관의 주인은 그날 파키스탄인들이 온 적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성남 가는 택시요금도 임란이 냈다. 그런데 정작 ‘주비파 두목’이라는 임란은 15년 형이고,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나머지 세 사람은 5년 형을 받았다.
중요한 증거인 ‘두 자루 칼’도 제출 못해
일이 이렇게 엉뚱하게 돌아가게 된 건 상대적으로 한국어에 능숙한 임란이 수사 과정을 가지고 논 데도 있었다. 그는 경찰에서 아미르와 무하마드에게 모든 걸 떠밀었고 경찰은 임란만 말이 통하자 주로 그의 진술에 의존했다. 타리크라는 통역이 있었는데 그는 죽은 비키의 친구로, 경찰이 임란을 잡는 데 적극 협조했었다. 임란은 타리크 너 때문에 내가 잡혔으니 너도 비키나 나나처럼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고 겁을 먹은 타리크는 임란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심지어 타리크는 나머지 다섯이 혐의를 부인하자 수사 과정에서 이들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타리크 이외에 이태원에서 장사를 하는 한국인이 통역을 했는데 이들은 중요한 진실규명 과정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통역 실력이 안 되었다.
피고인들은 경찰이 방망이에 천을 감고 물에 적셔 마구 때리고 전기 충격기를 성기에 갖다대는 등 13일 동안 모진 고문을 했다고 했다. 임란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혐의로 어떻게 조사받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법정에 섰다.
검찰은 살인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두 자루의 칼도 법정에 제출하지 못했다. 아마도 임란이 현장 근처에 묻은 칼에서 자신의 지문이 나올까 두려워 이를 숨겼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른 사람들은 몇 년 뒤 교도소를 찾은 나에게 이구동성으로 지금이라도 칼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만일 검찰이 제대로 된 통역을 대서 다른 사람들에게 칼의 위치를 묻기만 했어도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임란 입에만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 조사는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주비파 두목’ 임란은 15년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사형까지 선고된 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이들이 미국인들이었어도 경찰, 검찰, 법원이, 아니 우리가 그들을 이리 다루었을까?
<다음주에 계속>
영문도 모른 채 절망의 섬에 갇혀버린 파키스탄 노동자들의 92년 모습. 맨 왼쪽이 아미르 자밀이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임란(주비)은 15년을 받았고
영문도 모른 채 현장에 있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그들은 추기경에게 호소했다 “경찰은 얼굴에 전기고문하고
한국말 잘하는 주비 말만 들었죠
통역까지 우리를 때렸어요” 급조된 조폭 이름, 주비파와 비키파 검찰은 두 조직이 수년 전 결성되어 파키스탄에서 잘 알려져 있고, 국내 폭력조직과 연계될 경우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다며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다. 93년 5월 대법원에서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나머지 셋은 5년 형이 확정되었다. 1996년 가을, 사형수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자신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추기경께서 부르셔서 혜화동 집무실을 찾아가니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책임지고 진상을 밝혀보라 하셨다. 사형수들은 광주교도소에, 임란과 또 한 사람은 안동교도소에, 나머지 둘은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몇 달 동안 찾아다니며 진술을 들었다. 23살 아미르는 한국에 오기 전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자동차 매매업을 하는 중산층으로, 파키스탄에 있을 때는 ‘주비파 두목’이라는 임란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사건이 나기 불과 한 달 전 한국에 와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취업 브로커인 임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건 당일도 일자리 때문에 임란을 만난 것일 뿐 그가 주비파 조직원이란 건 소설이었다. 31살 무하마드 역시 불과 한 달 전에 한국에 왔고 먼 친척뻘이 되는 아미르의 소개로 며칠 전 임란을 알게 된 것으로 무슨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비파니, 비키파니 하는 이름 자체가 경찰이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 1980년 군산제일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빨갱이 조직으로 엮을 때도 그랬다. 선생님들이 4·19를 기념하러 막걸리 떠 놓고 모였던 곳에 마침 소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는데 경찰은 여기에 착안해 선생님들이 ‘오송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고 지어냈다. 사건이 난 날은 마침 파키스탄 명절이어서 아미르는 임란과 고고에게 취업을 부탁할 겸 저녁을 같이 먹었다. 임란과 고고는 한국에 온 지 1년이 넘어 한국말을 비교적 잘했고 이를 바탕으로 파키스탄 사람들을 한국에 취업시키고, 여권을 위조, 변조해 주는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미르는 이 자리에 무하마드도 데리고 갔다.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한국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어서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고 모든 게 낯설고 막막했다. 그들은 임란에게 의지했다. 임란은 저녁을 먹고 난 뒤 비키와 나나에게 돈을 받을 것이 있다며 이들을 리버사이드 호텔 방에 불러들였다. 24일 0시경 호텔 방에는 임란과 아미르, 무하마드,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이들 역시 공장에서 일하러 한국에 온 지 불과 열흘 정도밖에 안 되어 물정을 전혀 몰랐다-과 비키, 나나가 모였다. 조금 뒤 임란은 고고를 데리러 간다며 이태원에 갔다가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have something wrong”(무언가 잘못되었어)이라고만 말하고 임란 자신이 일하던 공장이 있는 성남으로 가자 했다. 일행이 성남 공장 근처 야산에 이르자 임란은 갑자기 칼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고고가 비키 친구들에게 살해되었다면서 비키와 나나를 마구 찔렀다.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영문도 모른 채 이 끔찍한 현장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란 혼자서 한 짓이었다. 임란은 아미르와 무하마드를 포함해 다섯 사람을 자신의 범행에 들러리로 세운 거였다. 이들은 공장에서 일해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지 한 달에서 열흘 정도밖에 안 되어서 임란의 ‘주비파’에 가입하고 자시고 할 경황이 못 되었다. 또한 이들에게는 비키와 나나를 죽일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임란에게는 위조지폐 건 이외에도 경쟁자인 비키를 해칠 동기가 또 있었다. 임란은 이태원 미용실에 일하던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임란과 헤어지고 비키와 만났다. 판결은 이들이 한남동 여관에 모여 살해를 공모하고 길거리에서 비키와 나나를 발견하고 끌고 간 거라 했다. 하지만 비키와 나나는 처음부터 이들과 호텔에 같이 있었고 살인 공모를 했다는 장소인 여관의 주인은 그날 파키스탄인들이 온 적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성남 가는 택시요금도 임란이 냈다. 그런데 정작 ‘주비파 두목’이라는 임란은 15년 형이고,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나머지 세 사람은 5년 형을 받았다.
파키스탄 사형수들의 문제를 5년 뒤인 1997년 집중조명한 <피디수첩> ‘나는 살인범이 아니다-사형수들의 절규’의 몇 장면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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