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30일 서울 용산구 도원동 재개발지역에서 세입자들이 농성하는 18m 높이의 망루를 향해 철거용역업체 직원들이 물세례를 퍼붓고 있다. 5시간 만에 세입자들은 물을 뒤집어쓰고 끌려나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⑦ 서울 달동네 재개발 사건(하)
⑦ 서울 달동네 재개발 사건(하)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김소진은 이 소설에서 미아리 산동네 한 지붕 아홉 가구 ‘장석조네 집’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풀어 놓았다. 한겨울 이른 새벽. 아이는 아홉 가구가 함께 쓰는 변소에서 원뿔형으로 딱딱하게 굳은 언 똥에 오줌을 갈기고 돌아오다가 그만 옆방 짠지 단지를 깨고 말았다. 어른들에게 혼이 날까 울상이 된 녀석은 마당에 쌓인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어 단지를 덮어 놓고는 자리를 피해 하루종일 온 산동네를 쏘다닌다. 해가 중천에 뜨면 눈사람이 녹을 텐데…. 재개발로 동네가 다 무너져내린 폐허, 어른이 된 그는 사람들이 떠나간 빈집 깨진 항아리에 똥을 누며 자신을 지탱해왔던 기억들이 사라지는 데 이르러 ‘비록 속눈썹이나마 주책없이 적시고’ 앉았다.
‘영구임대주택’을 둘러싼 꼬드김과 반발
어디 미아리에서 김소진만 그랬으랴. 돈암동에서, 사당동에서, 봉천동에서, 이문동에서 허물어져내린 담장이며 굴뚝, 창호 미닫이문 떨어져나간 안방구석에 기대어 있는 괘종시계, 마당에 처박힌 양은대야며 요강단지. 골목을 가득 채웠던 아이들 노는 소리. 이 기억들은 다 사라졌다. 김소진은 이 기억들을 찾으러, 서른넷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재개발을 통해 사라진 건 그저 낡고 허름한 집들만이 아니라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동네 이웃들 간의 따뜻한 정과 공동체였다. 요즘 어느 아이가 있어 이런 기억들을 만들어 가며 동네를 쏘다니고 있을까. 스마트폰과 인터넷 그리고 영어학원 오가는 길이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떠오를 기억의 거의 전부일 테니 그때도 사람들이 소설이란 걸 쓰고 읽기는 할까. 1997년 7월, 그날 밤은 무척 더웠다. 나는 돈암동 철거싸움에서 두 번씩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정종구와 전농동 철거지역을 찾았다. 온 동네가 거반 다 부서져 마치 전쟁터 같았는데 동네 외곽을 전경 수백명이 에워싸고 출입을 막았다. 경찰 포위망 안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동네 철거민들이 둘로 나뉘어 한편은 폐허 한가운데 지어진 5층 망루 위, 다른 한편은 그 아래서 서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2년 전 전농동 세입자대책위는 재개발조합과 긴 실랑이 끝에 ‘영구임대주택’을 짓기로 합의했다. 돈암동에서 처음 합의된 영구임대주택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공공임대주택’이었다. 여기에는 일반 임대주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보증금과 월세, 그리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임대기간이 계속 연장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여기에 더해 아파트를 짓는 동안 세입자들이 임시로 살 수 있는 가수용시설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동대문구청은 세입자 가수용부지 설치를 승인했다. “재개발사업은 주민 스스로의 사업이므로 임시 가수용시설이 필요하다면 조합에서 조합 부지 내에 가능한 한 최소의 범위 내에서 적의 판단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96년 9월까지 세입자 52가구에 각 10평 크기로 지어주기로 우리 사무실에서 공증까지 했다. 그래 놓고는 조합과 건설회사가 태도를 바꾸었다. 공공임대 아파트가 같이 있으면 아파트 시세가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돈으로 52가구 세입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마침 청량리에 짓고 있는 임대아파트에 입주시켜 주고 가수용시설 대신 이주비도 넉넉히 주겠다고 꼬드겼다. 임대아파트를 안 지으면 큰 평수를 40평짜리에서 70평으로 올릴 수 있었다. 