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홍정운군이 다닌 여수의 한 특성화고에서 서동용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현장실습 산업체 방문 카드’(왼쪽). 학교 취업부장이 작성한 것으로, 기타의견란이 비어있다. 반면 유족 쪽에서 복사본으로 가지고 있는 취업지원관이 작성한 ‘현장실습 산업체 방문 카드’ 기타의견란에는 ‘이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업체로써, 기존 승선 보조 및 고객응대서비스 업무를 이어서 하기를 요구함’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사진 서동용 의원실 제공, 장예지 기자 촬영
6일 전남 여수에서 잠수작업을 하다가 숨진 현장실습생 홍정운(18)군은 지난 여름 부모님을 요트 선착장으로 불러낸 적이 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4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요트 투어’를 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한 요트 업체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님들을 많이 받았지만 정작 부모님에게 아름다운 여수 앞바다의 풍광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을 터다.
취업지원관이 작성한 카드에 홍군 ‘요구’ 담겨
속이 깊었던 홍군에게는 꿈이 있었다. 해양레저 전문 특성화고등학교를 나와 일자리를 얻은 뒤 요트 사업을 하겠다는 꿈이었다. 사실상 혼자 일하던 아르바이트 업체 사장은 말없이 시키는 일을 잘하는 홍군을 실습생으로 쓰고 싶다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려다 불의의 사고로 물을 무서워하게 된 홍군은 실습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 때 했던 승선 보조와 고객 응대 서비스부터 차근히 배워볼 참이었다.
이런 홍군의 생각은 홍군이 다니던 특성화고 취업지원관이 작성한 ‘현장실습 산업체 방문 조사 카드’에 그대로 남아있다. 유족이 복사본으로 가지고 있는 해당 서류 기타의견란을 20일 <한겨레>가 확인해보니, ‘이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업체로써, 기존 승선 보조 및 고객응대서비스 업무를 이어서 하기를 요구함’이라고 적혀있다. 더 이상 홍군에게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지금, 해당 서류는 홍군이 현장실습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학교 서류다.
서동용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홍군이 다닌 특성화고에 홍군 관련 서류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학교 쪽은 홍군의 요구사항이 적힌 취업지원관 작성 카드 대신 기타의견란이 비어있는 취업부장 작성 ‘현장실습 산업체 방문 조사 카드’만 제출했다. 이후 의원실이 재차 ‘기제출한 방문 조사 카드 외에 또다른 방문 조사 카드의 존재 여부’ 등을 물었지만 학교는 “의원실에 제출한 1개가 전부”라는 답을 내놨다. “학교 쪽이 홍군의 요구사항이 실습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냐”(전경진 노무사)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실습계획서·동의서 봐도 홍군 업무 경계 ‘불분명’
업체와 학교가 협의해 작성하도록 돼있는 ‘현장실습 프로그램 구성 및 운영 계획서(’실습계획서)에도 홍군의 요구는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았다. 실습계획서에 적힌 실습과제는 ‘보트선체 파손 대처·보트 선체관리·보트기관 관리·항해장배 운용’ 뿐이었다. 잠수 작업은 계획서에 없고 표준협약서에서도 금지하는 업무였다지만 실습계획서는 처음부터 ‘무용지물’이었다. 20일 교육부와 전남교육청, 고용노동부 등이 참여한 공동조사단이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홍군이 다닌 특성화고는 실습계획서를 단독으로 개발하고 요트업체에 공유하지 않았다.
실습계획서는 2018년 도입된 ‘학습중심 현장실습’ 제도의 핵심 요소로, 지침상 기업과 학교 쪽이 학생들의 직무수행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뒤 상호 협의를 토대로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또 실습시간의 30% 이상은 교육 중심으로 편성해야 한다. 전남의 한 특성화고 교사는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실습계획서는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을 바탕으로 작성되는데 영세한 기업들은 뭘 써야할지도 모른다”며 “결국 교사가 쓰게 되는데 실제 업무도 적겠지만 NCS 모듈을 검색해 거기 있는 내용으로 (전공에 적합하게) 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획서대로라면 실습 1주차에는 산업안전보건교육, 직장내 성희롱 예방 교육 등 입문교육부터 하도록 되어 있지만 장담컨대 1주차에 이러한 입문교육 시키는 실습업체는 대부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습중심’이라는 제도의 구색을 맞추려다보니 기업들이 실습생들을 저임금 노동력으로 착취하는 현실이 오히려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실습계획서를 바탕으로 지난해 현장실습 전공적합도는 99.4%라고 발표했다.