세입자들 대부분이 결국에는 조합의 제안에 동의하고 이주비를 받아 동네를 떠났다. 8가구가 마지막까지 남아 처음 약속대로 이행해줄 것을 요구하자 구청은 강제철거 계고장을 보냈다. 그러고는 구청이 가수용단지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8가구는 18m 높이 망루에 올랐다. 애초 거기에는 청량리 임대아파트로 들어갈 것인지를 놓고 조합과 어느 정도 협상할 의사가 있었던 다른 주민들이 있었다. 8가구는 이들을 내쫓고 망루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수도와 전기를 끊어 빗물을 받아 써 가며 한 달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망루에서 쫓겨난 주민들이 시공사 쪽 안전모자를 쓰고 위로 돌을 던지자 망루 안에 있던 8가구 중 일곱 집 아주머니들이 아래로 내려갔다. 왜 저들에게 안전모자를 준 거냐고 따지며 시공사 쪽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모두 경찰에 잡혀가 재판을 받았다.
97년 전농동 재개발조합은
세입자 영구임대를 약속했으나
집값 떨어질라 이주를 회유했다 52가구 중 8가구가 망루에 올랐다
세입자간 패싸움, 용역의 방화…
이듬해엔 용산 도원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0년 뒤 용산참사의 전주곡이었다 커피를 타 주던 아주머니의 비보를 듣다
내 눈에 비치는 동네 모습이 참으로 막막했다. 철거 용역들과 전경들이 빙 둘러 포위를 하고 구경하고 있는 가운데, 살던 집과 동네에서 쫓겨나게 된 세입자들끼리 서로 화염병, 돌 던져 가며 싸움을 한다? 어느 편의 잘잘못을 떠나 정말 이건 아니다. 그날 밤 내내 나는 양쪽을 오가며 중재를 했다. 망루 위 입장은 분명했다. ‘우리가 전농동을 버리고 청량리 임대아파트로 가고, 가수용단지를 포기하게 되면 돈암동에서 처음으로 어렵게 얻어낸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앞으로 다른 지역 철거싸움에 나쁜 선례를 만든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저 망루 아래 주민들도 잘 설득해서 끝까지 같이 가야 할 거 아니냐고 권해 보았지만 양쪽 감정의 골은 너무 깊었다. 새벽 동이 틀 무렵 나는 망루를 내려왔다. 그 자리를 떠나기 바로 전에 8가구 아주머니들 중 경찰에 안 잡혀가고 유일하게 그곳에 남아 있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커피를 권했다. “변호사님, 밤새도록 왔다갔다하면서 너무 고생하셨어요. 커피 한잔 하고 가세요.” 동이 트는 걸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저 망루 아래는 폐허요, 멀리 전경들과 용역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아주머니의 앞일이 잘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그 아주머니가 망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여년 뒤 저 용산에서 벌어질 일의 전주곡이었다. 아침부터 전경 300명에 적준토건 소속 용역 300명이 망루 아래를 에워쌌다. 오후 들어 용역들은 망루 1층에 폐타이어들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망루를 뒤덮고 위로 솟구쳤다. 망루 위에 있던 주민들이 불길을 피해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나중에 용산 재판 하느라 수없이 보았던 그 동영상 장면 그대로가 미리 시현되었다. 용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조합과 용역들은 망루 위에서 세입자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망루가 불탄 거라고 주장했다. 세입자들은 용역들이 1층 방화벽을 부수고 폐타이어에 불을 질러서 그렇게 된 거라며 방화 살인자를 처벌하라고 호소했지만 벽에다 대고 소리 지르는 거였다. 망루에서 떨어진 남자들 열 명이 허리, 팔다리, 갈비뼈, 골반 등이 부러지고 금이 간 채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 중 세 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로 구속되었고 그들의 처들 역시 먼저 구속되어 있었으니 그 아이들은 돌볼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 먼동이 터오던 새벽, 나에게 커피를 타 주던 그 아주머니는 경희대 병원에 실려가 숨을 거두었다. 오오, 비바람과 햇빛, 추위를 피해, 사람들 살려고 짓는 집이 사람을 죽인 거였다. 조합과 시공사가 재개발 지정으로 가격이 뛰어 거저 얻게 된 막대한 이득의 아주 조금을 내어 임대아파트를 지어주기로 한 처음 약속을 지켰더라면 돈암동처럼 모두가 잔치 벌이며 끝났을 일이었다. 돈이 사람을 죽인 건 용산이나 전농동이나 매한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아파트 분양받아 한몫 챙기려는 마음을 안 가져본 사람이 별로 없을 테니 모두가 다 그 아주머니를 죽인 공범들이다. 부동산경기 활성화, 그리고 열사달력
이듬해인 1998년 3월 용산구 도원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2만평 재개발단지 폐허 한가운데 5층 망루가 섰다. 세입자 19가구가 가수용시설을 지어달라며 농성을 벌였다. 여기도 전농동에 왔던 철거용역회사 ‘적준’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재개발단지 둘레를 무려 2.5m 높이 철제 펜스로 꽉 둘러막은 뒤 일체의 출입을 통제했다. 심지어 경찰의 출입을 막기도 했다.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망루 안 농성자들을 지원하러 다른 지역 세입자들이 진입을 시도했다. 당시만 해도 인근 지역 대학생들이 철거지역을 조직적으로 돕고 있었고 그날도 대학생들과 타 지역 주민들 100여명이 펜스 옆에서 시위를 했다. 용역들이 여기에 정신을 팔고 있는 새에 10여명이 망루를 향해 달려갔다. 이 과정에서 61살 노인이 용역들에게 붙잡혀 사무실로 끌려가 1시간가량 구타를 당하고 119구급대에 넘겨졌다. 갈비뼈 4개가 부러져 비장을 찌르는 바람에 응급실로 실려갔다. 23살 난 젊은이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세입자들은 농약분무기를 개조해 만든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망루 진입을 시도했는데 이것에 의해 화상을 입은 거였다. 용역과 세입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그랬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전경 수백명이 포위한 가운데 물대포를 쉼없이 쏘고 용역들은 30m 높이 기중기에 달린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망루 꼭대기로 쳐들어갔다. 10여년 뒤 용산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살려달라’는 농성자들 비명이 마이크를 타고 폐허 위로 울려퍼지다가 앰프선이 절단되자 조용해졌다. 5시간에 걸친 세입자들과 용역들 간의 목숨을 건 싸움은 끝이 났다. 물을 함빡 뒤집어쓰고 나온 세입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건설자본과, 집값 상승으로 한몫 얻기를 바라는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 덕에, 어느 정권 할 것 없이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나도 그 10여년 전 돈암동 때부터 이어져온 이런 세입자들 변론을 그 10년 뒤인 용산참사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1년 동안 오른 부동산 가격은 275조원. 대체로 온 나라 임금 총액과 엇비슷하다. 2005년 한 해에만도 무려 346조원의 불로소득이 부동산 소유자들에게 돌아갔다. 그해 우리나라 임금총액 342조원보다도 많다. 집 가진 나도 그 덕을 좀 보았다. 이번 총선이 끝나자마자 벌써부터 강남3구 투기지역 해제를 비롯해 ‘부동산 경기 활성화’ 조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가난한 세입자들끼리 서로 인분 투척하고 화염병 던져 가며 싸우고, 역시 가난뱅이의 자식들인 용역 ‘깡패’들이 세입자들을 때려 내쫓는 일들은 아마도 현재진행형이 될 듯하다. 현재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지만 자기 집에 사는 비율은 전국 54%, 서울은 41%. 주거환경이 열악한 고시원이나 옥탑방에 사는 이들이 수도권만 60만가구다. 집값이 오르면 집 가진 사람이 없는 이들에게서 그냥 돈을 빼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난 연말 ‘열사달력’이란 걸 받았다. 거기에는 서른넷 젊은 나이에 전농동 망루에서 삶을 마친 박순덕을 ‘열사’라 부르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욕심 혹은 변명. 나는 그 달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한겨레 인기기사>