유족과 친구들의 말을 종합하면, 홍군 역시 지난달 27일 실습을 나간 직후부터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이 정한 하루 근무시간 상한선(8시간)을 훌쩍 넘겨 하루 10시간 이상 일했고 숨지기 직전 일요일에도 일을 하러 나갔다고 한다. 홍군의 친구 김아무개(18)군은 “(오히려) 아르바이트할 때는 사장이 정운이 하고 같이 운항을 나갔는데 실습을 시작하고 난 뒤 정운이 혼자 손님 맞이하고 배 운항하고 손님 내릴 때까지 모든 일을 다 했다”고 말했다.
특히 학교 쪽이 실습계획서 다음으로 만든 ‘산업체 현장실습 참여 동의서’에는 ‘레저 전반적인 업무 및 선박·요트 점검’이라는 더욱 두루뭉술한 실습 내용이 적혀있다. 이에 대해 유족 법률 지원을 하고 있는 전경진 노무사는 “너무 추상적인 표현”이라며 “앞서 홍군이 승선보조와 고객응대서비스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음에도 결과적으로 홍군의 실습 업무에는 경계가 없게 됐다”고 짚었다. “학교에서 (동의서에 찍을) 도장만 받아오라고 했다”는 홍군의 말에 도장만 건네줬던 홍군의 아버지는 “요트 투어를 갔을 때 아들이 내부 치장을 하고 배 정박할 때 줄을 잡아주는 모습을 보고 왔기 때문에 실습 때도 당연히 그런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은 “사업주는 홍군에게 표준협약서에 따른 안전·보건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고 정해진 실습시간도 준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애초에 명백한 업무 분장이 어려운 영세업체들까지도 ‘참여기업’이라는 이름으로 현장실습생을 폭넓게 받을 수 있게 한 2019년 교육부의 규제 완화가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경엽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직업교육위원장은 “기업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야 업무 분장이 가능한데 홍군이 다닌 업체처럼 영세한 곳에서는 실습생이 모든 업무 영역을 다 넘나들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지난해 2월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가 ‘특성화고 학생·졸업생 교육·노동환경 및 차별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실습계획서에는 분명 어떤 공정이 적혀 있었는데 제대로 된 교육은 없었고 알바생이 된 느낌이었다”, “금융과라 회계 쪽으로 간다고 듣고 갔는데 며칠 만에 갑자기 소독 업무를 시켰다”, “청소하고 사원분들 보조하는 잡일밖에 안 한 것 같다”는 경험담들이 잇따랐다. “하루 12시간까지 근무하는 것을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최저임금을 주겠다”는 업체도 있었다. 2017년까지 실습생은 학생이자 노동자로 최저임금을 받고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었지만 학습중심 현장실습 제도에서 실습생 신분은 학생으로 좁혀졌고 ‘교육 30%’를 이유로 업체가 최저임금의 70%만 ‘수당’ 성격으로 주도록 하고 있다.
잠수 관련 자격이나 면허, 경험 또는 기능을 보유하지 않은 홍군에게 잠수작업을 지시하는 등 12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실이 적발된 업체 사장에 대한 엄벌과 별개로, ‘제2의 홍정운군’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이유다.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와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의 경우 현장실습 폐지보다는 안전한 현장실습을 보장해달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정부에 ‘유해 위험 작업 관련·산업안전 고위험 직종은 5인 미만 사업장 현장실습 전면 금지’, ‘실습기업에 대한 강력한 처벌 대책’, ‘참여기업 선정 및 관리 감독 강화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현장실습생 안전지킴이 플랫폼’ 구축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상현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이사장은 “실습생이 자신의 실습계획이나 담당 업무 혹은 금지 업무 등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부당한 업무지시가 내려왔을 때 즉각 신고-즉각 조처가 이뤄질 수 있는 일종의 경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군의 친구들은 “자격증도 많이 따주게 한다고, 도와준다고 하는 사장이 시키니까 (홍군이) 어쩔 수 없이 ‘네’ 하고 (바다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홍군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현장실습생 보호 시스템을 이제라도 만들자는 절박한 요구다. 이유진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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