■ ‘논문 표절’ 문대성 탈당으로 새누리 과반 무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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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미아리에서 김소진만 그랬으랴. 돈암동에서, 사당동에서, 봉천동에서, 이문동에서 허물어져내린 담장이며 굴뚝, 창호 미닫이문 떨어져나간 안방구석에 기대어 있는 괘종시계, 마당에 처박힌 양은대야며 요강단지. 골목을 가득 채웠던 아이들 노는 소리. 이 기억들은 다 사라졌다. 김소진은 이 기억들을 찾으러, 서른넷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재개발을 통해 사라진 건 그저 낡고 허름한 집들만이 아니라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동네 이웃들 간의 따뜻한 정과 공동체였다. 요즘 어느 아이가 있어 이런 기억들을 만들어 가며 동네를 쏘다니고 있을까. 스마트폰과 인터넷 그리고 영어학원 오가는 길이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떠오를 기억의 거의 전부일 테니 그때도 사람들이 소설이란 걸 쓰고 읽기는 할까. 1997년 7월, 그날 밤은 무척 더웠다. 나는 돈암동 철거싸움에서 두 번씩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정종구와 전농동 철거지역을 찾았다. 온 동네가 거반 다 부서져 마치 전쟁터 같았는데 동네 외곽을 전경 수백명이 에워싸고 출입을 막았다. 경찰 포위망 안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동네 철거민들이 둘로 나뉘어 한편은 폐허 한가운데 지어진 5층 망루 위, 다른 한편은 그 아래서 서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2년 전 전농동 세입자대책위는 재개발조합과 긴 실랑이 끝에 ‘영구임대주택’을 짓기로 합의했다. 돈암동에서 처음 합의된 영구임대주택은 정확하게 표현하면 ‘공공임대주택’이었다. 여기에는 일반 임대주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보증금과 월세, 그리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임대기간이 계속 연장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여기에 더해 아파트를 짓는 동안 세입자들이 임시로 살 수 있는 가수용시설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동대문구청은 세입자 가수용부지 설치를 승인했다. “재개발사업은 주민 스스로의 사업이므로 임시 가수용시설이 필요하다면 조합에서 조합 부지 내에 가능한 한 최소의 범위 내에서 적의 판단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96년 9월까지 세입자 52가구에 각 10평 크기로 지어주기로 우리 사무실에서 공증까지 했다. 그래 놓고는 조합과 건설회사가 태도를 바꾸었다. 공공임대 아파트가 같이 있으면 아파트 시세가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돈으로 52가구 세입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마침 청량리에 짓고 있는 임대아파트에 입주시켜 주고 가수용시설 대신 이주비도 넉넉히 주겠다고 꼬드겼다. 임대아파트를 안 지으면 큰 평수를 40평짜리에서 70평으로 올릴 수 있었다. 세입자들 대부분이 결국에는 조합의 제안에 동의하고 이주비를 받아 동네를 떠났다. 8가구가 마지막까지 남아 처음 약속대로 이행해줄 것을 요구하자 구청은 강제철거 계고장을 보냈다. 그러고는 구청이 가수용단지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8가구는 18m 높이 망루에 올랐다. 애초 거기에는 청량리 임대아파트로 들어갈 것인지를 놓고 조합과 어느 정도 협상할 의사가 있었던 다른 주민들이 있었다. 8가구는 이들을 내쫓고 망루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수도와 전기를 끊어 빗물을 받아 써 가며 한 달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망루에서 쫓겨난 주민들이 시공사 쪽 안전모자를 쓰고 위로 돌을 던지자 망루 안에 있던 8가구 중 일곱 집 아주머니들이 아래로 내려갔다. 왜 저들에게 안전모자를 준 거냐고 따지며 시공사 쪽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모두 경찰에 잡혀가 재판을 받았다.
1995년 7월 동대문구 전농동 재개발구역에서 철거반원들과 철거민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서고 있다.(위) 같은 날 새벽 기습철거에 놀라 폐타이어를 쌓아놓고 투쟁하는 철거민들. <한겨레> 자료사진
세입자 영구임대를 약속했으나
집값 떨어질라 이주를 회유했다 52가구 중 8가구가 망루에 올랐다
세입자간 패싸움, 용역의 방화…
이듬해엔 용산 도원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0년 뒤 용산참사의 전주곡이었다 커피를 타 주던 아주머니의 비보를 듣다
내 눈에 비치는 동네 모습이 참으로 막막했다. 철거 용역들과 전경들이 빙 둘러 포위를 하고 구경하고 있는 가운데, 살던 집과 동네에서 쫓겨나게 된 세입자들끼리 서로 화염병, 돌 던져 가며 싸움을 한다? 어느 편의 잘잘못을 떠나 정말 이건 아니다. 그날 밤 내내 나는 양쪽을 오가며 중재를 했다. 망루 위 입장은 분명했다. ‘우리가 전농동을 버리고 청량리 임대아파트로 가고, 가수용단지를 포기하게 되면 돈암동에서 처음으로 어렵게 얻어낸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앞으로 다른 지역 철거싸움에 나쁜 선례를 만든다.’ 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저 망루 아래 주민들도 잘 설득해서 끝까지 같이 가야 할 거 아니냐고 권해 보았지만 양쪽 감정의 골은 너무 깊었다. 새벽 동이 틀 무렵 나는 망루를 내려왔다. 그 자리를 떠나기 바로 전에 8가구 아주머니들 중 경찰에 안 잡혀가고 유일하게 그곳에 남아 있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커피를 권했다. “변호사님, 밤새도록 왔다갔다하면서 너무 고생하셨어요. 커피 한잔 하고 가세요.” 동이 트는 걸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저 망루 아래는 폐허요, 멀리 전경들과 용역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아주머니의 앞일이 잘 상상이 되지를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그 아주머니가 망루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여년 뒤 저 용산에서 벌어질 일의 전주곡이었다. 아침부터 전경 300명에 적준토건 소속 용역 300명이 망루 아래를 에워쌌다. 오후 들어 용역들은 망루 1층에 폐타이어들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망루를 뒤덮고 위로 솟구쳤다. 망루 위에 있던 주민들이 불길을 피해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나중에 용산 재판 하느라 수없이 보았던 그 동영상 장면 그대로가 미리 시현되었다. 용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조합과 용역들은 망루 위에서 세입자들이 던진 화염병 때문에 망루가 불탄 거라고 주장했다. 세입자들은 용역들이 1층 방화벽을 부수고 폐타이어에 불을 질러서 그렇게 된 거라며 방화 살인자를 처벌하라고 호소했지만 벽에다 대고 소리 지르는 거였다. 망루에서 떨어진 남자들 열 명이 허리, 팔다리, 갈비뼈, 골반 등이 부러지고 금이 간 채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 중 세 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로 구속되었고 그들의 처들 역시 먼저 구속되어 있었으니 그 아이들은 돌볼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틀 전 먼동이 터오던 새벽, 나에게 커피를 타 주던 그 아주머니는 경희대 병원에 실려가 숨을 거두었다. 오오, 비바람과 햇빛, 추위를 피해, 사람들 살려고 짓는 집이 사람을 죽인 거였다. 조합과 시공사가 재개발 지정으로 가격이 뛰어 거저 얻게 된 막대한 이득의 아주 조금을 내어 임대아파트를 지어주기로 한 처음 약속을 지켰더라면 돈암동처럼 모두가 잔치 벌이며 끝났을 일이었다. 돈이 사람을 죽인 건 용산이나 전농동이나 매한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아파트 분양받아 한몫 챙기려는 마음을 안 가져본 사람이 별로 없을 테니 모두가 다 그 아주머니를 죽인 공범들이다. 부동산경기 활성화, 그리고 열사달력
이듬해인 1998년 3월 용산구 도원동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2만평 재개발단지 폐허 한가운데 5층 망루가 섰다. 세입자 19가구가 가수용시설을 지어달라며 농성을 벌였다. 여기도 전농동에 왔던 철거용역회사 ‘적준’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재개발단지 둘레를 무려 2.5m 높이 철제 펜스로 꽉 둘러막은 뒤 일체의 출입을 통제했다. 심지어 경찰의 출입을 막기도 했다.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망루 안 농성자들을 지원하러 다른 지역 세입자들이 진입을 시도했다. 당시만 해도 인근 지역 대학생들이 철거지역을 조직적으로 돕고 있었고 그날도 대학생들과 타 지역 주민들 100여명이 펜스 옆에서 시위를 했다. 용역들이 여기에 정신을 팔고 있는 새에 10여명이 망루를 향해 달려갔다. 이 과정에서 61살 노인이 용역들에게 붙잡혀 사무실로 끌려가 1시간가량 구타를 당하고 119구급대에 넘겨졌다. 갈비뼈 4개가 부러져 비장을 찌르는 바람에 응급실로 실려갔다. 23살 난 젊은이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세입자들은 농약분무기를 개조해 만든 화염방사기를 가지고 망루 진입을 시도했는데 이것에 의해 화상을 입은 거였다. 용역과 세입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그랬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전경 수백명이 포위한 가운데 물대포를 쉼없이 쏘고 용역들은 30m 높이 기중기에 달린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망루 꼭대기로 쳐들어갔다. 10여년 뒤 용산과 똑같은 장면이었다. ‘살려달라’는 농성자들 비명이 마이크를 타고 폐허 위로 울려퍼지다가 앰프선이 절단되자 조용해졌다. 5시간에 걸친 세입자들과 용역들 간의 목숨을 건 싸움은 끝이 났다. 물을 함빡 뒤집어쓰고 나온 세입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건설자본과, 집값 상승으로 한몫 얻기를 바라는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 덕에, 어느 정권 할 것 없이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나도 그 10여년 전 돈암동 때부터 이어져온 이런 세입자들 변론을 그 10년 뒤인 용산참사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1년 동안 오른 부동산 가격은 275조원. 대체로 온 나라 임금 총액과 엇비슷하다. 2005년 한 해에만도 무려 346조원의 불로소득이 부동산 소유자들에게 돌아갔다. 그해 우리나라 임금총액 342조원보다도 많다. 집 가진 나도 그 덕을 좀 보았다. 이번 총선이 끝나자마자 벌써부터 강남3구 투기지역 해제를 비롯해 ‘부동산 경기 활성화’ 조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가난한 세입자들끼리 서로 인분 투척하고 화염병 던져 가며 싸우고, 역시 가난뱅이의 자식들인 용역 ‘깡패’들이 세입자들을 때려 내쫓는 일들은 아마도 현재진행형이 될 듯하다. 현재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지만 자기 집에 사는 비율은 전국 54%, 서울은 41%. 주거환경이 열악한 고시원이나 옥탑방에 사는 이들이 수도권만 60만가구다. 집값이 오르면 집 가진 사람이 없는 이들에게서 그냥 돈을 빼앗아 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난 연말 ‘열사달력’이란 걸 받았다. 거기에는 서른넷 젊은 나이에 전농동 망루에서 삶을 마친 박순덕을 ‘열사’라 부르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욕심 혹은 변명. 나는 그 달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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